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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들의 소리' 강원용 목사와 술이라니...
남재희 회고 文酒 40年 - 빠뜨렸던 이야기들 <52>
강원용(姜元龍) 박사(주변에서는 목사보다 박사 호칭을 쓴다)와 알고 지내기는 60년대 중반부터이니 40년이 되어간다. 내가 존경하는 인물 가운데 한 분인데, 친구들이 혹시라도 낮게 평가하면 나는 적극 옹호하고 나서곤 한다. 우선 요즘 북핵문제와 그것에 대처하는 부시
남재희 언론인ㆍ전 국회의원
2004.02.19 18:26:00
김철 대 김철의 술자리도
남재희 회고 文酒 40年 - 빠뜨렸던 이야기들 <51>
김대중 정권때 장관을 하는 등 화려하게 등장을 한 김한길(金漢吉) 씨는 사회민주주의자로 활동하며 고독한 일생을 마친 선친 김철(金哲) 씨의 추모행사를 성대하게 마련하였다. 여러 권으로 된 당산(堂山) 김철 전집도 출판하고 세미나 리셉션도 가졌다. 더구나 연기자 최명
2004.02.12 17:54:00
풍류(風流)를 안 선비 정치인 송남헌(宋南憲)
남재희 회고 文酒 40年 - 빠뜨렸던 이야기들 <50>
강서문인협회가 발행하는 <강서문학>에 5회에 걸쳐 <문주(文酒) 40년>이라는 글의 연재를 마치고 나니 포함시키고 싶었던 이야기들이 뒤늦게 떠오른다. 그리고 더 쓸게 많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그래서 속편을 써본다. 필자***1.풍류(風流)를 안 선비 정치
2004.02.06 11:35:00
나의 酒道 10개조 - 잡설을 끝내며 반성하는 뜻으로
남재희 회고 文酒 40年-그래도 잘 마셨다 <49ㆍ끝>
요즘 술을 삼가자는 말이 많이 나온다. 내가 속했던 언론 쪽이 술을 심하게 하기로 소문이 나있는데, 한국기자협회의 회보에도 「건전 음주 10계명」이라는 것이 나와있다. 언론과 쌍벽을 이루는 술로 유명한 문단에서도 바카스의 신을 높고 논란이 일었다. 원로인 고은 시인
남재희 전 언론인ㆍ국회의원
2003.11.03 09:02:00
나이 들어 젊은 사람들과 追憶談 속 만취
남재희 회고 文酒 40年-그래도 잘 마셨다 <48>
40대 말까지의 주량은 엄청났다. 그때 선거에 출마해서는 회식이다, 초상집이다 하고 돌아다니며 하루에 2홉들이 소주 4~5병씩을 매일 마셨다. 백일쯤 그렇게 마시니 아침에 일어나면 얼굴이 좀 부은 듯 하다가 저녁이면 가라앉고 다시 술이 들어간다. 그렇게 마셔댄 선거전
2003.11.01 08:46:00
“텐트 안이면 오줌을 밖으로 누울 것”
남재희 회고 文酒 40年-그래도 잘 마셨다 <47>
김종필(金鍾泌)씨와의 술인연은 참 오래 되었고 정이 많이 담긴 것이었다. 신문사의 정치부 시절부터 시작되어 신문사 간부 때로 이어지면서 자주 있었고, 대개가 의미있는 자리였다. 끈끈한 유대도 생겨났다. JP는 매력있는 사나이였으니까 말이다. 신문사 친구 이명원(李明
2003.10.31 08:58:00
李會昌씨와 폭탄주와 北核 문제
남재희 회고 文酒 40年-그래도 잘 마셨다 <46>
두 번이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많지 않은 표 차이로 떨어진, 말하자면 대통령이 될 뻔한 사람 이회창(李會昌)씨 이야기. 이씨와 나와는 인연이 있는 셈이다. 그의 선친이 검사여서 전근을 다니니 아들인 그는 청주중학교에도 오게 되었다. 해방 후 어린 학생들 사이에는
2003.10.30 09:08:00
3당 합당 전야의 ‘진실의 순간’ 이라 할 술
남재희 회고 文酒 40年-그래도 잘 마셨다 <45>
민정당(노태우), 민주당(김영삼), 공화당(김종필)의 3당이 통합하기로 기습적으로 발표된 날 밤 인사동 골목의 한정식집 <향정>에서 의미가 클 뻔한 술자리가 열렸다. 김상현(金相賢), 이기택(李基澤), 이종찬(李鍾贊), 김정례(金正禮), 남재희(南載熙) 등 여야의 중진의원들
2003.10.29 09:02:00
잇따른 딸들의 구속에 폭음도 잇따르고
남재희 회고 文酒 40年-그래도 잘 마셨다 <44>
그렇지 않아도 애주가로 소문난 나는 딸들이 잇따라 구속되는 일을 당하자 애주가 폭주가 되는 횟수가 잦아졌다. 첫째 딸은 서울대 국사학과 4학년 때 광주항쟁 1주년을 맞아, 5~6명의 여학생과 함께 신군부를 규탄하고 학생들의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다량으로 찍어 대학
2003.10.28 08:57:00
조선일보 언론자유투쟁과 커튼論
남재희 회고 文酒 40年-그래도 잘 마셨다 <43>
***조선일보 언론자유투쟁과 커튼論** 1975년 3월 언론자유를 위한 투쟁이 전언론계를 휩쓸고, 조선일보에서도 32명의 해고란 희생자가 날 때이다. (동아일보는 동아방송과 합하여 1백30여명의 희생자를 내어 가장 많았다.) 나는 조선일보 10년 근무 후 고교선배인 신범식(申範植) 서울신문사장의 간청으로, 그리고 방일영(方一榮), 방우영(方又榮)조선일보 사
2003.10.27 08:4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