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침 임박", 일본은 왜 6번이나 계속 거짓말했나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99> 12·12쿠데타와 오월 광주, 여덟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네 번째 이야기 주제는 12·12쿠데타와 오월 광주다.

국회 소집 합의…국회가 열리면 계엄 해제 결의는 시간문제였다


프레시안 : 서울의 봄 시기에 학생들은 군부에 빌미를 줘서는 안 된다며 가두시위를 자제했다. 1980년 5월 11일부터 12일 새벽까지 열린 학생회장단 회의에서 그 방침을 다시 확인했다. 그런데 그다음 날부터 대거 거리에 나왔다. 왜 그런 변화가 생긴 것인지를 더 짚어봤으면 한다.

서중석 : 그렇게 은인자중하고 조심하던 학생들이 어째서 5월 14일, 15일에 거리에 나갔느냐. 그걸 이해하려면 5월 12일경 여러 가지 중요한 움직임이 있었다는 걸 먼저 볼 필요가 있다.

전부터 계엄 해제 요구가 쭉 있어 왔지만 특히 이때쯤 오면 계엄 해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아주 높아진다. 이때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정치권에서도 계엄 해제 문제를 초미의 과제로 제기했다. 사실은 12·12쿠데타 전 정승화 계엄사령관도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 대사와 대화할 때 1980년 4월이나 5월쯤 가면 계엄을 해제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어쨌건 5월에 들어서면서 계엄 해제 요구가 아주 강하게 나오고 있었다. 5월 7일 신민당은 비상 계엄을 즉각 해제하라고 요구했다. 이틀 후인 9일에는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계엄 해제, 임시 국회 즉각 소집, 정부의 개헌 작업 중지를 요구했다.

그러자 신현확 총리는 10일 "사회 안정이 가능하다는 판단이 설 때는 즉각 비상 계엄을 해제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속에서 5월 12일 여야는 20일부터 20일간 임시 국회를 열기로 합의했다. 국회 소집에 합의했다는 것, 이건 굉장히 중요한 사항이다.

프레시안 : 어떤 의미에서 그러했나.

서중석 : 국회의 첫 번째 과제가 계엄 해제, 그다음이 개헌 문제일 것이라는 점은 쉽게 생각할 수 있었던 일이다. 무슨 얘기냐 하면, 국회가 소집되면 계엄 해제를 국회에서 결의할 게 확실했고 그렇게 되면 정부에서는 계엄 해제를 계속 미루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계엄을 해제하라는 것이 당시 전반적인 분위기이기도 했다. 그런 속에서 5월 14일에는 신민당이 소속 의원 66명 전원의 이름으로 비상 계엄 해제 촉구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하게 된다.

그런데 계엄이 해제되면 정국 주도권이 국회 쪽으로, 다시 말해 3김 쪽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있었다. 더욱이 국회는 계엄 해제 결의와 함께 개헌 쪽으로 나아갈 것이 분명했다. 국회가 열리면 계엄 해제와 함께 직선제 헌법이 빠른 속도로 통과될 가능성이 있었다, 이 말이다.

국회가 열려서 그렇게 될 경우 전두환·신군부로서는 그토록 노렸던 권력 탈취, 이게 지연되거나 불가능하게 되는 상황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두환·신군부로서는 여기에 맞춰서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5월 12일쯤 되면 계엄 해제가 초미의 중대사로 등장하게 된다. 그래서 학생들도 이제 더 강력하게 계엄 해제를 요구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또한 전두환·신군부 세력의 집권을 저지하기 위한 활동의 필요성을 이전보다 더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여야가 국회 소집에 합의한 다음 날인 5월 13일 동아일보는 사설에 이렇게 썼다. "안보 정세에 중대한 변화가 없는 한 비상 계엄이 하루빨리 해제되어야 할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여야는 기탄없는 의견 교환을 통하여 이를 해제하도록 노력해주기 바란다." 여야 정치 세력, 학생들뿐만 아니라 각계각층으로부터 나온 '이제는 계엄을 해제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요구가 이러한 사설로 수렴된 것이겠지만, 직접적으로는 그 전날 여야가 합의한 것에 언론이 보조를 맞춰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계엄 해제, 전두환·신군부 집권 저지 문제 같은 것과 함께 일부 학생 운동권에 그리고 정국에 영향을 준 또 다른 문제가 나타나게 된다.

