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 법안을 다루고 있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 노동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번의 비정규직 법안 논의에 가장 촉각을 곤두세우는 사람들은 비정규직 노동자 당사자들이다. 수년 간 비정규직을 '보호'하는 법안이 없어 방치돼 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법안 입법이 초읽기에 들어간 상황에서 입장을 밝히고 나섰다.
***비정규직 노조 대표자 6명, 국회 앞에서 단식농성 돌입**
법안 처리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열린우리당은 "1년5개월에 걸쳐 법안 논의를 했으면 이제는 법안을 처리해야 한다"고 연일 말하고 있지만, 정작 당사자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단식농성을 결의했다. 기간제, 계약직, 파견직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며 자신의 노동을 팔아 온 이들이 단식을 통해서라도 정부·여당의 비정규직 법안 입법을 막겠다는 것이다.
민주노총 소속 전국비정규연대회의(전비연) 대표자들과 한국노총 소속 비정규연대회의 대표자들은 20일 오전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는 법이 제정될 때까지 단식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이들은 기자회견문에서 "정부·여당은 자신의 법안이 비정규직 '보호' 법안이라고 사기를 치며 우리 비정규직 노동자의 반대 의사에도 불구하고 이 법의 강행통과, 날치기에 혈안이 돼 있다"며 "오늘(20일)부터 결사항전의 태세로 국회 앞에서 결사단식 농성에 돌입한다"고 밝혔다.
이들에 따르면, 구권서 민주노총 전비연 의장과 유철수 한국노총 비정규연대회의 의장 등 비정규직 노조 대표자 6명이 이날 오전 농성천막을 마련하는 것을 시작으로 단식에 돌입했다. 이들은 비정규직 노조 대표자들을 중심으로 단식농성 참여자의 수를 늘려갈 계획이며, 단식마감 일정은 정해놓지 않아 사실상 무기한 단식을 할 태세다.
***"사유제한 규정 없이 비정규직 수를 줄이겠다고?"**
이들은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법안을 '비정규직 개악안'이라고 부른다. '비정규직 보호법안'이라는 정부·여당의 설명을 정면으로 뒤집는 명칭이다. 이들이 '비정규직 개악안'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여러가지다.
그 첫 번째 이유는 비정규직 법안 중 '기간제·단시간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안(기간제법안)'이 기간제 근로의 사용을 제한할 수 있는 '사유제한' 규정을 별도로 두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들은 그간 정부가 아무런 법적 제재 없이 사용자들로 하여금 비정규직을 무제한으로 사용하게 함으로써 비정규직 노동자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됐다는 데에 비정규직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고 본다. 민주노총에 따르면, 현재 비정규직 수는 850만 명에 달한다. 이는 전체 임금노동자의 절반을 상회하는 수준이다.
따라서 비정상적으로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수를 줄이는 것이 비정규직 문제 해결의 급선무가 될 수밖에 없고, 이를 위해서는 비정규직 사용을 엄격히 제한할 수 있는 '사유제한' 규정이 반드시 도입돼야 한다는 것이 비정규직 노조 대표자들의 생각이다.
***입법도 되기 전에 금융권에서는 11개월짜리 기간제 계약 사례 발견돼**
한편 이날 기자회견 자리에서는 비정규직 법안이 입법도 되기 전에 일부 사업장에서 11개월 혹은 22개월 기간제 계약이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이 폭로되기도 했다.
권혜영 한국노총 금융노조 비정규노조 지부장은 "J금융공사는 최근 채권추심 부서 신규채용에서 11개월을 기본단위로 하는 기간제 근로계약을 체결하고, 성과가 좋을 경우 한 번만 계약기간을 연장하기로 했다"며 "이는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비정규직 법안이 기간제 사용을 2년까지만 허용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현재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기간제 법안과 관련해 정부·여당은 사유제한 없이 2년 간 기간제 근로를 사용하되, 2년 이상 사용할 경우에는 정규직으로 전환하도록 하고 있다.
따라서 권 지부장의 지적은 2년 이상 기간제 근로를 사용할 경우 해당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하는 만큼 사용자가 근로계약을 체결하는 순간부터 2년 미만의 기간제 근로만 계약한다는 것이다.
권 지부장은 "사유제한 없이 2년만 기간제 근로를 허용할 경우 대다수 기간제 노동자들은 2년마다 해고가 반복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며 "2년 뒤 정규직 전환이라는 정부·여당의 주장은 현실에서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특수고용직은 왜 외면하나?"**
현재 민주노동당이나 민주노총도 마찬가지이지만 이번 입법 논의에서 '사유제한 규정'의 도입 여부에만 이목이 집중된 상태다. 하지만 비정규직 당사자들은 사유제한 규정 도입은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해 필수적인 사항이지만 사유제한 규정이 도입된다고 해서 비정규직 문제가 일소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로 대표적인 것은 학습지 교사, 골프장 경기보조원, 화물·덤프 트럭 기사 등 특수고용직 노동자에 대한 보호조처가 이번 법안 논의에서 배제됐다는 점이라고 이들은 지적하고 있다.
특수고용직의 신분에 대해서는 정부·재계와 노동계의 입장이 다른데, 이는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이 처한 신분상 특수성 때문이다.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은 외관상 '개인사업자'이지만 사용자와 종속관계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사용자로 보기 힘든 특징이 있다.
이에 따라 정부·재계는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이 갖고 있는 개인사업자로서의 특성을 강조하면서 '노동자로 볼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지만, 노동계에서는 사실상 노무를 제공하는 노동자와 같다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
박대규 건설운송노조 위원장(전국비정규연대회의 부의장)은 "특수고용직 노동자가 100만이 넘는다고 정부 스스로도 말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비정규직과 다름없는 우리들에 대한 보호조치는 이번 입법논의에 포함돼 있지 않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비정규직 보호법'이라고? '기업보호법'이라고 하라?" **
이처럼 비정규직 노동자 당사자들은 국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입법논의에 대해 많은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논의 의제 자체에서부터 문제가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가장 답답해 하는 대목 중 하나는 정부가 이번 법안에 대해 '비정규직 보호법안'이라고 강변하는 행위다.
박대규 위원장은 "어떻게 표현되는가가 얼마나 중요한지 이번에 알았다"며 "비정규직 당사자들이 반대하는 법안을 두고 정부가 '비정규직 보호법안'이라고 말하는 것이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박 위원장은 특히 최근 열린우리당이 사유제한 규정을 도입할 수 없는 이유로 '중소기업의 비용부담'을 언급한 것에 대해 "비정규직 개악안이 비정규직을 보호하려는 법안인지 기업을 보호하려는 법안인지 분명히 알 수 있는 우리당 의원들이 발언이 최근 많았다"며 "정부·여당은 솔직하게 비정규직 개악안을 '기업 보호법안'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비정규직 문제, 목숨을 걸어야 해결돼"**
한편 이날 기자회견에는 지난 1일부터 단식농성을 진행하고 있는 금속노조 김창한 위원장 등 금속노조 간부들이 대거 참석했다.
이들이 단식에 돌입한 원래 이유는 현대하이스코와 하이닉스-매그나칩 등 금속노조 산하 사업장에서 풀리지 않은 문제들에 대해 정부가 주도적으로 해결에 나설 것을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김창한 위원장은 "예전에는 임단협만 잘 챙기면 민주노조라고 했다"며 "하지만 이제 임단협만으로는 안 된다.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갖고 실천하는가에 민주노조의 명운이 걸렸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비정규직 문제 해결은 어떤 사안보다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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