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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한국사회는 음악을 울타리 안에 가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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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한국사회는 음악을 울타리 안에 가뒀을까

[나도원의 '대중음악을 보다'] '레볼루송' 연재 마감에 부쳐

"예술가는 체제가 고용한 살아있는 방부제다."

저혈압이 걱정될 때 건강보조제로는 괜찮을 <조선일보>에 실린 문장이다. 예술단체에 보조금의 조건으로 시위불참확인서를 요구한 촌스러운 문화행정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시위참여를 "불법천지 시위현장에 나가 불을 지를 수는 있다"로 비약시키더니 "그런 행태를 벌이면서도 예술가니까 국민세금을 지원받아야겠다는 생각은, 몰염치이거나 거지근성이다"('권력 여러분, 강심제 먹고 여유 가지시길', 박은주, 2010. 02. 18)라며 기개를 뽐냈다. 대중문화를 담당하는 엔터테인먼트 부장의 강직함은 기사가 실린 날짜를 소리 내어 확인해보게 만드는 친절을 베풀고 있었다.

그 날, <프레시안>에는 마흔 번째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2009년 10월부터 계속된 기획 'RevoluSong'은 세상을 바라보고, 생각하고, 느끼는 음악을 날려 보낸 창이었다. '체제가 고용한 적 없는' 음악인들이 새로 만들거나 막 진열대에 놓인 신보에 담은 다양한 장르의 곡들로 참여했다. 조용했지만 의미 있는 소리였다. "좌파의 대중문화 자기편 만들기"를 염려할 정도의 피해의식만 없다면 이러한 움직임이 자연스러운 사회의 반영임을 알 수 있다.

▲신형원의 노래들을 대중들은 때로 그들 스스로가 재해석해 받아들였다. 저항의 상징으로 여겨진 뮤지션 상당수는 대중에 의해 그 지위를 얻었다. ⓒ연합뉴스

세상을 노래하는 건 자연스러웠다

나라마다 다른 호칭과 습관을 비롯하여 연유가 있어 생겨났고 전승되는 전통처럼 대중문화와 예술 역시 어떤 식으로든 역사와 사회의 반영일 수밖에 없다. 지금은 TV시대이다. TV에 자주 나오는 사람이라고 TV를 많이 보진 않을 테지만, 어떤 드라마의 모델이 대통령이 되고 주연배우는 장관이 될 정도로 TV의 위력은 대단하다. 미국에선 아예 자녀의 실종사건을 허위로 꾸미거나 백악관에 잠입하기까지 하는 중독 증세를 볼 수 있다. 물론 이면에는 돈이 있었다. 이러한 TV 속에선 '행복전도사'와 같은 코미디마저 빈부격차의 일상화와 괴리를 비춰내고 있다. 음악은 더 오래 전부터 그래왔다.

노예들이 손수 낳은 블루스와 음유시인들의 맥을 이은 포크는 대중음악의 씨앗이 되었다. 처음에 펑크는 뒷골목 청춘들의 반항어린 고함이었고, 무기로 무기를 제압하고 독재로 독재를 견제한 1980년대에 발흥하여 록 음악계를 장악한 스래시(Thrash) 메탈 또한 비례와 균형과 조화를 중시하는 연주 안에 정치와 사회를 향한 저항의 메시지를 주로 담았다. 남미의 노래운동인 '누에바 칸시온'과 태국의 '플렝 푸아 치윗'처럼 연구의 대상으로 승격된 움직임도 있다. 신을 농민의 모양새로 묘사하여 권위를 깬 미술가처럼 다수이면서 소수 취급을 당하던 이들을 여론 주도층으로 만드는 데에 대중음악의 역할도 작지 않았다.