▲ 일본은 10·26 후 6번이나 북한의 남침설을 흘렸다. 사진은 한 장병이 휴전선에서 가장 넓고 높은 고지인 육군 백두산부대 최전방 초소에서 북녘을 응시하는 모습(2009년 6월 23일). ⓒ연합뉴스


10·26 후 6번이나 남침설 흘린 일본…육본도, 미국도 "근거 없다" 판단

프레시안 : 그게 무엇인가.

서중석 : 뭐냐 하면 북한이 5월 15일에서 20일 사이에 남침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는 얘기였다. 이 얘기가 당시 떠돌았다. 그런데 그러한 남침 첩보를 누가 준 것인가, 다시 말해 그런 소문을 어느 쪽에서 퍼뜨리고 이용한 것인가, 이게 아주 중요하다.

지난번에 10·26 이후 전두환 쪽과 일본이 어떤 식으로 교감하고 있었는지를 얘기할 때 박선원 교수 논문 내용을 소개하지 않았나. 박선원 교수가 쓴 글에 의하면, 1979년 12월 이후 일본 측에서 북한의 남침 가능성에 대해 6번이나 자료를 준 것으로 돼 있다. 1979년 12월에는 일본 외무성 동북아과장 쪽에서 첩보가 들어왔고, 1980년에 들어서는 일본 공안조사처 같은 데에서 4차례에 걸쳐 첩보가 들어왔다.

5·17쿠데타와 가장 관련 있는 중요한 첩보는 1980년 5월 10일 일본 내각조사실 쪽에서 들어왔다. 이건 뭐였느냐 하면, 앞에서 말한 것처럼 5월 15일에서 20일 사이에 북한이 남침하기로 결정했다는 얘기였다. 북경(베이징)에 있는 관계자한테서 나온 정보라고 하면서 일본 내각조사실에서 한국 쪽, 그러니까 신군부 쪽에 첩보를 건넨 것이다. 일본 측이 이렇게까지 하면서 신군부 집권을 참 집요하게 도와줬다고 볼 수 있는데, 하여튼 이 남침설이 아주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프레시안 : 근거가 충분한 정보였나.

서중석 : 국방부 과거사위 보고서에는 5월 10일 일본 쪽에서 들어온 남침설을 당시 육본 정보참모부에서 분석한 내용이 그대로 실려 있다. 분석 결과는 어떠했느냐. "현재로서 특이 징후 없으며 남침 일자 근거 없음", "북한 군사 동향은 정상적인 활동 수준으로서 특이 전쟁 징후는 없음", "입수 첩보(5월 남침설 및 전방 병력 배치 완료설)는 신빙도가 희박하며, 이는 우리의 국내 정세 추이에 따른 북괴 남침 방책의 일반적 가능성을 추측한 것으로 평가됨", 이렇게 돼 있다. 즉 육본 정보참모부에서 그 첩보는 북한의 일반적 남침 가능성을 제기한 것에 불과하며 따라서 가치가 없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이러한 판단은 육본 수뇌부에 여러 차례 보고됐다. 그래서 전두환·신군부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인 황영시 육군 참모차장 겸 계엄사 부사령관이 5월 12일 "북괴가 남침 준비를 위해 병력 전개를 완료하였다는 일본의 첩보는 벌써 6회나 거짓말을 하고도 체면이 선다는 것인가?", 이렇게 얘기한 걸로 계엄사 자료에 나온다. 일본 측에서 북한의 남침 가능성에 대해 6번이나 자료를 준 것으로 박선원 교수 글에 나온다고 앞에서 말했는데, 황영시도 "벌써 6회나 거짓말"을 했다고 하면서 믿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1995년 말 전두환, 노태우가 구속되고 그러면서 12·12쿠데타, 광주항쟁과 관련해 전두환·신군부 쪽 인사들이 1995~1996년에 검찰 수사를 받지 않나. 그때 검사가 권정달한테 "(1980년) 육본에서 첩보를 분석한 결과 북괴 남침설은 근거가 없다고 결론 내린 사실은 알고 있나요?", 이렇게 묻는 대목도 나온다. (권정달은 12·12쿠데타 당시 보안사 정보처장이었으며 나중에 민정당 사무총장도 맡게 된다. 전두환·신군부의 권력 탈취 과정에서도, 전두환 정권 출범 후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다. 그런데 검찰 수사 당시 전두환·신군부 쪽 인사들이 중요한 대목에서 대부분 '모른다', '잘 기억나지 않는다'며 오리발을 내민 것과 달리 권정달은 수사에 적극 협조했다. 검찰이 재판 과정에서 전두환·신군부 쪽 인사들을 추궁할 때 "권정달 전 보안사 정보처장에 따르면"을 애용할 정도였다. 그러자 "권정달에게 물어보라"며 전두환이 짜증을 내는 일도 있었다. 이처럼 전두환·신군부의 다른 인사들과는 행보를 달리한 이유와 관련해 당시 언론은 권정달이 하나회 회원이 아니었다는 점을 주목했다. 권정달은 12·12쿠데타 후 여러 가지 일을 하는 동안에도 하나회 회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감시와 통제를 받았다고 검찰에서 주장했다. '편집자')

