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총리, 청와대 검은돈 받고 김대중 사건 덮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48> 유신 체제, 네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두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체제다.

프레시안 :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해 일본 정부가 참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태도를 보였다고 앞에서 지적했다. 박정희 집권기의 뒤틀린 한일 관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창(窓)이라고 할 수 있는 사안인 만큼 그 부분을 구체적으로 짚었으면 한다. 김대중 납치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 정부는 어떤 모습을 보였나.

서중석 : 일본 정부가 이 사건에 어떤 식으로 임했는지를 간단히 살펴보자. 1973년 9월 5일 도쿄 경시청의 수사본부는 범행 현장에서 주일 한국 대사관 1등 서기관 김동운의 지문이 나왔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러면서 김 서기관의 출두를 요구했다. 그러나 한국 대사관 측은 외교관 면책특권을 내세워 이를 거부했다. (김동운의 지문이 나온 후 일본 쪽에서는 300엔 사건, 오카네(돈) 300엔 문제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엄청난 범행을 저지르는 마당에 300엔짜리 장갑 한 켤레 준비하지 않아 지문을 남겼느냐는 조롱 섞인 이야기였다. '편집자')

이렇게 일본 수사본부에서 김동운 1등 서기관의 지문이 나왔다고 발표한 건 이 사건에 중앙정보부가 관련됐다고 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이처럼 일본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주권 침해가 명백한데도 일본 정부에서는 그로부터 이틀 후인 9월 7일 뭐라고 얘기하느냐. 다나카 가쿠에이 수상은 중의원 본회의에서 야당의 질문에 대해 "현재 수사 중인 단계에서 주권 침해라고 단정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한국은 일본의 이웃 나라이기 때문에 우호 관계의 유지, 증진에도 힘을 써야 할 줄로 안다", 이렇게 답변했다. 한마디로 주권 침해가 아니라는 얘기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일본 내각 내부에서도 의견이 엇갈렸는데, 다나카 가쿠에이 수상은 이런 입장을 견지했다. 이와 달리 이 당시 외상이었던 오히라 마사요시는 오히려 "양국의 우호, 친선 관계를 유지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 이 사건은 괴로운 일이지만 진상을 해명하고 공정한 해결을 도모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고 하면서 수사를 잘해야 한다고 얘기했다. 다나카 가쿠에이 수상의 얘기는 이것하고도 달랐다. 오히라 마사요시는 한일 국교 정상화 문제를 놓고 1962년 김종필과 만나 '김-오히라 메모'를 교환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

검은돈 4억 엔 의혹, 그리고 결착으로 진상 덮은 양국 정부

▲ 다나카 가쿠에이. ⓒ위키미디어커먼스
프레시안 : 다나카 가쿠에이는 왜 그런 태도를 취한 것인가.

서중석 : 다나카 가쿠에이는 돈을 아주 좋아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해 다나카 가쿠에이가 취한 태도에 뇌물도 영향을 줬을 것이라는 점이 일본과 한국에서 계속 보도되고 논란이 되고 그랬다. 일본 시사 잡지 <문예춘추(분게이슌주)>에 실린 글을 보면, 다나카 가쿠에이 수상의 측근 기무라 히로야스는 이병희(김종필·김형욱 등과 육사 8기 동기) 무임소 장관이 총리 관저를 방문한 자리에 자신이 함께 있었고 그 자리에서 이병희가 4억 엔 정도 들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종이 가방을 다나카 가쿠에이 수상에게 전달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기무라 히로야스 이 사람은 이병희 장관하고 친했다. 이병희는 일본통으로 알려져 있지 않았나. (기무라 히로야스는 이병희가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를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달라'고 자신에게 요청했다고 밝혔다. 기무라 히로야스에 따르면, 이병희는 다나카 가쿠에이에게 커다란 종이 가방 2개를 전했는데 신문지로 반듯하게 포장된 사각 뭉치가 가방 손잡이 부분까지 가득 채우고 있었다고 한다. 기무라 히로야스는 그전에 자신이 일본 내에서 돈을 건넨 경험과 비교하며, 그 종이 가방에 담긴 금액은 아무리 줄여서 잡더라도 4억 엔 이하로는 내려가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와 더불어 이병희는 박정희 친서도 다나카 가쿠에이에게 건넸다고 한다. 일본 고유의 화지(和紙)에 쓴 편지였다고 기무라 히로야스는 증언했다. 대통령 친서까지 들고 온 밀사였다는 뜻이다. '편집자')

