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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건설과 금호, 파멸로 치달은 동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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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건설과 금호, 파멸로 치달은 동거

대우건설 수난사, 한국 기업 인수합병의 '또 다른' 사례

2006년 6월 22일, 금호아시아나그룹 컨소시엄이 대우건설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전년 말 인수의향서 접수가 시작된 이후 장장 6개월에 걸친 레이스가 서서히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한때 한국 재계를 대표하던 대우그룹의 주춧돌이 사돈가(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차남 선협 씨는 고 박정구 금호그룹 회장의 장녀 은형 씨와 부부 사이였다)로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사돈의 품에 안긴 대우건설의 3년은 평탄하지 못했다. 그룹광고에서처럼 '아름다운 동행'은, 적어도 대우건설 임직원들에게는 먼 얘기였다. 2009년 11월 23일, 딱 3년 5개월이 흐른 지금 대우건설의 임직원들은 다시 거친 벌판에 섰다. 새 주인을 맞이하기 위해. 그것도 가장 원치 않는 방식으로, 가장 원치 않는 자들의 품에 안기길 기다리며.

대우그룹 해체 후 대우건설이 걸어온 길은 외환위기 이후 이어진 한국 기업 인수·합병(M&A)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의 연속이다. 대우건설 노동자들은 무리한 매각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들의 주장은 어떤 근거를 가졌는가를 지난 역사에서 되짚어봤다.

▲23일 저녁, 대우건설 노동조합원들이 금호 퍼스트 타워 앞에서 촛불집회를 열었다. 대우건설 전체 임직원 3700여명 중 조합원 수는 1300여명에 달한다. 가입률이 이처럼 높은 이유에 대해 노조 관계자들은 "지난 수년 간 피인수 과정을 겪으면서 조합원 수가 늘어났다"고 말한다. ⓒ프레시안

립, 고난 후 뒤따라온 '자율경영'

대우건설은 이른바 '대우 신화'의 상징이었던 ㈜대우가 외환위기 이후인 지난 2000년 12월, 대우인터내셔널과 대우건설로 쪼개지면서 탄생한 기업이다. 김우중 회장의 무리한 '세계 경영'이 외환위기에 발목 잡히면서, 재계순위 2위에 올랐던 대우그룹은 1999년 8월, 12개 주력계열사가 워크아웃을 신청하며 공중분해되는 참담한 결말을 맞았다.

㈜대우의 주력 사업부문에서 새출발한 대우건설은 한국 대부분의 재벌계열사에 익숙한 '회장님'의 지휘 없이, 정부의 감시를 받으며 독립의 길을 걸었다. 출발은 고달팠다. 옛 명성은 비스킷처럼 수주현장에서 부서져내렸다. 아파트를 지어도 브랜드 경쟁력을 의심하는 사람이 늘어났고, 기술력은 국내 최고임을 자부하던 토목 부문에서도 일감을 찾기 어려웠다. 당시를 기억하는 30년 '대우맨' 권혁수 노조 수석부위원장은 "당시는 완전히 망하는 분위기였다. 새출발이 무척 힘겨웠다"고 회상한다.

그러나 위기는 조직원들의 자율경영을 북돋우는 기회로 되살아났다. 각 팀원이 자기 맡은 일은 스스로 책임지는 분위기가 서서히 정착됐다. 때마침 원전입찰에 연달아 성공하면서 국내 건설사 3강의 자리를 되찾아왔다. 2003년 신고리 원전 1, 2호 입찰에 LG건설, 삼성물산을 제치고 가장 많은 지분율(51%)로 참여해 기술력을 완연히 인정받았다. 이해 12월, 대우건설은 출범 2년 10개월 만에 워크아웃을 졸업했다. 2003년 대우건설은 매출액 4조2311억 원, 영업이익 3127억 원을 기록했다. 매출액은 전년보다 23%가 증가한 결과였다.

실적은 빠른 매각 작업 진행을 앞당겼다. 정부로서는 빠른 시일 내 민간에 기업을 되팔아 재정을 채울 필요성이 있었다. 2004년 3월, 대우건설 매각주간사 선정공고를 시작으로 독립의 길을 나섰던 대우건설은 새 주인찾기에 돌입했다. 2006년 1월, 본입찰 참여자는 무려 10곳에 달했다.

