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참사를 두고 단 한 차례의 교섭도 없었던 것이 참사를 불렀다는 증언이 나왔다. 참사 당시 서울지방경찰청 정보계 소속이었던 A씨는 30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7부(한양석 부장판사) 주재로 열린 재판에 증인으로 참석해 이와 같이 진술했다.
그는 "(경찰이) 농성자와 대화를 시작한 지 하루도 안 돼 이들을 진압한 경우는 업무를 맡은 이후 처음 있는 일"이라며 "서로(철거민과 시공사)가 얘기를 해보는 과정이 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해 결과가 이렇게 됐다"고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A씨는 이와 같은 증언을 하던 중 감정에 북받쳐 약 5분간 재판장을 나가 있기도 했다. 한양석 부장판사는 "증인을 다그치거나 책임을 묻는 게 아니니 감정을 가라앉히고 당시 상황에 대해서 설명해달라"고 당부했다. A씨는 용산 참사가 난 직후 자진해서 서울지방경찰청을 떠났다.
A씨는 용산 참사 당일 날 망루에서 농성하던 철거민과 시공사 간 교섭을 주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농성 철거민과 시공사는 한 차례도 만나지 못한 채 경찰특공대가 투입됐다.
"교섭 시도했으나 농성자들이 경찰 병력 철수 요구해 무산돼"
A씨가 용산 참사를 처음 접한 건 19일 아침. 무전기를 통해 상황을 알게 된 그는 곧바로 용산 현장으로 이동했다. 그는 "현장에서 농성 철거민과의 교섭을 위해 철거민 관계자를 만났다"며 "하지만 경찰 병력을 먼저 빼달라고 요구해 교섭 자체가 이뤄지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 ⓒ노순택 |
검찰은 교섭이 이뤄지지 않은 이유를 놓고 "망루를 짓고 불법 농성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을 방치한 채 경찰 병력이 해산한 경우는 없다"며 농성 철거민이 경찰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면서 교섭 자체를 무산시켰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날 증인으로 나선 철거민 관계자 B씨는 "경찰 병력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에서는 교섭이 이뤄질 수 없다는 게 농성 철거민의 입장이었다"며 "교섭을 위해 망루 아래로 내려가면 곧바로 잡혀갈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망루 농성자는 누구보다도 협상을 원했다"며 "경찰 철수 요구는 협상을 무산시키려는 생떼가 아니라 교섭을 위한 기본 조건이었다"고 밝혔다.
"폭력 행사 위해 망루 오르는 게 아니라 살고 싶어서 오른다" 이날 재판에서는 철거민의 망루 농성을 놓고 검찰과 증인으로 참석한 철거민 관계자 B씨와의 간 날선 공방도 이어졌다. 검찰은 전국철거민연합 2008년도 자료집을 제시하며 "여기에서 철거민은 경찰과 용역을 적으로 간주하고 있다"며 "망루에 준비한 새총과 골프공 등은 이들을 저지하기 위해 준비된 시위용품"이라고 말했다. 검찰은 이어 "망루는 철거민에게 최후 보루로서 기간에 상관없이 자신의 목표가 달성될 때까지 투쟁을 하는 장소로 이용된다"며 "현행법을 따르지 않고 폭력을 쓰는 행위는 잘못된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망루에서 농성을 하다 연행된 28명의 농성자 중 세입자는 6명뿐인 것으로 확인됐다"며 당사자가 아닌 외부세력이 개입돼 망루 농성이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증인으로 참석한 철거민 관계자 B씨는 즉각 반발했다. 그는 철거민이 망루를 짓는 것을 두고 ""불안하니깐 모여 살기 위해서 짓는 게 망루"라고 설명했다. 그는 "세입자는 개발이 시작되면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한다"며 "용역에게 폭행 당히기 일쑤고 아이들도 마찬가지"라고 밝혔다. 그는 "철거민이 폭력을 행사하려고 망루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망루를 짓고 그 안에 들어간다"며 "추운 겨울에 누가 그런 곳에 있고 싶겠는가"라고 반문했다. B씨는 "다들 처음 망루에 오를 때는 요구안이 관철돼 평화롭게 내려오겠지 하는 생각을 하고 올라간다"며 "하지만 그것이 한 달이 되고 반년이 되고 1년이 되는 게 현실"이라고 밝혔다. B씨는 "나 역시 1995년도에 전세로 살던 집이 재개발 된 뒤 철거민이 됐다"며 "개발만 없었다면 다른 엄마처럼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며 평범하게 살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꾸 외부세력이 망루 농성에 개입됐다고 하는데 철거민은 이러한 서로의 아픔을 잘 알고 있기에 삼삼오오 모이는 것 뿐"이라며 "아픔을 서로 나누기 위해 서로 돕는다"고 설명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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