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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문서

[한윤수의 '오랑캐꽃']<201>

<협상의 법칙>이란 책을 보면, 최고로 문명화되었다고 알려진 미국 사람들도 인쇄된 것은 무엇이든지 경외심을 갖고 대한다고 한다. 인쇄된 것에는 일종의 권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자제품 매장에 들어선 고객은,
사인펜이나 매직펜으로 쓴 가격표가 붙어 있는 냉장고는 값을 깎아도 된다고 생각하지만, 활자체로 근사하게 인쇄된 가격표가 붙어 있는 냉장고는 감히 값을 깎지 못한다는 것이다.

필리핀 사람들은 더하다. 인쇄된 종이에는 일종의 마력이 있는 줄 안다.
힐레르모가 와서 별지 12호 서식 <외국인근로자 고용 변동 등에 관한 신고서>를 달란다. 이 신고서는 외국인 노동자를 내보낼 때 사장님이 고용지원센터에 제출하는 서류다.
신고서 양식을 내주며 물었다.
"사장님이 나가래요?"
"아뇨."
"그러면 왜?"
"이거 릴리스 페이퍼(release paper 해방문서) 아니에요?"

필리핀 사람들은 이 종이만 있으면 다른 회사에 갈 수 있으므로 릴리스 페이퍼(해방문서)라고 부른다.

"맞아. 하지만 사장님이 사인해야 돼."
"사인 안하면 다른 회사 못가요?"
"못 가지!"
"이 종이, 대한민국 정부에서 인쇄한 거 아니에요?"
"맞아."
"그런데도 못 가요?"
나는 찬찬히 설명했다.
"안돼! 사인이 없으면 이건 그냥 종이일 뿐이야."
그는 저윽이 실망한 표정이다.

▲ ⓒ한윤수

궁금해서 물었다.
"왜 회사 옮기고 싶어요?"
"예, 일이 없어요. 지난주엔 이틀만 일했어요."
"회사가 어렵구먼."
"예."

나는 그에게 특별히 주의해야 할 점을 알려주었다.
"사장님한테 이 종이 먼저 내밀면 안돼요."
"왜요?"
"종이 먼저 내밀면 사장님 화내요."
"그럼 어떻게 해요?"
"먼저 사장님에게 회사 옮겨달라고 얘기해요."
"그 다음에는 요."
"오케이! 하면 이 종이 주세요. 알았어요?"
"예."

그는 확실히 알았다. 인쇄된 종이에도 힘이 없다는 것을.
종이는 그냥 종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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