재미 교포 기자 문명자도 김대중 납치 사건 이후 검은돈 거래가 있었다는 주장을 월간 <말>뿐만 아니라 자신의 책에서도 여러 차례 했다. 1973년 8월 15일 KAL 조중훈이 청와대를 방문해 박 대통령을 만난 후 다나카 가쿠에이 쪽에 3억 엔을 전달했다는 것이다. 조중훈은 그전부터 다나카 가쿠에이 수상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것 말고도 몇 가지 설이 있는데, 다나카 가쿠에이가 이 사건과 관련해 거액의 돈을 받았지 않느냐고 일본에서건 한국에서건 이야기되고 있다.

프레시안 : 한일 양국 정부는 이 사건을 어떻게 매듭지었나.

서중석 : 일본 정부는 계속 은폐에 급급하며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다가 두 차례에 걸쳐서 이른바 결착, 이건 일본식 표현으로서 합의를 보고 일정하게 매듭을 지었다는 뜻일 터인데, 그러한 결착을 한 것으로 이야기된다.

1차 결착은 1973년 11월 1일 김용식 외무부 장관이 일본과 합의한 내용을 발표하는 형식을 통해 이뤄졌다. 11·1 조치라고 하는 것이다. 핵심은 '김동운 1등 서기관을 면직 처분한다. 사건 발생 전 김대중이 일본과 미국에서 한 언동에 대해서는 추궁하지 않겠다. 그리고 김종필 총리가 일본을 방문해 박정희 대통령 친서를 전달하고 유감을 표명한다', 이것이었다. 그다음 날인 11월 2일 김종필은 일본을 방문해 다나카 가쿠에이 수상에게 박 대통령 친서를 건네고 사과의 뜻을 전했다. 이때 진사(陳謝) 사절단으로 김종필이 갔다고 보통 이야기하는데, 다나카 가쿠에이는 박 대통령이 김종필을 파견해 유감의 뜻을 친서로 전한 것에 대해 고맙게 생각한다고 하면서 "이로써 김대중 사건은 외교적인 결착을 굳히고, 일한 관계의 공정하고 순조로운 발전이라는 양 국민 공통의 염원이 달성되는 것을 기원합니다"라고 이야기한 것으로 돼 있다.

그런데 록히드 사건, 즉 미국의 항공기 제조사인 록히드로부터 거액의 돈을 받아먹은 사실이 드러나면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이 사건이 터지면서 다나카 내각은 2년 5개월 만에 결국 붕괴하고 만다. 그 뒤를 이어 '클린 미키', '청렴 미키'로 불리던 미키 다케오가 1974년 12월 9일 수상이 된다. 그 후 미야자와 기이치 외상이 1975년 7월 23일 한국을 방문하는데 이때 제2차 결착이 이뤄진다. 미야자와 기이치는 두 개의 각서, 즉 김동운에 관한 각서하고 나중에 이야기하게 될 박 대통령 저격 사건(1974년 8월 15일)에 관한 각서를 받아갔다. 김동운에 관한 각서의 주요 내용은 '혐의 사실을 입증하기에 충분한 확증을 얻지 못해 불기소 처분했다. 그렇지만 공직에서는 해임했다'는 것이다. 김동운 문제에 대해 일본 경찰청 쪽에서는 강한 불만을 표명했지만, 미야자와 기이치 외상은 "이 두 개의 각서로 김대중 사건은 결착을 본 것이다"라고 얘기했다. (김대중 납치 공작에 관여한 이들 중 죄과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은 사람은 없었다. 이후락이 제1차 결착 한 달 후인 1973년 12월 중앙정보부장 자리에서 물러나긴 하지만 처벌을 받지는 않았고, 그 이외의 인사들은 대부분 현직으로 그대로 활동했다. '편집자')

다만 미야자와 기이치는 김대중 신병 문제와 관련해 "현재 선거법 위반 공판이 계속되고 있어서, 이것만 깨끗하게 되면 김대중한테 자유를 부여할 것이라고 한국 측에서 확인해줬다", 이 얘기만 했다. 이 얘기가 나온 건, 1974년 6월 서울지법에서 이미 3년 또는 7년이 지난, 그러니까 1967년 6·8 부정 선거 때와 관련된 건 하나, 그리고 1971년 대통령 선거 관련 건 하나를 선거법 위반 사건이라는 명목으로 문제 삼아 김대중을 재판에 회부했기 때문이다. 유신 정권 차원에서 그렇게 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데 정말 어이없는, 말도 안 되는 사건이었다. 김대중 납치 사건을 저지른 사람들로서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느냐 싶지만, 어쨌건 그렇게 했다.