제목은 몰라도 누구든 평생 몇 번 이상은 듣게 될 정도로 유명한 곡들, 이를테면 빌리 할리데이(Billie Holiday)가 부른 'Strange Fruit'에서 '이상한 열매'는 살해당한 채 나무에 걸린 흑인들의 주검이었다. 애니멀스(The Animals)가 불러 명곡으로 남긴 'The House Of The Rising Sun'의 화자는 고향을 떠나 비참한 상황에 처한 어느 여성이었다. 스미스(The Smiths)가 발표한 'Meat Is Murder'는 많은 이들에게 새로운 문제의식을 전했다. 아이언 메이든(Iron Maiden)은 구체적인 사건을 소재로 반전(反戰)을 외쳤고, 보수정권에 대한 지적인 비판을 모자이크 같은 리프에 끼워놓은 메가데스(Megadeth)와 같은 밴드들의 수는 헤아리기 어렵다. 밥 말리(Bob Marley)와 유투(U2)는 물론, 최근 콜텍노동자 지지운동에 가담한 톰 모렐로(Tom Morello)와 함께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기계에 분노를 표출한 레이지 어게인스트 머신(RATM)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민중가요보다 강도 높은 메시지를 담아낸 이들이 많다. 그들 모두가 세계적인 대중음악 스타들이다. 이런 예는 너무 많아 문제이다.

또한 노래는 냇물처럼 흐르다 웅덩이를 만나 의미가 추가되며 변형된 후에 다시 흐르기도 한다. 구전요 '누가 울새를 죽였나(Who Killed Cock Robin)'는 투여와 해석의 대표 사례이다. 낭독의 형태인 구비예술이 사라지고 블루스가 채록의 형태로 전파되기 시작한 복제시대에도 개인을 떠나 시대와 집단심성이 노래를 함께 완성하는 현상은 계속되었다. 한국에선 '아침이슬'과 '상록수'가 그랬다. 한돌이 쓰고 신형원이 부른 '불씨'를 어떤 이들이 광주항쟁의 은유로 받아들이고 '유리벽'에서 남다른 의미를 찾은 것처럼, 노래는 수용자들에 의하여 의미를 부여받으며 수면 아래의 입과 귀를 통하여 퍼져나갔다. 윤수일의 '아파트'와 무한궤도의 '그대에게'처럼 사회적인 의미에 국한되지 않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름난 조각상이 관광객들의 손길로 반들반들해지고 닳아가듯이 노래는 고체로 머물지 않는다.

그리고 과학이 중립적일 수 없는 것 이상으로 대중음악은 더더욱 중립적일 수 없다. 물론 많은 음악양식들은 그 자체로 순수하고, 더욱 순수를 추구하는 미니멀리즘도 있다. 어떤 정신과 시대에서 태어난 블루스와 펑크에 전혀 다른 성격의 가사가 더해지면서 같은 이름으로 불리지만 전혀 다른 블루스와 펑크도 만들어진다. 물려받은 거라곤 이름 혹은 어떤 느낌뿐이 되는 것이다. 또 인간 자체를 탐구하는 창작자들이 있고, 음악적으로 진보적인 작품을 만들지만 실제에선 적당히 타협하며 활동하는 이들이 있으며, 누구는 자본주의를 공격하는 음반을 수백만 장씩 팔아 스타가 되기도 한다. 작가가 작품을 배신하고 작품이 작가를 배신하기도 한다. 이처럼 음악은 모순적 결합이 가능하다.

음악에 대한 어떤 환상, 그리고 어떤 강요

그렇다고 외부압력으로부터 보호하려 '예술은 예술일 뿐, 음악은 음악일 뿐'이라 항변하는 것은 유럽여행 가서 홍삼선물세트를 사들고 귀국하는 맘씨 고운 사위의 선행이나 마찬가지다. 대중예술과 사회·정치의 분리는 예술을 위한 보호보다는 시장과 국가가 원하는 주의사항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자기 일만 잘하면 좋은 세상이 된다는 생각은 산타클로스가 실제로 굴뚝을 타고 내려온다는 얘기만큼만 현실성이 있다. 순수에 대한 강박은 고립된 살롱음악을 만들었고, 중립에 대한 강박은 요즘 상업영화들처럼 '권선'은 없고 '징악'만 남는 결과를 초래했다. 어떤 현상을 역사적 배경과 사회구조에서 분리하여 인간본능으로만 해석하면 불충분한 결과에 머문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바이다.

