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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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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2012>!

[오동진의 영화갤러리]

롤랜드 에머리히의 물경 2시간37분짜리 대작 <2012>를 보는 것은 곤혹스럽고 씁쓸한 일이었다. 지구 멸망이라는 대재앙이라는 것도 왜 대국 중심이어야 하는지 그것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2012>에서 살아남는 국민의 상당수는 미국인과 중국인이다. 스러져 가고 있는 미국이 그나마 국제질서의 패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영화에서조차 중국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점을 암시하는 것 같아 실소를 금치 못했다.

48개국 정상들은 합의하에 미국 주도로 최첨단 시설을 갖춘 노아의 방주를 만드는데, 그 장소가 티벳 고원 어디쯤이다. 백안관 비서실장(올리버 플랫)은 이 방주에 도착한 첫날 이렇게 말한다. "중국인들은 정말 대단해. 그 짧은 시간에 이런 걸 만들어 내다니 말야." 이쯤 되면 중국시장을 향한 할리우드의 아부도 절정에 이른 셈이다. 중국의 오랜 탄압으로 신음하고 있는 티벳인들이 이 영화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 영화에서나마 자신들을 살려주는 건 고마운데 중국인과 티벳인을 구별하지 않으려는(못하는 게 아니고) 태도만큼은 마음에 들어하지 않을 것이다.

▲ 2012

슬쩍슬쩍 끼워 넣는 휴머니즘의 설정들도 손발이 오그라든다. 지구멸망의 상황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지질학자 에이드리안(치웨텔 아이오포)은 모두가 몰살될 일촉즉발의 위기 속에서도 갑판을 열어 또 다른 인명들을 살려야 한다고 역설한다. 차라리 갑판 문을 닫고 많은 사람이 죽은 후 그 문제로 두고두고 죄책감에 사로잡혀 괴로워 하는 것이 더 리얼했을 뻔 했다. 그게 인간이다. 할리우드는 자꾸 필요이상으로 영웅들을 만들어 낸다.

재미있는 것은 <2012>의 많은 '인간'들은 흑인이라는 점이다. '비인간'들은 백인이다. 에이드리안도 그렇고, 결국 방주 행을 택하지 않고 백악관에 남아 자신들의 '신민(臣民)'들과 죽음을 택하는 의로운 대통령도 흑인이다. 토마스 윌슨 대통령(대니 글로버)은 마지막으로 딸인 로라 윌슨(탠디 뉴톤)과의 통화에서 사람들에게 뒤늦게라도 종말이 다가왔음을 알려야 한다며,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적어도 아버지가 딸에게 용서를 구할 시간은 줘야 되지 않겠니?" 그 부정(父情)에는 백번 동의하지만 어쨌든 그런 인간주의를 흑인에게서만 구하려는 태도는 이상하게도 시대와 세상이 변할 때마다 끊임없이 타협하려는 할리우드의 상술이 느껴진다. 죽었다고 생각한 주인공 잭슨(존 쿠삭)이 물속에서 튀어 나왔을 때 모두가 뛸 듯이 환호하며 난리치는 장면은 할리우드 영화의 최대 클리셰다. 진부하기 짝이 없다. 배우들이 그럴 듯하게 연기를 해내는 게 오히려 기특할 정도다.

▲ 2012

왜 롤랜드 에머리히와 2009년 막바지의 할리우드는 종말론에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일까. 우리 모두가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세상이 갈 때까지 갔음을, 그러니 더 이상 애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것일까. 이건 결국 테러와 질병을 뛰어 넘는 또 다른 공포의 확산을 통해 사람들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려는 고단위의 선전전은 아닐까.

국내 상당수의 관객들이 이런 류의 영화를 그냥 한번 보고 즐기는 오락영화쯤으로 치부할 만큼 의식이 높아졌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리우드가 종종 불쑥불쑥 내놓는 이 무차별적인 국가주의는 가슴을 서늘하게 만든다. 이성이 채 무르익지 않은 청소년들이 부지불식간에 모든 사고의 패턴을 미국 중심으로 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심사가 든다. 그러니 이건 그냥 한번 즐기고 말 영화라고 할 수가 없다. 그것도 두시간이 훨씬 넘는 시간이라면 이만저만한 세뇌가 아니다. 할리우드는 99편의 영화로 사람들을 만족시키다가도 꼭 한편으로 크게 실망시킨다. 아무리 CG가 뛰어나다 한들, 그래서 아무리 그럴 듯 하게 보인다 한들, <2012>는 그 안에 숨어있는 진실을 더 뒤져봐야 할 영화다.

* 이 기사는 영화 주간지 '무비위크' 405호에 실린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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