한일 결착과 만주 인맥

프레시안 : 박정희 정권 당시 한일 관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기시 노부스케를 중심으로 한 만주 인맥 문제다.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해 일본 정부가 이상한 태도를 취한 것, 그리고 두 차례에 걸친 결착이라는 형태로 양국 정부가 진상을 덮어버린 것에 만주 인맥의 힘이 작용하지는 않았나?

서중석 : 이 시기에 기시 노부스케가 여기저기서 활동하는 건 나온다. 사건 발생 다음 달인 1973년 9월에 회의 참석 차 서울에 와서 청와대를 방문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 시기에 이 사건과 관련해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는지, 그 내용이 명확히 드러난 자료는 아직 보지 못했다. 김대중 납치 사건이 일어난 후 기시 노부스케가 유신 정권에 이롭게 일이 진행되도록 활약한 것으로 보이는데, 구체적인 사항은 현재로서는 알기가 어렵다. 그런데 제2차 결착에서는 기시 노부스케의 오른팔이라고 할까, 만주국 시절부터 기시 노부스케 밑에서 쭉 일을 해왔던 시이나 에쓰사부로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이야기한다.

원래 미키 내각은 탄생할 수 없다고들 봤다. 워낙 소수 파벌이었기 때문에 '미키 다케오 그 사람은 깨끗하지만 수상까지는 못 올라갈 것이다', 이렇게들 일본 여론은 보고 있었다. 그런데 다나카 가쿠에이가 더러운 사건에 연루돼 물러나게 되니까, 미국에서 워터게이트 사건 직후 청렴 분위기가 강하게 일어난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이젠 정말 깨끗한 사람을 수상으로 세우자'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그래서 미키 다케오를 수상으로 세웠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 양반은 힘이 약했고, 시이나 에쓰사부로가 배후에서 큰 역할을 했다고 이야기한다. 특히 미야자와 기이치의 배후 인물이 시이나 에쓰사부로라고 하면서 어떤 글에서는 이렇게까지 쓴 것을 볼 수 있다. "최고의 권력자가 미키 수상이냐 하는 것에는 의문이 있었다. 미키 수상을 등장시킨 연출자가 시이나 자민당 부총재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특히 미야자와 기이치 뒤에는 시이나 에쓰사부로가 있다고 썼다. 그러니까 이 사건에서도 역시 만주 인맥이 움직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일본에서는 납치 사건 5년이 되는 1978년 8월 8일을 전후해서도 <아사히신문>이라든가 <마이니치신문> 같은 유력지가 김대중 납치 사건을 여러 날에 걸쳐 다뤘다. <마이니치신문>은 그해 7월 18일부터 8월 18일까지 27회에 걸쳐 '이제 증언한다'는 이름으로 김대중 사건 5년을 증언하는 연재를 진행하면서, 이 사건의 진상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여러 사람의 증언을 실었다. <아사히신문>도 한일 관계의 배경 같은 것을 밝히려고 하면서 사건 당시 법무 대신이었던 다나카 이사지의 증언 등을 여러 날에 걸쳐 실었다. 시민 단체도 이해 8월 8일 도쿄에서 김대중 원상 회복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김대중 감시한 전·현직 자위대원 도피 자금 대준 일본 정부 핵심 인사

ⓒ오월의봄
프레시안 : 김대중 납치 사건은 일어난 지 40년이 넘었지만 풀리지 않은 의문점이 여전히 많은 사건이다. 그러한 의문점에는 일본 정부와 관련된 것들도 있다. 사건이 터지기 전 일본 쪽에서는 그 징후를 정말 몰랐을까, 그리고 김대중이 납치된 후 한국 정부와 결착해 사건을 애매모호하게 처리한 것에 그치지 않고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한 것 아니었을까 등이 대표적인 의문점으로 꼽힌다. 이 부분, 어떻게 보나.

