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치 사건은 김대중 자작극? 뻔뻔한 박정희 정권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47> 유신 체제, 세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두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체제다.

프레시안 : 김대중 납치 사건 당시 어느 선에서 지시를 내렸는가 하는 문제를 지난번에 살폈다. 그 문제와 더불어 김대중을 죽이려고 했느냐, 아니면 단순 납치 목적이었느냐 하는 문제도 많은 관심을 모으지 않았나.

서중석 : 이 사건에서 사람들한테 더 많은 관심을 갖게 한 것은 김대중을 죽이려고 했느냐 하는 것이다. 김충식 기자가 이 사건과 관련해 취재한 걸 보면 중앙정보부 X 국장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내가 확인한 바로는 단순한 납치 계획은 아니고 살의가 있었다. 상식적으로 보더라도 망명객이 떠들고 다니는 게 문제가 돼서 없애버린다는 작전이야 있을 수 있겠지만, 요원을 시켜 서울 한복판으로 끌어다 놓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러한 살해 계획이 변경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X 국장은 "나타나리라고 전혀 예상치 못한 김경인 의원의 현장 목격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 외에도 서울과 도쿄, 그리고 공작선 간에 오가는 통신이 미국에 감청당하고 사건 정황이 중앙정보부의 짓이라는 쪽으로 흐르고 있어 계획을 변경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단, 이 X 국장은 박정희 대통령이 지시한 건 아닐 것이라고 주장했다. 청와대 회의에서 박 대통령이 김대중의 해외 활동에 대해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죽일 놈'이라는 식으로 극언을 한 적은 있지만, 이 사건에 대해 지시한 일은 없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주한 미국 대사 필립 하비브를 비롯한 미국 측 관련자들의 글을 보면 김대중을 죽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대목들이 나온다. 그걸 보더라도 역시 김대중을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니냐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살해하려 했느냐 아니면 단순 납치하려 했느냐 하는 부분은 어떻게 살해하려 했느냐를 이야기하면 더 확실해지는 것 아니냐고 볼 수 있다.

김대중을 살리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건 정말 미국일까?

프레시안 : 살해 방법 문제에 대해 피해 당사자인 김대중은 어떻게 이야기했나.

서중석 : 김대중은 납치범들이 자신을 어떻게 죽이려고 하다가 못 죽이고 말았는가를 생전에 여러 차례 언급했는데, 여기서는 마지막에 나온 <김대중 자서전>을 인용해보자. 납치범들은 용금호에서 김대중을 관 바닥에 까는 칠성판 같은 판자에 눕혀 온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입에 나뭇조각을 물게 한 다음에 붕대를 둘러서 시체에 염하듯이 했다고 한다. 자신을 바다에 던질 게 분명해 보였는데 "갑자기 배 엔진 소리가 폭음처럼 요란하더니 미칠 듯이 요동치며 내달렸다. 선실에 있던 사내들이 '비행기다'라고 외치며 갑판으로 뛰어나갔다. 폭음 같은 것이 들리고 배는 전속력으로 달렸다", 김대중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김대중은 미국이 자신을 살렸다는 주장을 했다. "내가 극적으로 생환한 것은 미국의 개입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한 미국 대사관은 내가 납치당한 8월 8일 오후 3시에 정보를 입수했다. 미국 CIA가 맨 먼저 주한 미국 대사 하비브한테 알렸고, 하비브는 바로 정보팀을 소집했다. 거기에는 CIA 한국 책임자 도널드 그레그가 포함돼 있었다." 그러면서 하비브가 긴급하게, 앞에서 말한 것처럼 김대중을 살려야 한다고 하면서 그것과 관련된 지시를 내리고 활동에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김대중은 자서전에서 "하비브 대사가 나를 죽음의 문턱에서 끌어내주었다"고 하면서 그 비행기는 미국 국적기가 아니라 일본 국적기로 추정된다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미국이 정말 김대중을 살렸느냐. 그것에 대해 국정원 과거사 위원회에서도 의문을 품었지만 나도 그 부분에 좀 미흡한 점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프레시안 :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서중석 : 미국이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고 있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부분에 관해 제일 잘 알 만한 사람은 하비브하고 그레그라고 볼 수 있는데, 그레그가 써놓은 글이 좀 애매하다. 2015년에 나온 그레그 회고록 <역사의 파편들>을 보면, 1973년 8월 초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해 들은 하비브는 격분했다고 한다. 김대중이 어떻게 됐는지 생사 여부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하비브는 이야기하고 "그들은 그를 죽이려 하고 있지만, 내가 뭐라고 하는지 들어볼 때까지는 일단 기다리겠지"라고 하면서 여러 조치를 취했다는 것이다. 그레그는 "다음 날 아침 나는 KCIA(중앙정보부)가 김대중을 납치한 게 맞다고 하비브에게 말할 수 있었다"고 밝히고, "쓰시마 해협 어딘가에 떠 있는 소형 선박 위"에 김대중이 실려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고 썼다.

