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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희의 '선택'을 어떻게 보십니까?"
[해방일기] 1948년 7월 31일 :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홍 선생이 현명한 선택을 하더라도 나는 미련한 선택을 하렵니다. 공자의 뜻이 당장 이뤄지지는 않았지만, 그분은 도리를 다함으로써 후세에 가르침을 남겼습니다. 분단 건국이 지금 내 노력에 관계없이 진행되더라도, 선비의 마음이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기록은 남겨
김기협 역사학자
2013.07.31 11:36:00
시작부터 독재를 꿈꾼 이승만
[해방일기] 1948년 7월 29일
윤창중 사건은 일단 당사자의 개인 문제다. 하지만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가 너무 크다. 그 자신과 범행 피해자의 피해보다 국가 사회의 피해가 더 크다. 그를 임명한 사람의 권위와 신뢰성에 입힌 상처가 무엇보다 큰 피해다. 박근혜 대통령이 임명한 누구에게든
2013.07.29 07:10:00
권력을 쥔 이승만, 휘두르기 시작하다!
[해방일기] 1948년 7월 26일
헌법 제정 과정에서 이승만이 가장 집착했고, 결국 관철시킨 것이 대통령 중심제였다. 기초위원회 참석 자격이 없는 의장으로서 초안이 완결될 단계에 회의에 '임석', 내각 책임제로 준비되어 있던 내용을 바꾸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다 만들어놓은 초안에서 한 대목
2013.07.26 10:05:00
왜 이시영은 이승만의 들러리를 섰을까?
[해방일기] 1948년 7월 24일
1948년 7월 24일 오전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중앙청 앞마당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이시영 부통령의 취임식이 거행되었다. 이승만의 취임사에는 참 좋은 말씀이 많이 들어 있었다. 사심 없는 노 애국자의 입장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말씀 가운데 이따금 숨은 가시처럼 그의 정치
2013.07.24 08:34:00
남조선을 암흑 상태에 남겨놓고 물러나는 미군
[해방일기] 1948년 7월 22일
5월 14일 북으로부터의 송전 중단 이전에도 이후에도 미군정은 북조선인민위원회와 송전 문제 의논할 것을 일관되게 거부했다. 북조선의 통치권은 주둔 소련군에게 있으므로 그 밖의 어떤 상대와도 교섭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회담의 격을 따지는 것은 회담을 회피하고 싶은
2013.07.22 08:09:00
초기 북-중 관계를 밝혀줄 '류연산 자료'
[해방일기] 1948년 7월 19일
1947년 3월 중국 국부군이 공산당의 오랜 근거지 연안을 탈취하면서부터 잘만 하면 공산군의 완전 박멸에 성공할 수도 있겠다는 상황이 꽤 오래 계속되었다. 그러나 해가 바뀔 무렵에는 국민당 지지자들도 그런 희망을 지키기 힘들게 되었고, 여름에 와서는 국민당과 공산당
2013.07.19 10:32:00
이제는 떳떳해진 제헌절의 의미
[해방일기] 1948년 7월 17일
제헌절은 개천절, 한글날, 3·1절, 광복절과 함께 국경일의 하나다. '국경일'은 대한민국의 법률적 제도다. 1949년 10월 1일 공포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이 그 근거다. 민족과 국가를 굳이 구분해서 따지자면 다섯 개 국경일은 모두 국가보다 민족의 경사를
2013.07.17 16:02:00
"딘 장관이 카메라를 도둑맞았습니다!"
[해방일기] 1945년 7월 15일
7월 15일 딘 군정장관의 기자 회견에서 몇 가지 흥미로운 문답이 있었다. 이 문답을 통해 당시 상황에 대한 미군정의 자세를 한 차례 점검해 본다. 그런데 딘이 이 무렵 어떤 일을 하고 있었는지 훑어보려고 신문 기사를 검색해 보니 좀 우스운 이야기들이 보인다. 7월 15일
2013.07.15 07:16:00
티토-스탈린 갈등에서 드러나는 소련의 본색
[해방일기] 1948년 7월 12일
미군정 하 남조선 언론은 공산권 동향에 어두웠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에서 "티토"를 검색해 보니 1948년 6월 말까지 <경향신문>과 <동아일보> 합쳐 11회 나타난다. 그런데 7월 초순 열흘 동안에 25회 나타난다. 6월 28일 코민포름의 유고슬라비아
2013.07.12 07:09:00
두 개의 '가능 지역 정부'를 향하여
[해방일기] 1948년 7월 10일
민족자주연맹(민련)과 한독당 중심의 남북 협상파는 1948년 4월 초 평양행을 앞두고 노선 조율을 위해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통협)를 결성했다. 이남의 남북 협상 추진 세력으로는 2년 전 좌우합작위원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중간파와 민전 중심의 좌익이 있었는데 1948년 들
2013.07.10 07:4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