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거래소는 지난 1년여 간 조용할 날이 없었다. 표면적으로는 방만 경영 해소를 내세운 정부의 공공기관 지정과 이에 반대한 거래소의 움직임이 있었다. 거래소 이해관계자들은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다른데 있다고 입을 모은다. 정부의 '코드인사'가 그것이다. 정부가 입맛에 맞는 사람을 거래소 이사장에 선출하는데 실패하자 거래소 공공기관 지정 카드를 빼들어 이사장을 압박했다는 얘기다.
▲한국거래소는 작년 이후 가장 큰 폭으로 흔들리고 있다. 이 이사장의 퇴임으로 안정이 찾아올까. ⓒ연합뉴스 |
바람 잘 날 없었던 거래소
이정환 당시 경영지원본부장이 이영탁 전 이사장의 뒤를 이어 3년 임기의 거래소 신임 이사장으로 취임한 때는 지난해 5월. 이와 동시에 거래소 잔혹사가 시작됐다. 같은 달 14일 오전 9시경, 검찰은 거래소 부산 본부와 서울사무소를 동시 압수수색했다. 접대비 과다 지출 의혹이 이유였다. 지난 1956년 개소 이후 처음 일어난 사건이다. 3개월의 수사 결과 처벌 받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뒤이어 거래소 공공기관 지정 이야기가 나돌았다. 독점적 지위를 가진 거래소를 민간기관으로 둬서는 안 된다는 논리로 정부가 거래소의 비리를 샅샅이 파헤칠 것이라는 게 골자였다. 소문이 현실화하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난해 9월 감사원은 거래소 공공기관 지정을 정부에 권고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올해 1월 29일, 감사원 권고를 받아들여 거래소를 공공기관으로 지정했다.
정부가 내건 표면적 이유는 거래소가 독점적으로 향유하는 주식과 선물중개에 따르는 수입이 거래소 전체 수입의 절반이 넘기 때문에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상 공공기관 지정 요건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거래소가 시장감시기능을 수행(거래소 조직 내부에 시장감시위원회라는 자율규제기구가 있다)하는 등 공적 기능을 담당하는 조직인만큼, 공공기관으로 지정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정부는 강조했다.
곧바로 이번 정부 조치가 이 이사장을 겨냥한 것이라는 말이 나왔다. 때맞춰 지난 6월 8일부터 19일 사이 금융감독원은 5명의 검사요원을 파견, 예정에도 없던 검사를 실시했다.
지난 2005년부터 2008년 사이 거래소 사외이사를 지냈던 A씨는 "정부가 염두에 뒀던 사람이 작년 이사장 선출 당시 예심에서 탈락했다. 이 때문에 거래소 내외부에서 끊임없이 작년부터 계속된 정부의 압박을 '이정환 죽이기'로 보는 것"이라며 "정부가 독립 민간기업을 우습게 보고 있다. 완전히 관치금융시대로 되돌아갔다"고 한탄했다. 당시 정부가 내정한 인물로 지목된 이는 이팔성 현 우리금융지주 회장이다.
거래소는 시중 증권사 등 민간 금융기관이 지분 100%를 소유한 완전 민간기업이다. 자본시장통합법에 따르면 거래소 이사장은 사외이사 5명, 협회추천 2명,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유가증권시장과 코스닥시장 상장법인 대표 각 1명 등 총 9명으로 구성된 이사후보추천위원회의 추천을 받아 주주총회에서 선임된다. 정부가 간섭할 여지가 없다.
'좀비의 공습' 이어질까
이 이사장이라고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지난 5월과 6월, 두 차례에 걸쳐 직원들에게 보낸 경영자 서신에서 정부를 강도 높게 비난했다. 서신에서 그는 "여의도 금융가에 최근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다. 좀비들이 나타나서 어떤 회사를 점령하고, 선량한 사람들을 물어뜯으려 한다"고 했다.
'어떤 회사'란 당연히 거래소를 지칭하는 것이었고, '좀비'는 4월말 열린 임시주총에서 선임된 박상조 코스닥시장 본부장과 전영주 파생상품시장 본부장을 가리킨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거래소 노조는 이들 둘을 정부에서 내려 보낸 낙하산 인사로 꼽았다.