그런데 비행기 부분에 대해 그레그는 그건 CIA 비행기가 아니라 한국 비행기, 그러니까 김대중을 죽이지 말고 풀어주라는 한국 정부의 명령을 전달하는 비행기였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김대중에게 자신이 말했다고 회고록에 썼다. 김대중이 대통령이 된 후 김대중으로부터 비행기 등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들어서 알게 됐는데, 그 비행기는 CIA가 보낸 것이고 자신의 석방을 명령한 것도 CIA였다고 확신하는 김대중에게 그렇게 이야기해줬다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이 확인이 안 되는 부분이다. 지금까지 이 비행기의 구체적인 실물, 관련 사실을 누구도 확인하지 못했다. (미국 비행기라고 믿고 있었던 김대중이 훗날 자서전에서는 일본 국적기로 추정된다고 이야기한 것은 그레그가 자신의 회고록에서 밝힌 상황과 관련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이 비행기 문제를 조사한 국정원 과거사 위원회에서도 CIA나 일본 쪽 등에서 김대중을 구명하기 위해 비행기를 띄웠다는 근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편집자') 그리고 이런 사건에서는 구체적인 시간, 날짜가 아주 중요한데 그레그 회고록에는 날짜, 시간이 명확하게 쓰여 있지 않다. 그런 점 역시 '불확실한 것들을 이야기하려고 하니까 그런 것 아니냐', 이런 생각이 들게 한다. 미국이 뭔가 역할을 했다는 건 분명하다. 그렇지만 김대중을 살리는 데 미국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냐 하는 문제에는 모호한 점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프레시안 : 미국 역할론은 사건 직후 일본 쪽에서도 나오지 않았나.

서중석 : '미국이 살렸다'고 이야기한 사람이 일본에도 있었다. 다나카 가쿠에이 정권 때, 다시 말해 김대중 납치 사건이 일어났을 때 법무 대신을 했던 다나카 이사지는 1978년 <마이니치신문>에 중앙정보부가 저지른 일임을 사건 당일 저녁 무렵 미국 정보망을 통해 알게 됐고, 김대중이 살아난 건 CIA가 한국 중앙정보부에 죽여서는 안 된다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고 얘기했다. (다나카 이사지는 사건 발생 보름 후인 1973년 8월 23일 참의원 법무위에서 자신의 육감으로는 김대중 납치는 어떤 나라의 비밀경찰이 한 짓이라고 말했다. 사실상 중앙정보부를 지목한 발언으로, 그렇게 발언할 수 있었던 것은 사건 당일 미국 쪽에서 나온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었다. '편집자') 언제 그런 지령을 내렸느냐 하는 것에 대해 이 사람은 "그건 작은 배에서 큰 배로 옮기기 전에 지령을 내렸던 것이 아닐까?"라고 묻는 형식으로 이야기했다. 용금호로 옮기기 전이라는 것인데, 국정원 과거사 위원회에서도 용금호에서는 죽일 수 없었던 것으로 봤다. 국정원 과거사 위원회가 생기기 훨씬 전에 나온 발언이긴 하지만 그 점에서 다나카 이야기는 논의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죽이지 않으려고 했다, 그 부분에 관해서는 미덥지 않은 것이 있다. 호텔에서 김대중을 납치할 때 김경인이 갑자기 나타난 것에 놀라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납치범들이 유류품을 너무 많이 남겼다. 권총 실탄 7발이 든 탄창 1개에다가 대형 배낭 2개, 거기다가 13미터짜리 로프 등 많은 물품을 남겼다. 해외공작단장 윤진원은 당시 권총을 소지하고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이건 살해와 관련 있는 도구라고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점들은 '김경인 때문에 김대중이 살아난 것 아니냐. 예상 못한 출현에 놀라서 유류품을 많이 남겼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유류품 내용으로 볼 때 살해할 의사도 있었다고 생각해볼 수는 있지 않느냐', 이런 생각을 갖게 한다.

