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계가 국가인권위원회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경제5단체는 17일 한 목소리로 인권위가 최근 발표한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인권NAP) 권고안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며 "인권위는 노사문제에 더이상 관여하지 말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비정규직이 전체 노동인구의 절반을 상회하고, 이들의 임금 수준과 노동조건이 80년 대 정규직 노동자들의 그것에 불과할 정도로 열악한 현실에서 경영계의 이같은 주장과 요구는 지나치다는 생각이다. 또한 오늘날 인권 영역에서 핵심 주제가 노동문제를 포함한 사회권적 기본권 보장에 있는 만큼 '인권위의 월권' 논란은 세계적 기준과도 크게 어긋난다는 지적이 많다.
***경제5단체장, 한 목소리로 인권위의 인권NAP권고안 비판**
전국경제인연합회, 한국경영인총협회 등 경제5단체의 장들은 17일 오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긴급 회동을 가진 뒤 인권위의 '인권NAP' 권고안에 대해 '경영계의 입장'이란 제하의 성명서를 발표해 강한 우려감을 표했다.
이들은 인권NAP 권고안에 대해 "일부 진보세력의 주장만을 반영해 균형감각이 결여돼 있고, 실현가능성이 낮다고 본다"며 "실정법과 헌법재판소의 결정조차 무시하고 국민정서와 법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혹평했다.
이들은 또한 "권고안이 그대로 정책에 반영될 경우 우리 사회에 크나큰 혼란이 초래될 것으로 우려된다"며 특히 권고안 내용 중 양심적 병역거부 인정, 공무원·교사 정치활동 보장 등을 지목하며 "안보와 사회질서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동안 사회적 발언을 자제해 오던 경제5단체가 근 9개월만에 한 목소리로 입장을 발표한 만큼 이들의 입장 발표는 정부의 인권NAP 수립에 적지 않은 파장을 몰고 올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정부는 이해찬 총리 주재로 연 국무회의 자리에서 인권위의 권고안을 선별 수용하는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제5단체의 입장 표명이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대목이라고 볼 수 있다.
***인권위 해산과 재구성도 요구**
한편 경제5단체의 반발은 인권NAP권고안이 계기가 됐지만, 단지 거기에 머무르는 것만은 아니다. 17일 성명에서도 인권위 존재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와 비판이 곁들여져 있었다.
이들은 "인권위의 독선적 결정을 막기 위해서는 인권위의 기본 역할과 기능의 재정립이 불가피한 실정"이라며 "차기 인권위 위원의 재구성시에는 균형된 시각과 사회적 덕망을 쌓은 인사들이 참여하는 기회가 주어져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경제5단체의 수장 격이라고 할 수 있는 이수영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은 인권위의 해산과 재구성을 정부에 요청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요컨대 경제5단체는 인권NAP 권고안을 계기로 9개월 만에 한 목소리 내면서 인권위 존재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셈이다.
***경영계와 인권위 간의 충돌, 일찍부터 예견돼**
하지만 이번 경영계와 인권위 간의 대충돌은 일찍부터 예견돼 왔다. 제2기 인권위는 출범 초부터 노동문제를 포괄하는 사회권적 기본권 개선에 적극적인 의지를 보였기 때문이다.
지난해 4월 취임한 조영황 현 인권위 위원장은 취임사에서 "사회권 분야의 인권개선, 정책·교육기능 강화를 통한 인권예방 시스템 구축" 등을 강조했다. 그는 또한 "노동자·빈민 등 사회 취약계층의 인권을 최우선으로 보호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인권위의 노동문제에 대한 발언의 정점은 지난해 4월 경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인권위의 '의견표명'이었다. 당시는 노·사·정이 비정규직 관련 법안 처리를 위해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던 와중이었던 만큼 인권위의 의견표명은 파장이 매우 컸다.
그 덕분에 인권위는 김대환 노동부 장관으로부터 "잘 모르면 용감하다", "단세포적이다"라는 비아냥까지 들어야 했다.
하지만 인권위의 의견표명은 노·사·정 협상에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노동계가 인권위 의견인 ▲'동일가치노동에 동일임금' 규정 도입 ▲기간제 근로 사용시 사유제한 규정 도입 등을 최저선으로 배수의 진을 치고 나왔기 때문이다.
***"노사관계 관여말라"…경영계의 솔직한 속내**
이처럼 비정규직 법안 협상과정에서 인권위의 '의견표명'은 경영계가 인권위의 존재에 대해 '긴장'하게 만드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인권위가 비록 '권고' 기능밖에 없지만, 사회적 발언력과 영향력만은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제5단체가 17일 성명에서 "노사갈등을 줄여나가기 위해서는 인권위가 더 이상 노사문제에 관여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한 것은 경영계의 가장 솔직한 속내를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임지봉 교수(건국대)는 이에 대해 "경영계에서 인권위 권고안이 자유민주주의적 질서를 흔들고 있다고 비판하지만 사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옹호하기 위해 자유민주주의란 개념을 끌어다 놓고 있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오늘날 인권위의 진정한 역할은?**
여하튼 경영계와 인권위 간의 충돌은 앞으로도 끊이지 않을 전망이다.
기업 경영에 있어 무제한적 자유와 권한을 누리려는 경영계의 속상상 '인권위 흔들기'는 불가피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인권 영역에서 가장 주요하게 다뤄지고 있는 부분이 자유권적 기본권과 더불어 노동문제를 포괄하는 사회권적 기본권인 만큼 인권위가 경영계의 압박에 쉽게 흔들릴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인권위가 사회권적 기본권 등을 외면할 경우 인권위의 존재 기반 자체에 대해 국민적 의구심이 불붙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특히 자본-언론-국가의 삼각 연계 속에서 '노동'이 고립돼, 비정규직 노동자가 전체 노동자의 절반을 넘어설 정도로 노동인권이 파탄난 상황이 아닌가? 인권위의 사회적 '균형추'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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