▲지난 2006년 6월 22일, 자산관리공사는 대우건설 인수 우선협상대상자로 금호아시아나그룹 컨소시엄이 선정됐다고 밝혔다. 악연의 시작이었다. ⓒ연합뉴스

악연의 시작

최종까지 경쟁을 벌인 이는 금호아시아나그룹 컨소시엄과 프라임산업 컨소시엄이었다. 매각주간사인 삼성증권이 그해 5월 "프라임산업보다 금호가 대우건설 인수에 유리하다"는 보고서를 내면서 파문이 일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승부의 추는 금호 쪽으로 기울었다. 금호아시아나 컨소시엄은 인수가로 주당 2만6980원을 써냈다. 시가의 두 배에 달하는 거액이었다. 노조는 당시 "고가매각은 인수자의 부담을 높여 오히려 기업의 영속성을 떨어뜨린다"고 했으나 여론의 관심을 모으지는 못했다.

출발이 삐걱거린데다 "정치권에서 유일하게 남은 호남 기업을 밀어주려 한다"는 특혜시비가 일어났다. 일찌감치 매각주간사 선정 비리 의혹으로 자산관리공사(KAMCO) 담당직원은 옷을 벗었다. 숱한 잡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해 10월, 금호아시아나그룹은 무려 6조4000억 원에 달하는 거액을 들여 채권단이 보유하고 있던 대우건설 주식 전량(72.1%)을 사들였다. 당시 시장의 예상가는 경영권 프리미엄을 감안해도 5조 원대였다. 일부 탈락업체들이 법적 대응을 준비할 정도로 파장은 컸다.

이해 4월 공정거래위원회 발표 자료를 기준으로 대우건설의 자산은 5조9780억 원. 12조9820억 원으로 재계순위 11위이던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순식간에 자산규모만 19조 원에 육박하는 재계 순위 8위의 대재벌로 올라섰다.

인수주체의 덩치로만 보면 도저히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결과였다. 그해 말 기준으로 대우건설의 자산은 6조2723억 원(연결재무제표 기준)이었던 반면, 대주주로 올라선 금호산업은 2조9250억 원에 불과했다. 그해 시공능력은 대우건설이 업계 2위인 5조4600억 원(토목건축 기준), 금호산업은 1조6370억 원이었다.

당장 잡음이 생겨났다. 금호아시아나 측은 거세게 반발하던 대우건설 노조를 달래기 위해 △차입금 최소화 △금호건설과 합병 백지화 △5년간 전직원 고용승계를 내걸었다. 그러나 차입금 최소화 조건은 결국 거짓이었음이 드러났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이 컨소시엄에 끌어들인 JP모건, 연기금, 미래에셋, KTB네트워크, 메릴린치 등 재무적 투자자(FI)들의 투자 금액이 무려 4조5000억 원에 달했다. 금호아시아나는 그들에게 일정 수익(2009년 12월 15일 대우건설 주가가 3만2500원 미만일 경우 정해진 가격으로 FI들의 주식을 매입하는 조건)을 보장해줬다. 3년 후 금호아시아나그룹을 파멸의 수렁에 빠뜨린 풋백옵션 조항이었다.

공멸의 길이었나

노조와 시장의 우려는 사실이었음이 곧 확인됐다. 금호아시아나가 대우건설을 삼키기 위해 끌어다 쓴 과도한 차입금이 양자의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차입에 따라 새로 발생한 이자비용만 연간 581억 원에 달했다.

금호 측은 일단 주가부터 끌어올려야 했다. 2007년 3월 6일, 오남수 당시 금호아시아나그룹 사장은 기업설명회(IR)에서 대우건설 주식 감자의사를 밝혔다. 자사주를 사들여 주가를 높이기 위함이었다. 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금호아시아나그룹은 그해 7월, 옛 대우그룹의 상징이나 다름없던 대우센터 빌딩을 총액 9600억 원에 모건스탠리 부동산펀드에 팔았다. 옛 대우맨들의 자존심이나 다름없던 곳은 이렇게 새 주인을 찾아갔다. 권 부위원장은 "당시 예전 대우그룹에서 일하셨던 선배들의 전화가 회사로 많이 왔다. 안타깝다는 말들이 생생히 기억난다"고 했다.