▲ 1989년 10월 13일 신임 주한 미국 대사 도널드 그레그를 반갑게 맞이하는 김대중 평민당 총재. 김대중 납치 사건 당시 CIA 한국 책임자였던 그레그는 1989년 주한 미국 대사로 부임했다. ⓒ연합뉴스


공작 목표, 살해였나 단순 납치였나

프레시안 : 국정원 과거사위는 2007년 10월 이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 결과를 발표했다. 그때 박정희의 책임 부분은 비교적 명확히 했지만("박정희 전 대통령의 직접 지시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최소한 묵시적 승인은 있었다고 판단된다", "박 전 대통령의 직접 지시와 무관하게 대통령 직속 기관인 중앙정보부가 납치를 실행하고 사후 은폐까지 기도한 사실에 비춰 박 전 대통령은 통치권자로서 법적·정치적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공작 목표가 살해였는지 단순 납치였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규정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서중석 : 국정원 과거사 위원회에서는 뭐라고 얘기했느냐. 그 내용을 살펴보면, "김OO가 작성한 KT 공작 계획안에는 살해 안이 포함돼 있었다"고 윤진원이 이야기했다. 일본 야쿠자를 이용해 살해하려 했는데 그건 문제가 있을 것 같아 실행하지 않았다고 윤진원은 이야기했다. 그래서 국정원 과거사 위원회는 "살해 공작이 하달돼 일정 단계까지 추진되다가 목격자 출현 등 상황 변화로 인해 실행이 중지됐거나 현지 공작관의 판단에 따라 어느 시점에서 단순 납치로 변경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이렇게 신중하게 판단했다. "목격자 출현 등 상황 변화로 인해 실행이 중지됐거나", 이건 김경인 의원의 예상치 못했던 현장 목격에 대해 내가 앞에서 이야기한 것과 비슷한 내용이다. 하여튼 국정원 과거사 위원회는 "종합해볼 때 공작 계획 단계에서는 야쿠자를 이용한 살해 안이 논의된 것은 사실이지만 적어도 용금호가 오사카항에 도착한 이후 또는 호텔에서 납치가 실행된 때에는 단순 납치 방안이 확정됐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함",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공작 계획안 내용에 대해 주한 일본 대사관 1등 서기관이던 김동운은 윤진원과는 다른 증언을 했다. 김동운은 야쿠자 이용 계획을 세운 건 맞지만 살해 안을 검토한 적은 없다고 주장했다. 문제의 공작 계획안은 남아 있지 않다. '편집자')

이 부분에 관해서는 국정원 과거사 위원회에서 활동했던 한홍구 교수의 주장도 들어볼 만하다. 한 교수는 윤진원과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이 문제를 분석했다. 그 내용을 보자.

윤진원은 도쿄에서 김대중을 납치해 오사카로 오면서 다른 요원들한테 김대중을 넘기기로 돼 있었는데,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오사카의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운영하는 안가로 김대중을 데려갈 수밖에 없었는데, 한 교수는 이때 윤진원이 굉장한 갈등을 겪었을 것이라고 봤다. 자신의 손으로 처리할 수 있었지만, 그러니까 토막 살인을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있었지만 김대중을 자기 손으로 살해한다는 건 너무나 큰 부담을 지는 일이 아니냐고 생각해서 윤진원은 자신이 일본을 빠져나올 때 쓰려고 대기시켜 놨던 용금호에 김대중을 실어 보내고 자신은 일본에서 잠적한 것이라고 한 교수는 썼다. '김대중 납치가 공작의 궁극적인 목표였다면 윤진원은 의기양양하게 김대중을 잡아다가 자신이 직접 이후락이나 박정희한테 바쳤을 것 아니냐. 그런데 잠적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겠느냐', 이렇게 보는 것이다.

