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참사가 일어난 지 100일이 훌쩍 넘은 지금에도 현 정부나 시당국의 책임 있는 누구도 책임 있는 발언을 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여전히 이 참살 사건의 원인과 모든 책임을 당사자와 가족들에게 돌리며 적반하장 격으로 물적 배상을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십년 전에 먹은 음식물조차 토하고 싶을 만큼 분노가 치민다. 평생을 법 없이 살아온 선량한 시민들이 단순히 세입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순간에 삶의 기반이자 뿌리를 송두리째 뽑히자, 법에 호소할 여유도 없고 시 당국에 애원해 보아야 소용도 없는 처지에서 하늘과 땅이 꺼지고 눈앞이 막막 깜깜한 심정에서 망루에 올라 자신들의 처지를 세상에 알리고자 한 이들에게, 숨 돌릴 시간의 여유조차 허용하지 않은 채, 시너 불에 태워 죽인 사태를 대하면서 내 자신 현 정권의 무능함에 대해, 투기자본들의 끝없는 탐욕에 대해, 지배언론들의 잔혹함과 무감각함에 온 몸이 떨리는 분노를 느낀다. 참으로 못나고 나쁜 정부이다.
▲ 용산 참사 희생자 영정 앞에 켜진 촛불 ⓒ용산철거민 참사 대책위 홈페이지 |
그리고 지대 추구를 근본적으로 제어하는 가장 이상적 자산세인 종합부동산세를 무력화시킴으로써 당연한 결과지만 버블세븐 지역을 중심으로 다시 부동산 투기가 일고, 집 없는 가난한 서민들을 길거리로 내모는 광란의 전세 값 폭등이 이어지고 있다. 급한 불을 끈답시고 그린벨트를 해제하여 값싼 아파트를 공급하느니, 다양한 공공임대주택 조건을 제공하느니 부산을 떨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투기적 가수요와 천민적 개발이익을 차단하지 않는 한, 상황은 개선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먼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불붙는 집에 기름 붓는 격의 참으로 생각 없는 소인배들 정책이다. 이 땅의 공직자들이여, 정치인들이여, 미국 국민들이 성경책 다음으로 많이 읽었다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던,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을 한번이라도 읽어 보고,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제발 이 땅의 가난한 서민들을 생각하면서 부동산 정책을 기획하고 집행하길 진심으로 권한다. 죽어가는 종합부동산세를, 이름을 바꾸어도 좋으니, 조금만 보완해서 제발 원상 복귀시키기를 간절히 요청한다. 그리고 이제부터 필자가 소개하는 후가라이의 이야기를 평생 가슴에 깊이 간직하기를 권한다.
후가라이는 인류 역사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최초의 공공임대주택의 이름이다. 후가라이가 위치한 지역은 독일 남부 도시 아우구스부르크의 중심가이다. 아우구스부르크는 뮌헨에서 급행열차로 40~50분 거리에 있는 인구 30~40만 명의 규모로 독일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의 하나이다. 로마 전성기의 황제 아우구스티누스가 로마 국경을 괴롭히는 바바리안(야만)족들을 격퇴하기 위해 직접 군부대에 친영하여 머물렀다는 뜻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15세기부터 이 도시는 르네상스와 상업주의 시대 하에 이탈리아와 유럽 대륙을 연결하는 문화 전파와 상업의 거점이 되면서 큰 부자들이 생겨난다. 후가(Fugger) 집안도 이들 중의 하나로 베니스를 통한 중계무역으로 돈을 크게 벌어들이고 다시 금융업으로 남부 유럽의 거부로 성장하여 합스부르그 제국에 재정 후견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이후 신성로마제국의 든든한 재정지원자로 성장한다. 이들 가문의 계승자인 야곱 후가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 금욕적이고 이타적인 전통을 가진 베네딕토 수도원과 무소유자인 성 프란체스코 수사 등의 이야기에 큰 감동을 받고 사회사업을 하기로 결심한다.
1516년 경 마침 아우구스티누스가 묶었다는 군영지가 도시 중심에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그는 이를 매입하여 15~16평의 소규모 아파트를 100여 채 빌라 형태로 지어 당시의 최소 통화 단위인 라인굴드(현재 1달러 수준)를 1년 임대료(월 임대료가 아님)로 책정하여 도시 내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거 공간으로 제공하였다. 중세 판 빌 게이츠인 셈이다. 입주 조건은 단지 게으르지 말 것과 매일 성당에서 후가 집안을 위해 기도를 하는 것뿐이다.
이 전통은 500년 가까이 지난 2009년 현재에도 그대로 계승 유지되어 지금도 1년 임대료로 1유로가 안 되는 돈을 받고 있다. 군수산업의 중심지였던 관계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아우구스부르크도 많은 폭격을 받게 되어 후가라이도 심하게 망가졌으나 시 당국의 결정과 시민들의 협력으로 147채의 아파트를 재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후가라이라는 이름은 시민들 모두에게 500년 역사 속 상호부조와 시민연대의 자랑스러운 대명사가 되었다.
▲ 독일 남부 도시 아우구스부르크의 중심가에 있는 후가라이 풍경. 후가라이는 역사상 최초의 공공임대주택으로 꼽힌다. |
이후, 후가라이의 정신은 유럽에서 공공임대주택의 산역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독일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쳐 부동산 투기라는 개념이 대단히 부정적이고 생경하게 들린다. 1998년 이후 미국과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부동산 투기가 일어나 최근 경제위기가 오기 전까지 영국, 스페인 등에서는 집값이 두 배, 세 배까지 폭등하였다가 이제 폭락의 과정을 겪고 있다고 한다. 수많은 중산층들이 부동산에 투자했다가 졸지에 파산하고 빈민으로 전락하고 있는 중이라 전해진다.
많은 전문가들은 상기의 영국과 스페인 등 부동산 투기 열풍을 방기한 국가들에서 이후 국민경제가 장기간에 걸쳐 대단히 어둡고 우울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는 이미 우리의 이웃 나라인 일본이 겪은 바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공공임대주택 정책이 확고히 뿌리를 내린 독일과 북유럽 국가들은 최소한 부동산과 주거의 문제에 있어서는 노아의 방주같이 안락함을 즐기고 있다.
부동산과 주거의 문제를 이명박 정부처럼 시장 중심적 시각으로만 해결하려 든다면, 가난한 백성들의 피눈물을 짜내면서 한국경제는 장차 1년을 넘길 수는 있겠으나 백년을 앉은뱅이로 고통 받게 될 것이다. 이제는 경세(經世)에 앞선 제민(濟民)을 강조하고 먼저 생각해야 할 시점이다. 공공주거의 개념 등 제민정책을 통해서만이 한국경제를 백년의 태평한 반석 위에 올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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