▲옛 대우그룹의 상징이던 대우센터는 금호아시아나그룹명을 달아야했다. 이 빌딩은 이후 미국계 자본에 팔렸다. 대우의 기억은 이렇게 사라져갔다. ⓒ연합뉴스

결국 그해 8월 27일, 금호산업은 자회사 대우건설 주식1357만 주를 주당 3만4000원에 유상감자한다고 공시했다. 인수기업이 피인수 기업의 주가 부양에 애쓰는 것을 두고 당시 대우건설 내부에서는 "외국계 투기펀드와 금호가 하는 짓이 뭐가 다르냐"는 불만이 쏟아져나왔다. 그해 말에는 자기주식 소각을 위해 1000억 원을 쏟아붓기도 했다. 그럼에도 주가는 기대한만큼 오르지 않았다. 당시는 경기가 정점에 달했을 때로, 특히 건설주들의 주가는 더 이상 오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대우건설은 박삼구 당시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의 또 다른 야심작이었던 대한통운 인수에도 적극 활용됐다. 인수가격 4조1040억 원 중 대우건설은 1조6400여억 원을 써야했다. 관련 금액 조달을 위해 대우건설은 2008년 3월 14일, 교환사채(EB) 5460억 원 어치를 발행해야 했다. 재무구조가 더욱 나빠진 것이다.

계열사 실적을 높여주는데도 대우건설은 이용됐다. 직원들의 금호생명 퇴직보험 가입에만 1000억 원을 넘게 썼다. 노조 관계자들은 "우리를 인수한 금호의 경영시스템이 오히려 우리만도 못했다"고 혀를 찬다.

한 노조 관계자는 "금호그룹 사람들이 회사에 찾아와 그룹식 경영시스템 이식을 시도했다. 그런데 우리가 쓰는 회계 프로그램과 분양 시스템이 오히려 금호보다 훨씬 뛰어났다. 당시 우리는 건설 현장에서의 현금 입·출금과 외주업체 지급대금 결제 등을 모두 은행을 통화 전산화시켜놓았다. 그러나 여전히 금호건설은 손으로 어음전표를 끊는 수준이었다. 결국 우리 인력이 그룹 경영혁신본부로 파견돼 금호그룹 혁신 작업에 참여할 정도였다. '이 정도 회사에 우리가 먹혔나'라고 생각하니 솔직히 자존심이 상했다"라고 말했다.

양 측의 화학적 결합이 쉬울 리가 없었다. 대우건설 직원들과 금호아시아나 계열사 직원들은 서로 상처를 주고 있었다. 금호 측이 3명을 조건으로 파견한 고위 직원이 지휘하는 팀과 나머지 팀의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대우건설 회생의 기반이 됐던 팀워크가 깨져나갔다.

경영방식에서도 쉽게 극복할 수 없는 마찰이 생겨났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총수가 전권을 휘두르는 전형적인 재벌식 의사결정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회계부문에서 일하던 한 관계자는 "의사결정 속도가 그렇게 느려질 수 없었다. 총수가 사인하기 전까지는 아무 일도 되지 않았다.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고 말했다.

파국… 또 다시 예고되는 파국

상처를 입은 곳은 대우건설만이 아니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무리한 인수 후유증으로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 대한통운을 인수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미국발 금융위기가 거세게 불어닥쳤다. 두 거대기업(대우건설, 대한통운) 인수로 인한 이자부담이 더욱 커졌다. 그룹 전체가 유동성 위기에 처할 정도였다.

더군다나 풋백옵션 조항은 점차 그룹의 미래를 옥죄기 시작했다. 대우건설 주가는 건설경기 급랭으로 인해 회복될 줄을 몰랐다. 이대로라면 금호아시아나그룹이 FI들에게 갚아야 할 돈은 무려 4조 원이 넘을 지경이었다. 대한통운 인수에 쓴 자금을 송두리째 다시 끌어 댕겨도 당장 닥친 유동성 위기를 넘기에도 급급했다. 경기한파와 무리한 차입은 그룹의 주축이던 아시아나항공, 금호타이어, 금호산업 등 계열사 재무제표 악화로 이어졌다.