마샬 맥루한은 "물건을 놓아버리는 힘의 발달과 더불어 말을 하게 된다. 그 힘과 동시에 환경에서 분리될 수 있는 힘도 얻는다"고 했으나, 현실은 말을 놓아버리는 방법을 습득시키고 있다. 허버트 마르쿠제는 "언어와 사실의 분리"라고 지적했다. 자연으로부터 눈앞의 나무와 새와 풀이 분리되듯이 관념과 대상이 분리되고, 의미와 결과가 분리되는 것이다. 《파리카페》란 책을 보니 애비 호프만과 앨런 긴스버그가 1967년에 반전운동의 일환으로 행했다는 '프랭크스터'도 지금은 그냥 놀이가 되었다. 보수사회에서 순수와 중립에 대한 강박은 종종 기득권 세력을 위한 봉사가 된다.

이쯤 되면 사회적 발언을 담은 음악이 더 훌륭하다는 소린가, 혹은 대중예술은 그래야 한다는 것이냐는 오해를 품을 법하다. 대개 이해란 오해를 걷어내는 작업이기에 불만은 없다. 하지만 그런 오해는 일관성이 아니라 일률성에서 비롯된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1970년에 "진정한 예술은 삶과 현실의 모순을 제기하고, 그러한 모순을 개인의 의식 속에 존재시킴으로써 그 개인을 고문한다"고 썼지만, 같은 글에 마르크스가 "반동적 사고에도 불구하고" 발자크를 혁명적 작가보다 더 극찬했으며 "작가가 그의 정치적 의도를 숨기면 숨길수록 작품을 위해선 더 좋다"는 엥겔스의 말도 실어 놓았다.

어렵고 무거워야 진지하다는 것도 경박해야 대중이 좋아한다는 편견만큼이나 심각한 오해이다. 진지함과 무거움은 다르다. 단순함과 진솔함이 모여 거대한 감동을 만들어내는 장면과 얼마든지 마주칠 수 있다. 당연히 도구로 삼아 세상을 바꾸자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거세되어온 무엇을 다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니 어쩌면 오히려 예술지상주의에 가깝다. 다만 순수한 음악의 강조는 좋은 태도이나 강요는 나쁘다는 것이다. 음악이 사회와 시대를 반영하는 건 당연하고 그런 음악도 많다는 것이다. 음악은 도구가 아니다. 현실 자체이다.

그런데 왜 한국에선 대중예술과 음악이 사회와 동떨어져 다른 길을 걸어왔을까? 1920년대부터 창작이 시작되어 1930년대에 흥기를 맞은 우리 대중음악은 이미 긴 역사를 가지게 되었으나 그만큼 넓은 금단의 구역도 만들어놓았다. 공백도 역사이고 침묵도 발언이지만, 대중예술인의 정치성향 노출은 위험하다고 스스로 제한하는 '후진 문화'의 정착은 유난스러울 정도이다. 익히면 색이 변하는 고동색 게와 가재, 초록색 고사리를 보고 우리가 먹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처럼, 음악은 사회와 역사와 관계한다는 당연한 사실조차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그만한 사연이 있다.

▲'국풍81'이 벌어지던 여의도. 국풍은 독재정권이 대중문화를 이용해 대중을 어떻게 통제했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연합뉴스

대중음악은 이렇게 사회로부터 떼어졌다

서구에 비하여 구술문화에서 문자문화로 넘어온 기간이 짧다. 20세기 초까지 문맹률이 90%였던 한국에서 조선 세종의 꿈은 500년 후에나 이루어진 셈이다. 더구나 대중적 문자문화의 시간은 반만년 중 반세기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마침내 이를 극복할 무렵, 검열의 시대가 왔다. 방패막이로 쓰이다 버림받을 소모품 주제에 예술과 음악에 대한 평결을 내리며 충성한 빨간 볼펜의 검열자들은 복종의 메커니즘을 구성했다. 음반마다 삽입되는 건전가요도 영화를 보기 전에 봐야하는 대한뉴스와 같은 역할을 했다. 물론 음악만이 아니었다.