그런데 윤진원이 자기 손으로 김대중을 처리하지 않은 그 부분은 결국 이후락이나 박정희한테도 같은 것 아니겠느냐고 한홍구 교수는 지적했다. 그러면서 김대중이 살아날 수 있었던 건 윤진원뿐만 아니라 이후락도, 박정희도 자기 손에 피를 묻히기는 싫어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김대중이라는 사람을 죽인다는 건 굉장한 부담을 질 수밖에 없는 문제였기 때문에 이런 분석을 한 것 아니냐고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공작에 관여한 것으로 드러난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봐도 오로지 단순 납치라는 제한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벌인 공작이라는 설명은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서중석 : 김대중 납치 사건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이렇게 크게 동원될 수 있느냐 싶을 정도로 중앙정보부 고위 책임자들이 대대적으로 동원됐다. 공작 추진 지시는 이후락 부장이 직접 내렸고, 이철희 해외 담당 차장보와 하태준 해외공작국장이 공작 상황을 총괄했다. 그리고 현지 공작 책임자는 김재권 주일 공사하고 윤진원 해외공작단장이었으며 주일 대사관 참사관인 윤영로, 1등 서기관인 홍성채와 김동운, 2등 서기관인 유영복과 유춘국 등이 공작에 동원됐다. 또 1등 서기관 한춘은 현지에서 정찰 임무를 수행했다. 모두 직급이 높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워낙 서둘러서 하다 보니까 그렇게 유류품을 대량으로 남기고, 용금호까지 실어가는 과정에서도 계획대로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태가 연달아 일어난 것이다.

이 납치 사건의 또 하나의 큰 특징은 한국 정부뿐만 아니라 일본 정부도 참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태도를 계속 보여줬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미국 정부와 다른 태도를 취했다. 미국은 이 사건이 난 직후부터 이건 한국 중앙정보부가 한 짓이라고 하면서 김대중을 죽이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주한 미국 대사 하비브 등이 취한 조치를 설령 일본 정부에서 몰랐다고 하더라도, 미국 본국에서 나오는 반응까지 모를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미국 국무부 한국과장 도널드 레너드는 이 사건이 난 지 11시간 만에 강경한 성명을 냈고 그 후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서 '이건 중앙정보부가 한 일이다', 이렇게 명확하게 얘기했다. 또한 프레이저 위원회(미국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산하 국제기구소위원회)에서도 김대중 납치 사건이 중앙정보부에 의해 이뤄진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그렇지 않았다. 사실 일본 사회에서는 5년 이상이라고 볼 수 있는 긴 기간 동안 김대중 납치 문제에 굉장한 열의를 기울이면서 '이게 어떤 사건이다'라고 이야기하고 파헤쳤다. 특정한 하나의 사건에 대해 그렇게 긴 기간 동안 관심을 기울인 건 일본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그랬는데도 일본 정부는 그것과 다른 태도를 보여줬다.

납치 사건은 김대중 자작극? 뻔뻔한 박정희 정권

ⓒ오월의봄
프레시안 :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해 어떻게 보도했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그 시기에 언론은 어떻게 보도했나.

서중석 : 사실 사건이 일어났을 때 보도는 주로 일본과 미국에서 이뤄졌다. 한국의 경우, 누가 시켜서 어떻게 처리하려고 한 사건이라는 걸 많은 사람이 짐작은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런 일은 어떤 기관에서 하는 것이라는 점을 다들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 최고 지시자는 누구일 것이라는 점 역시 서민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당시 일반 노인들도 그렇게 이야기하더라. 그랬는데도 신문에서는 이 사건을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 다룰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중앙정보부에서 엉뚱하게 흘리는 또는 주는 뉴스를 중심으로 이 사건을 다뤘다. 그 결과 한국에서는 제대로 보도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보도된 것들 가운데에는 중앙정보부에서 철저히 통제해 엉뚱하게 보도하게 한 것들이 많았다.