점점 시장에서 흉흉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증권가에서는 "사실상 금호그룹은 절단났다. 만기 돌아오는 어음들을 못 갚아서 산은이 대신 메워준다. 사채시장을 전전한다는 기업 리스트에 금호 계열사가 올랐다"는 등의 소문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근거를 알기 어려운 소문은 다시 그룹을 옥죄어왔다.

▲금호아시아나그룹과 대우건설의 동거는 숱한 후유증을 남기며 끝났다. 상처입은 자는 대우건설 노동자만이 아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치명적인 상처를 극복해야 한다. ⓒ연합뉴스
결국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올해 6월 28일, 인수 2년 8개월 만에 대우건설 재매각 입장을 공식 발표했다. 사옥과 금호생명까지 시장에 내놓았으나 풋백옵션 부담을 해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무리한 인수의 결말이었다.

금호아시아나는 곧 이어 수장을 잃는 지경에까지 처했다. 두 그룹 인수를 강하게 추진한 박삼구 회장과 동생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 사이에 벌어진 갈등은 '화목함'으로 선전되던 금호 특유의 형제경영의 어이없는 종말로 매듭지어졌다.

서둘러 매각 대상 기업을 물색하기 시작한 금호아시아나그룹은 마침내 지난 23일, 5개월 간의 물밑작업 결과를 발표했다. 자베즈 파트너스(Jabez Partners) 컨소시엄과 TR 아메리카 컨소시엄 두 곳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그러나 인수자격 논란이 거세지고 있다. 일단 두 곳의 정체부터 모호하다. 자베즈 파트너스는 국내 금융기관이 주도한 컨소시엄으로, 아랍에미리트 국부 펀드를 끌어들였다고 알려졌으나 노조의 확인에 따르면 이는 사실과 거리가 멀다. 심지어 국내 어떤 금융기관이 주축인지도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았다.

TR 아메리카는 재미동포 사업가 문정민 회장의 AC개발(AC Development)이 주축인 컨소시엄으로, 엉뚱하게도 처음 입찰 신청 당시 파산기업인 HRH건설을 컨소시엄에 끌어다 놓아 문제를 일으켰다. 뒤늦게 TR 아메리카는 미국 뉴욕의 지역 건설업체인 티시먼 건설(Tishman Construction)을 새 얼굴로 내세웠으나, 이 회사가 컨소시엄에 얼만큼의 자금을 투자했느냐도 제대로 확인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벌써부터 대우건설 노조와 일부 정치권 인사, 시민단체들은 대우건설이 또 다른 '먹튀'의 희생양이 되는 것 아니냐고 우려한다. 투기자본감시센터는 "싱가포르 정부가 투자한 테마섹은 한국에서 부동산 투기를 일삼았고, 인도에서 이동통신사에도 '먹튀' 행위를 했다"며 "국부펀드가 사회적 책임투자를 한다는 증거를 찾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더군다나 결국 인수 주체로 나선 이들의 정체가 여전히 베일에 가려 있다는 점, 펀드는 결국 일정 수준의 인수차익을 노릴 수밖에 없다는 속성을 감안하면 원전개발 기술 등을 가진 대우건설 인수 주체로는 부적격이라는 평가다.

거슬러 올라가면 대우건설이 겪은 질곡의 역사는 결국 외환위기, 그리고 이로 인해 드러난 '황제식 재벌경영'의 폐해에서 시작됐다. 마치 이를 해결할 구세주인양 한국시장을 휘젓고 다닌 외국계 자본은 숱한 사례에서 확인되듯 후유증만 더 키웠다. 산업자본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상하이차는 물론, 금호아시아나그룹의 대우건설 인수도 결국 실패로 드러났다. 금호와 산업은행이 선택한 새로운 인수후보들은 지난 10여 년의 기업 인수합병 사례로 미뤄볼 때, 최악의 후보군이다.

"산은이 대우건설의 자율경영을 보장하면 더욱 우량한 회사로 거듭날 수 있다. 매각은 그 이후"라고 대우건설 노동자들은 이날도 금호아시아나 퍼스트 타워(First Tower) 앞에서 촛불을 든다. 그리고 이들은 철야농성을 위해 다시 회사로 들어간다. 15일 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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