역시 전임 이사장 당시 거래소 사외이사를 지낸 권영준 경희대 국제경영학과 교수는 "낙하산 인사를 막기 위해 개혁적인 사외이사들이 그 동안 거래소를 나름 힘겹게 지켰는데, 이번 일로 이사회의 지배구조의 독립성마저 정부에 의해 훼손됐다"며 "정부가 이런 식으로 시장질서를 파괴하는 것은 심각한 외압"이라고 지적했다.
이 이사장은 사직서를 내면서도 공세적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그는 사직서에서 "저는 그 동안 한국거래소에 대한 정부의 공공기관 지정을 해제해 주시면 사임하겠다고 한 바 있다"며 "제가 사임함으로써 그 동안 정부 스스로 추진해 왔던 거래소 허가주의 입법이 조속히 국회에서 통과되도록 해주시고, OECD 회원국 중 유일하게 공공기관으로 지정된 한국거래소에 대한 공공기관 지정을 조속히 해제해 주실 것을 건의드린다"고 했다.
이는 애초 참여 정부 당시 자통법 추진의 핵심 사안 중 하나였던 '거래소 기업공개(유가증권시장 상장), 복수거래소 설립'이라는 정부의 원안을 정부 스스로 지키라는 요구나 다름없다.
일단 시기상으로는 그의 퇴진이 적절했다는 평가가 대다수다. 이미 정부는 물론, 노조에게서도 신뢰를 잃은 그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는 평가가 큰 데다, 국감을 앞두고 그가 물러남으로써 공공기관 지정 철회를 정부에 압박할 타이밍도 좋았다는 이유다. 노조 역시 이 이사장 퇴진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그의 퇴진으로 이번 논란이 끝나리라고 보기 어렵다는 평가도 나온다. 김성수 연세대 법학과 교수는 "그 자리는 원래 낙하산들이 가장 큰 관심을 보이던 곳 중 하나다. 침 흘리는 사람이 한둘이겠느냐"며 "거래소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 장막을 두르고 논공행상을 하는 꼴이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거래소는 서비스 공급자일까, 규제기관일까 비록 시장에서는 정부의 거래소 공공기관 지정이 낙하산 자리를 만들려는 시도로 해석하지만, 일견 정부 논리에도 타당한 구석이 있다는 평가 또한 있다. 거래소 측이 주장하는 '복수 거래소, 기업공개'는 오히려 효율성을 떨어뜨린다는 논리 역시 나름 타당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거래소의 성격을 어떻게 정의하느냐가 중요하다. 거래소를 회원사에 대한 서비스 공급자로 볼 것이냐, 규제기구로 볼 것이냐에 따라 거래소 성격을 이해하는 시각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먼저 거래소를 서비스 공급자, 즉 금융기관 동업자단체의 연합회로 본다면 증권 거래 공동망이나 마찬가지인 거래소를 공공기관으로 지정하자는 주장은 힘을 잃는다. 어디까지나 거래소의 주인은 거래소 지분을 가진 금융기관이지, 정부나 공공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당수 국가가 이러한 논리로 거래소를 공공의 감시 하에 두지 않는다. 반면, 거래소를 증권사가 상장사를 자율적으로 규제하는 기구로 본다면 공공의 논리가 힘을 받는다. 시장의 투명성을 높이고 특정 이해관계자에 유리한 방향으로 시장이 흘러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공공의 감시하에 두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두 가지 주장을 공격하는 논리 역시 강하게 성립한다. 무엇보다 한국거래소가 그 동안 정부의 낙하산 인사가 내려가는 논공행상 대상으로 전락해버렸다는 점을 우려하는 이들은 거래소 민영화를 강하게 주장한다. 거래소의 독점적 지위는 자통법 근거로 나온 '복수 거래소 설립을 통한 거래소 경쟁체제 도입, 기업공개에 따라 주주들의 감시 강화'로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이다. 거래소 공공기관 유지를 주장하는 이들은 자율규제와 공공규제가 양립하는 현 체제가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거래소가 경쟁체제에 돌입하고, 주주들의 감시 하에 이익극대화까지 추구하게 될 경우 규제의 하향평준화가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경쟁거래소에서 시가총액이 큰 기업을 빼오기 위해 공시기준을 완화하거나 황금주 등 특정한 룰을 만들 경우 시장의 투명성이 떨어질 수 있다고 그들은 우려한다. 즉, 경쟁체제로 돌입함에 따라 대표적인 자율규제기구(SRO)인 거래소의 특성상 규제기구(거래소)가 피규제자(상장사)의 이익에 봉사하기 위한 경쟁에 몰입할 수 있다는 얘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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