어쨌건 일본 쪽에서 건너온 남침설에 대해 미국도 신뢰하지 않았다. 글라이스틴 회고록을 보면, 미국 측에서도 남측에 대한 공격이 임박했다고 믿을 만한 움직임은 없다고 파악한 것으로 나와 있다. 공격이 임박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는 얘기도 회고록에 나온다. 위컴 주한 미군 사령관도 5월 13일 전두환을 만났을 때 북한의 침공이 임박했다는 징조는 없다고 얘기했다. 그러고 나서 위컴은 전두환이 북한의 위협을 강조하는 건 청와대의 주인이 되기 위한 구실인 것 같다고 보고한 것으로 돼 있다. (5월 10일 일본 내각조사실 쪽에서 들어온 남침설을 분석한 육본 정보참모부 문건에도 당시 미국이 이 문제를 어떻게 봤는가 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문건에는 "미 측 견해(5·11 현재) : 일본 측 제보 신빙성 무(無), 김일성 '루마니아' 계속 체류 중, 북괴 동향 특이 징후 무", 이렇게 기록돼 있다. '편집자')

근거 없는 남침설 퍼뜨린 전두환·신군부, 군경은 비상 경계 체제 돌입

ⓒ오월의봄
프레시안 : 전두환 쪽은 남침설을 어떻게 써먹었나.

서중석 : 신군부 핵심은 북한의 남침설과 학생 시위 같은 것을 구실로 '지금 국가가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면서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게 된다. 그게 5·17쿠데타인데, 그 부분은 다음에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5월 12일 상황을 먼저 보자.

5월 12일 임시 국무회의가 긴급 소집됐다. 여야가 국회를 열기로 합의한 바로 그날인데, 이 회의에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 서리가 중앙정보부 담당 국장을 대동하고 참석했다. 여기서 중앙정보부 담당 국장이 북한의 남침설 분석 결과를 보고했다. 그런데 이도성 기자 글에 따르면 "북괴의 침투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보고했다.

일본 내각조사실 쪽에서 들어온 그 남침설은 근거가 없다고 육본 정보참모부에서 이미 분석해 보고했는데도, 전두환 쪽에서는 임시 국무회의에서 남침설을 유포한 것이다. 그런 논리를 강하게 펴면서 국무위원, 장관들을 몰아세운다고 할까, 긴장하게 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게 되면서 "최근 국내 소요 사태 발생에 편승해 북괴의 대남 도발 침투가 예상된다"며 군과 경찰에 비상 경계 체제 돌입령이 시달됐다.