예컨대 정부 발표대로만 보도하라는 건 백번 양보해서 그럴 수 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중앙정보부에서는 "애국청년구국대가 김대중을 납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김대중의) 조국에 대한 배신 행각을 부각시켜라", 보도 방향을 이렇게 유도했다.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8월 13일 밤 김대중을 동교동 자택에 데려다준 자들이 자신들을 구국동맹행동대라고 밝혔다고 지난번에 이야기했는데, 국정원 과거사 위원회 자료에는 애국청년구국대라는 조금 다른 이름으로 나와 있다. 아무튼 그에 더해 "외신 보도를 인용해서 보도하는 건 억제하라"고 했다. 외신 보도 내용을 되도록 소개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심지어 이 사건이 "김대중 자작극, 극우 세력 또는 베트공파의 소행"으로 인식될 수 있도록 유도했다. 김대중 자작극이라는 주장은 이 무렵 일본에서도 나왔다. 자민당에서 상당한 세력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극우 세력인 청람회, 지금은 없어졌지만 옛날엔 아주 힘이 셌던 곳으로 여기서도 김대중 자작극이라고 주장했는데 이것도 중앙정보부 쪽에서 정보를 줬다고 한다. 그런 식으로 분위기를 만들도록 작업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야당에서 특별 조사 위원회 구성 같은 걸 요구하는 건 단호히 배격하도록 하고, 야당 내 반김대중 세력을 활용해 자작극설 같은 걸 유포하도록 중앙정보부는 조종했다. 또한 이 사건과 관련해 애국청년구국대 수사에 역점을 두는 인상을 부각하도록 언론에 대해 조치를 취했다. 김구 암살 사건이 일어나자, 마치 한독당 내 갈등 때문에 생긴 사건인 것처럼 김학규(한독당 조직부장) 같은 사람을 구속하면서 사람들의 관심이 그쪽으로 쏠리게 한 것과 비슷하다. 그뿐 아니라 "민심을 감안해 사건이 미궁에 빠지도록 유도해야 한다", "적당한 시기를 택해 관련자 인책으로 민심을 순화해야 한다", 이런 방침을 세웠다. 이것이 중앙정보부의 사건 은폐 기도 조치들이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프레시안 : 유력 야당 인사를 납치한 것도 큰 문제이지만, 중앙정보부는 그 수준을 넘어 사후 은폐 및 보도 통제를 통한 진상 조작까지 했다. 대통령 직속 기관의 이런 행태는 최고 권력자의 책임 문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이처럼 정권 안보를 가장 우선시하며 민주주의와 국민 주권을 위협하는 정보 기관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대선 개입 등 심각한 불법 행위를 자행한 국정원을 뿌리부터 개혁하는 대신 오히려 훨씬 막강한 권한을 안겨준 이른바 '테러 방지법'을 둘러싼 논란에서도 많은 이들이 이 점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몇 년 전 에드워드 스노든이 폭로한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무차별 사찰 실태에 전 세계가 깜짝 놀란 것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이는 한국만의 문제도 아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면 오늘날 김대중 납치 사건을 되짚는 작업은 정보 기관을 제대로 통제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고삐 풀린 정보 기관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를 되새기는 차원에서도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돌아오면, 김대중 납치 사건 이후 국회 분위기는 어땠나.

서중석 :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국 신문이 제대로 보도를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경우 국회에서도 얘기를 할 수 없었다. 그런 것을 단적으로 얘기해주는 사례가 있다. 야당 중진이자 장면 정부 때 외무부 장관을 했던 정일형이 그해 9월 26일 면책특권이 있는 국회 본회의에서 김종필 총리한테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해 질의했다. "무엇 때문에 한 정권이 개인을 상대로 하여 이토록 심한 피해망상증에 걸려 있는지 알 수가 없소. 외국에서는 물론이고 많은 국민들이 이번 사건을 중앙정보부의 소행이라고 단정하고 있어." 이렇게 얘기하자 여당에서는 막 책상을 치고 고함을 질러댔다. 그래서 정일형 발언이 14번이나 중단됐다. 준비한 원고를 끝내 다 읽지 못했다. 그러면서 여당 의원들한테 떠밀려 넘어지고 구둣발에 차이고 해서 그때 장출혈이 생겼는데, 그게 암으로 악화돼 결국 1982년 세상을 떠났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그러니까 한국에서는 어디서건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해 일절 얘기하지 못하도록 돼 있었다. 한국인들에게 그야말로 중요한 사건인데도 그런 식으로 됐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마흔여덟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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