"민주의 광장에는 말뚝이 박혀 있고, 쇠사슬이 둘려 있고, 연설과 데모를 막기 위해 고급승용차의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 고급차의 뒷자리의 두꺼운 유리창 밑에서는 하얀 두루마리 휴지가 정액에의 봉사라도 기다리고 있는 듯 미소를 짓고 있다." 오늘을 말하는 것 같지만 시인 김수영이 1968년에 <사상계>에 쓴 '지식인의 사회참여'의 한 부분이다. 그는 또 쓴다. "문화도 수력발전소의 댐처럼 건설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최고의 문화정책은 내버려 두는 것이다. 제멋대로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러면 된다. 그런데 그러지를 않는다. 간섭을 하고 위협을 하고 탄압을 한다. 그리고 간섭을 하고 위협을 하고 탄압을 하는 것을 문화의 건설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 오늘날의 문화계의 실정이 월간잡지 기자들의 머리 세포 속까지 검열관의 '금제적 감정'이 파고 들어가 있다." 김수영은 이 글을 쓴 해에 사망했다.

그리고 사실상 사상훈육을 받으며 자라는 사회에 이른바 통합이데올로기가 더해졌다. 지금도 TV뉴스 끝머리는 분열을 걱정하고 통합을 강조하는 앵커의 멘트로 마무리되고, 정당의 대표들의 취임 일성 또한 한결같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기에 관성이 되었지만, 당한 사람들이 아니라 가해온 사람과 구경해온 사람까지 화해와 용서, 그리고 통합을 얘기한다. 실컷 두들겨 패놓고 리무진에 올라타면서 "자, 우리 화해하고 통합하는 거야!"라는 식이다. 하지만 경쟁우선사회에서 통합이데올로기는 눈가리개이자 감속장치였다. 세계화가 한국의 세계화가 아니라 제국질서로의 편입을 의미하듯이, 모든 것의 통합이야말로 진정 공포다. 건강한 긴장관계와 다양성의 조화가 시대에 맞고, 또 현실적이다. 통합의 길을 묻는 대신 통합에 대한 환상을 묻을 때이다. 문제는 통합이 예술과 문화를 체제와 사회정신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음악을 사람과 사회로부터 떼어낸 것이다.

이러한 과정과 배경에서 원래 시대정신을 반영했던 서양고전음악은, 그리고 민초의 삶을 담았던 전통음악은 순수예술이란 이름으로 보수화했고, 영화 <바이올린 플레이어>에서처럼 고립되었다. 보호와 육성을 위한 학제의 완성과 강단예술계의 형성, 그리고 지원제도의 마련이 역으로 작용했다. 순수하게 예술만 추구한다기보다는 음악 외에 다른 이야기를 삼간다는 의미의 순수예술이 만들어진 것이다. 아름다운 고드름을 간직하겠다며 톱으로 잘라 이불로 둘둘 말아놓은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역할을 대중음악이 대신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마침내 1995년의 헌법재판소 판결을 거쳐 1996년에 검열의 시대는 끝이 난다. 그 동안에도 정태춘과 박은옥이 있었고, 한돌과 신형원이 있었다. 김창남 성공회대 교수가 "혼돈스러운 한국사회에서 음악이 어떤 식으로 사회와 관계 맺을 수 있는 지를 매우 적실하게 보여준 하나의 이정표와 같았다"고 평한 강산에도 있었다. 그런데 곧바로 시장논리가 절대화되는 시대가 왔다. 대중음악을 발전시켜온 시장의 강화가 어째서 당국의 검열보다 더욱 강력한 담장이 되는지는 따로 얘기해야겠지만, 간단히 현실의 십계명이 만들어졌다고 해두려 한다. 일계명은 수익이다. 이계명도, 삼계명도, 그리고 열 번째 계명도 모두 수익을 내라는 것이다. 그 방법은 세 가지, "어려운 것은 쉽게", "위험한 것은 순화하여", "안 팔릴 것은 팔리게"이다. 전체주의적 사회주의만이 음악을 규정하고 제한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곁눈질이 아닌 응시를 택하고 흙먼지 날리는 거리에 선 음악인들이 2000년대 이후에도 적지 않다. 다만 키가 작아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움직임의 한 면을 'RevoluSong'도 보여주었다. 이제 음악이 어떻게 울타리 밖으로 나오고 있는지, 그리고 지금 그런 노래들이 어디에서 울리고 있는지 찾아 들춰볼 차례이다. 그것은 물 뿌린 화분 앞에 쪼그리고 앉아 흙이 물을 빨아들이는 소리를 듣는 일만큼이나 값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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