그런데 일본 내각조사실에서 그 첩보가 들어온 날인 10일 최규하 대통령은 7박 8일 일정으로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 순방을 위해 출국하지 않았나. 만약 북한의 남침과 같은 비상한 일이 일어날 징후가 나타났다면 어떻게 대통령이 그때 떠날 수 있었겠느냐는 얘기가 그 당시 일각에서 지적되고 그랬다. 이와 관련해 1995~1996년 검찰 수사 과정에서 검사가 이렇게 묻는 부분도 있다. "북괴가 남침할 우려가 있다는 첩보도 있는데 대통령의 해외 순방을 강행해도 되는 건가요?" 하여튼 알 수 없는 일인데, 전두환 쪽에서는 5월 12일 임시 국무회의에서 그렇게 나왔다.

프레시안 : 이 시기에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했다는 점도 눈에 들어온다.

서중석 :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은 1980년 4월 14일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하게 된다. 이건 여러모로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보안사와 중앙정보부라는 양대 정보 기관을 움켜쥐게 된 것 아닌가. (중앙정보부법에 따르면 현역 군인은 중앙정보부장이 될 수 없었다. 전두환이 서리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꼼수를 써서 중앙정보부를 움켜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것을 통해 전두환은 정치 공작에 이골이 난 거대 조직은 물론 약 800억 원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중앙정보부 예산도 손에 넣게 된다. 이 예산 중 일부는 전두환의 집권 공작에 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편집자')

박정희 정권의 경험을 토대로 볼 때 한국 같은 나라에서 양대 정보 기관을 장악한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당시 정치권이나 민주화 운동 세력 쪽에서는 많이 생각했어야 한다. 물론 이 문제를 전혀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렇지만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도 그것에 대해 불만을 표시한 것 아니냐'고 하면서 그냥 넘어가는 분위기가 없지 않아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당시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 서리가 된 것에 대해 카터가 불만을 표했다. 미국은 전두환 쪽을 상당히 견제하려 하고 있다'는 소문이 꽤 돌고 그랬다.

그런데 그런 소문은 설령 사실이었다고 하더라도 별로 중시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그때 카터는 이란 주재 미국 대사관 인질 문제에 꽉 묶여서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더욱이 미국 대선이 있는 해 아니었나. 그 대선에서 로널드 레이건한테 패배하면서 카터는 물러나게 되는데, 어쨌건 그런저런 문제들도 있고 해서 한국 문제를 돌아볼 경황이 없었다. 그렇지만 한국의 민주화 운동 세력 중에는 카터에게 신뢰를 보내는 이들도 있었고, 그러면서 '중앙정보부장 서리가 된 전두환을 카터가 견제할 것이다'라는 얘기도 나오고 그랬다. (전두환의 중앙정보부장 서리 겸직에 대한 양김의 반응은 엇갈렸다. 4월 15일 김영삼은 전두환의 중앙정보부장 서리 겸임이 민주화 일정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보느냐는 질문에 "상관없다"고 잘라 말하고 "민주화 일정은 예정대로 진행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와 달리 김대중은 4월 16일, 전두환 중앙정보부장 서리 임명 등과 관련해 "국민 간에 상당한 우려가 대두되고 있다"고 말했다. '편집자')

어쨌든 중앙정보부장 서리가 됐다는 건 이제 전두환이 국무회의에 참석해서 발언할 수 있게 됐다는 걸 얘기한다. 다시 5월 상황으로 돌아오면, 남침설과 더불어 정국에 영향을 끼친 또 하나의 사건이 이 시기에 일어난다.


▲ 의문의 휴전선 총격전 소식을 전한 동아일보 1980년 5월 13일 자 1면. ⓒ동아일보 화면 갈무리

정체불명의 휴전선 총격전 발표…"진상은 누구도 밝히려 하지 않았다"

프레시안 : 어떤 사건이었나.

서중석 : 휴전선에서 의문의 총격전이 일어났다는 발표였다. 이도성 기자 글에는 미국 국방부에서 이 내용을 발표했는데 이게 정국의 위기감을 고조시켰다고 돼 있다. 발표 내용은 이렇다. "주한 미군 순찰대가 5월 12일 밤 10시 반 남북한을 갈라놓은 비무장지대 공동 관리 구역 남방에서 '정체불명의 사람들'과 소규모 총격전을 벌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과 자동 소(小)화기를 동원한 소규모 총격전을 잠시 벌였으나 사망자는 없었다."

