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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셜 국무장관, 미소공위 폐기 선언 직전!
[해방일기] 1947년 8월 20일
미소공위의 파탄을 향한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음을 8월 8일자 일기에서 지적했다. '불합의' 사항에 대한 미국 대표의 일방적 발표가 7월 16일에 나오자 소련 대표의 반박이 닷새 후에 나왔다. 그런데 8월 1일 미국 대표의 재차 발표에 대해서는 바로 다음날 소련 대
김기협 역사학자
2012.08.20 10:12:00
러치 군정장관, '이승만의 사람'이었나?
[해방일기] 1947년 8월 17일
서울시 개최로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해방 2주년 기념식에서 축사를 읽은 조선인은 서재필(?), 이승만, 안재홍의 3인이었고, 김구는 폐회 직전 만세 3창을 선창했다. 이승만의 축사에 주목할 만한 내용이 들어 있다. "재작년 이 날 해방이 되어 2년이나 지나도록 해방이라는
2012.08.17 09:32:00
해방 2년, 되살아난 경찰의 위세
[해방일기] 1947년 8월 15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해방 2주년 기념식은 평온하게 진행되었다. 정치 세력 간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안재홍 민정장관이 모든 기념행사를 관에서 진행한다는 행정명령 제5호('해방 기념 축하식 거행에 관한 건')를 8월 4일에 발포해 놓았었다. 너무나 평온하다 보니
2012.08.15 12:12:00
"커밍스가 상식 이하?" 너무 웃긴 전상인!
[해방일기] 1947년 8월 13일
해방 2주년이 다가오고 있다. 많은 변화가 조선에 2년 동안 일어났는데, 분단 건국을 향한 움직임을 그중 중요한 변화로 본다. 2년 전에는 조선인만이 아니라 누구 눈에도 "말도 안 되는" 분단 건국이었는데, 이것이 이제 상당수 관계자들에게 유력한 옵션으로 떠올라 있다.
2012.08.13 07:52:00
<한국 전쟁의 기원>을 생각한다
[해방일기] 1947년 8월 8일
좋은 책을 기획해서 잘 만들어내는 출판인에게 '경의'를 느끼는 일이 왕왕 있는데, 1979년 시점에서 <해방 전후사의 인식>(제1권)을 만들어낸 한길사의 업적에는 돌이켜 생각해도 '경이'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유신 체제가 막바지 기승을 떨던 그 시
2012.08.08 11:12:00
"주인 없는 들개"가 된 "권력의 주구" 경찰
[해방일기] 1947년 8월 6일
미군정 하의 남조선은 경찰 국가로 변해 왔다. 웨드마이어 특사가 1947년 가을 조선을 방문했을 때 경찰의 미국인 고문 한 사람은 "국가 경찰 조직이란 그 정의상 바로 경찰 국가와 동의어"라는 의견을 말했다고 한다. (Bruce Cumings, <The Origin of the Korean War 2&g
2012.08.06 09:37:00
여운형을 누가 죽였는가?
[해방일기] 1947년 8월 3일 :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오늘(3일) 몽양 선생의 장례식이 거행됩니다. 그 동안 이런저런 곡절이 있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그분이 선생님께 제일 가까운 동지로 보이는데, 우선 위로 말씀 드립니다.
2012.08.03 09:46:00
조봉암 법살 사건, 민주당도 공범이다!
[해방일기] 3년차로 접어들며
박정희의 쿠데타에 대한 박근혜의 몇 차례 언급을 놓고 "역사의식의 결함"을 지적하는 이들이 있다. 박근혜는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고 대꾸한다. 두 주장이 다 참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3단 논법에 의해 이 나라에는 역사의식의 결함을 가진 사람이 많다고 할 수 있
2012.08.01 10:24:00
"브라운 소장, 당신마저!"
[해방일기] 1947년 7월 30일
1946년 9월 말 미소공위 수석대표로 부임한 브라운 소장은 미군정의 어느 간부보다도 미소공위의 성공을 위해 성실히 노력하고 좌우 합작에도 열심히 협력한 인물이었다. 안재홍의 회고 중에도 미군 지도부의 협력이 필요할 때 브라운과 우선 의논한 일이 대목마다 보인다.
2012.07.30 07:56:00
민심을 대변하는 중간파, 왜 실패했나?
[해방일기] 1947년 7월 29일
해방 공간 3년 중 가장 큰 갈림길이 되는 시점을 짚으라면 1945년 12월을 짚을 것이다. 연합국의 조선 처리 방침이 모스크바 외상 회담에서 결정된 것이 이 때다. 그에 촉발되어 서울에서 대규모 반탁 운동이 일어났고, 이후 '반탁'은 이남 정계의 향방을 좌우하는
2012.07.29 12:5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