서중석 : 그것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로 얘기들이 나오고 있다. 제일 중요한 것으로는 자위대 전·현직 간부들이 김동운 1등 서기관의 부탁을 받고 김대중을 감시, 미행한 것을 들 수 있다. 물론 사건 발생 시점에는 퇴역한 상태였다. 그 내용을 보면, 김동운 1등 서기관의 의뢰를 받고 쓰보야마 고조와 에무라 기쿠오가 감시, 미행을 했다. 쓰보야마 고조는 1973년 6월 말 소령 계급으로 퇴직하고 밀리언 자료 서비스라는 흥신소를 열었다. 에무라 기쿠오는 같은 해 8월 1일 자위대에서 퇴직했는데, 실제로는 그 직전인 7월부터 밀리언 자료 서비스에서 근무했다. 김대중을 감시, 미행하는 활동을 한 시점에는 현직 자위대원 신분이었다.

밀리언 자료 서비스에 대해서는 김형욱 회고록에도 이야기가 나온다. 이 흥신소가 탐정 회사로 돼 있지만, 일본 의회에서도 '이게 광고도 없고 전화번호부 책에도 안 나오는, 뭔가 이상한 데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고 그랬다. 김효순 기자는 이들이 현역으로 직접 일하기가 곤란하니까 퇴직을 하고 밀리언 자료 서비스를 만들어 김대중을 감시, 미행하면서 중앙정보부 쪽에 정보를 제공해준 것 아니냐고 봤다.

더욱 놀라운 것은, 납치 사건이 터진 후 자위대 전·현직 정보 요원들이 김대중 감시, 미행에 관련돼 있다는 의혹이 불거지자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의 핵심 인사가 이들을 도피시킨 사실까지 드러났다는 것이다. <마이니치신문>에서 오랫동안 기자로 일한 후루노 요시마사라는 사람이 이 사건을 계속 추적했는데, 이 사람이 2010년에 출간한 책에 이 내용이 나온다. 그걸 김효순 기자가 바로 받아서 쓰고 그랬는데, 뭐냐 하면 일본 관방 부(副)장관 고토다 마사하루가 쓰보야마 고조, 에무라 기쿠오 이 두 사람을 직접 만나서 '모든 연락을 끊고 잠적하라'고 지시한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잠적만 지시한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의 도피 및 생계 자금으로 세 차례에 걸쳐 모두 1300만 엔까지 제공했다. 이 거액의 출처는 관방 기밀비로 보인다고 후루노 요시마사는 얘기했다. 관방 기밀비는 총리 비서실장 겸 대변인 구실을 하는 관방 장관의 판단으로 영수증 처리 없이 사용되는 자금이라고 한다.

이처럼 다나카 내각에서는 한국 대사관 측의 의뢰를 받아 김대중 감시 활동을 벌인 사람들한테 거액을 줘가면서 도피하도록, 모든 연락을 끊고 잠적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다나카 내각 내에서도 특히 다나카 가쿠에이 수상이 그런 방향으로 일을 처리하도록 한 게 아닌가 싶은데, 이건 단순한 은폐 수준을 넘어선 것 아니냐, 중앙정보부의 범행을 일본 정부가 소극적으로 묵인한 정도가 아니라 진상 규명을 적극적으로 방해한 것 아니냐, 이렇게 볼 수밖에 없다.

사실 일본 정부는 프레이저 위원회의 활동도 방해했다. 그 부분에 관해 프레이저 위원회에서 언급한 게 있다. 프레이저 위원회에서 김대중 납치 사건 조사와 관련해 일본 정부에 협조를 의뢰했는데, 일본 정부는 그걸 오히려 방해하는 면을 보여줬다.

이처럼 일본 정부는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해 자국 여론과 너무나 동떨어지게 행동했다. 그것에 관해서는 다나카 가쿠에이 수상과 관련된, 보이지 않는 의혹도 있고 또 막후에서 만주 인맥이 움직이고 하면서 유신 정권에 유리하게 정치적으로 처리한 것 아니냐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게 돼 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마흔아홉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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