이것에 대해 이도성은 이렇게 썼다. "이 사건의 진상은 그 후 밝혀지지도 않았고 누구도 밝히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그야말로 정체불명의 사나이들이 벌인 정체불명의 사건이었다."

이 휴전선 총격전 발표는 정말 이상했다. 그 후 이것과 관련된 다른 어떤 얘기도 없었다. 그리고 일본에서 신군부 쪽에 준 남침설을 위컴 사령관이 부정적으로 본 것과도 뭔가 안 맞는 것 같은데 어째서 뜬금없이 이런 발표를 했을까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학생들이 시위를 자제하도록 하기 위해 나온 것이라고 볼 수도 있고 신군부 쪽의 움직임에 지원 사격을 하는 점도 있을 것 같은데, 나는 그때 후자 쪽에 더 방점을 찍었다.

프레시안 : 남침설과 휴전선 총격전 발표는 정치권과 학생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나.

서중석 : 남침설은 3김한테도 바로 영향을 줬다. 남침설에 관한 정부 쪽 설명을 들은 김영삼은 5월 12일 "사실인 것 같다"는 반응을 보였다. 신현확 총리로부터 이 소식을 들은 김종필은 공화당 당직자들한테 그 내용을 즉각 알렸다. 김대중은 5월 13일 기자 회견을 열고 "북한 공산주의자들에게 오판의 자료를 주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라면서 "사회 혼란 조성을 피하겠다는 전국 대학 총학생회장들의 결의를 충심으로 환영하고 지지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남침설과 휴전선 총격전 발표가 학생들한테는 다른 방식으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5월 12일쯤 남침설이 좀 퍼지기 시작했는데, 그러면서 처음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런 상황에서 휴전선 총격전 발표까지 바로 있지 않았나.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 남침설이 퍼지기 시작한 상황에서 이런 것까지 겹치니까 '이거 정말 심각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 아냐?', 이렇게 5월 12일, 13일에 일부 학생들이 생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당시 언론 보도를 살펴보면 동아일보(1980년 5월 13일 자)는 철야 예정으로 교내 시위를 벌이던 서울의 각 대학 학생들이 12일 밤 9시를 전후해 갑자기 농성을 풀고 자진 해산, 귀가(건국대, 한성대 제외)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그러면서 "학생들이 철야 농성을 갑자기 푼 것은 상황 변동에 대한 교수들의 설득과 학생 자신들의 정보에 따라 취해진 것이다"라고 보도했다. 그 정보와 관련해 이 기사는 예컨대 연세대의 경우 "12일 오후 4~5시부터 상황 변동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자 총학생회 간부 회의를 소집하는 등 대책을 논의하다 일단 해산키로 한 것"이라고 전했다. 한편 1980년 5월 13일 자 동아일보 1면에는 의문의 휴전선 총격전에 관한 기사가 미국 국방부의 발표 직후 게재됐다. '편집자')

그런데 아무 일도 안 일어나지 않았나. 그렇게 되니까, 긴장해서 지켜보던 학생들이 14일쯤 돼서는 '우리 학생들의 계엄 해제 요구 시위를 막기 위한 기만책으로 그런 게 나온 것 아니냐', 이런 생각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 것도 작용하면서 학생들이 '그런 정보에 기만당했는데 이제는 우리가 계엄 해제 등을 분명히 요구해야 한다. 거리에 나가야 할 때다', 이런 판단을 하고 그러면서 거리에 나오게 된 것 아닌가, 난 그렇게 본다.

그게 모든 학생한테 영향을 끼친 건 아니고 일부 학생한테 그랬다고 봐야 할 텐데, 하여튼 학생들은 '속았다. 남침설 같은 건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이렇게 여겼고 '모측에서 뭔가 일을 꾸미고 있는 것 아니냐'는 생각도 일각에서는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계엄 해제, 전두환·신군부 퇴진을 더 강력하게 주장하기 위해 14일, 15일에 서울이건 지방이건 그렇게 많은 학생들이 거리에 나오게 되는 것 아니냐고 설명할 수 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 · 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백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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