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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다황, 자연의 땅에서 사람의 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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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다황, 자연의 땅에서 사람의 땅으로

[르포] 베이다황, 중국의 거대한 식량창고②

베이다황은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유목민 일부를 제외하고는 사람이 살지 않던 거대한 초원이자 숲, 습지대였다. 하지만 인민해방군 부참모장이던 왕젠(王震) 장군의 주도하에 1940년대부터 수십만의 사람이 이곳을 농토로 개간했다. 국가 주도의 역사가 그대로 남은 까닭에 지금도 베이다황집단은 중국 정부의 농간총국 산하 국영기업이다.

중국 정부가 동북방 변두리를 농토로 주목한 이유는 이곳이 헤이룽강과 우수리(Ussuri)강, 쑹화(松花)강 등 세 강이 만나는 천혜의 조건을 가졌기 때문이다. 러시아 국경과 가까워 많은 사람의 거주가 필요하다는 정치적 요인도 고려한 듯 보인다.

▲붉은색 원형 지역이 베이다황이다. 지도는 구글맵스에서 따왔다. ⓒ구글맵스

자연의 땅을 사람의 땅으로

베이다황에는 1, 2급 보호종 야생동물 150종이 서식한다. 사람의 시각으로는 아무 곳에도 쓸모없는 황무지를 금싸라기 땅으로 개발했다 할 수 있지만, 동물의 입장에서는 천연의 자연보고가 사라진 셈이다. 우리라고 쉽사리 비판할 수 있을까. 새만금의 동물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인간의 무자비한 공격을 받아 사라지고 있다.

베이다황 개간의 역사는 멀리는 진(秦)·한(漢)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정주민이 유입되기 시작한 때는 청(淸)대부터다. 강희제(康熙帝) 때 러시아인들이 헤이룽강 유역에 자주 침입하자 청나라 조정은 이곳에 병참을 세워 수비를 강화했다. 특히 건륭 56년(1793년), 화북지방에 가뭄이 심해지자 많은 사람들이 이를 피해 베이다황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1940년대만 하더라도 이곳은 여전히 정착민이 살기 힘든 대초원이었다. 나라의 법과 제도는 야생이나 다름없는 이곳에서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다. 사람보다 승냥이가 자주 보이는 곳이었고 유목민과 러시아 혹은 일본군과의 크고 작은 전투가 끊임없이 이어지던 곳이었다. 헤이룽강 기슭의 바크하룬 초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대만의 원로작가 메이지민(梅濟民)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고한 1979년작 <북대황>에서 강이 얼어붙는 겨울의 베이다황을 이렇게 얘기했다.

"… 그리하여 러시아인들은 기탄없이 아무 짓이나 마음대로 했다. 그들은 빙설을 밟으며 흑룡강과 우수리강을 넘어 중국에 들어왔다. 그리고는 목장을 강탈하고 농장을 불사르고 여인들을 빼앗아가고 삼림을 도벌하고… (중략) … 이런 까닭에 북부 국경선의 겨울은 빙설과 싸우고 러시아인들과 싸우는 전투의 계절이었다."

▲왕젠 장군. 베이다황 개척을 진두지휘했다. 박물관에 전시된 사진을 손문상 기자가 근접촬영했다. ⓒ손문상
본격적인 개간은 중화인민공화국 탄생 후 이뤄졌다. 마오쩌둥(毛澤東) 국가 주석은 지난 1947년, 농촌 출신 왕젠 장군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곳을 식량기지로 본격 개발하기 시작했다.

초기 개척은 군인들의 몫이었다. 50년대 들면서 인민해방군 15개 사단을 통합한 인민해방군 제97사단의 군인 10만여 명이 목숨을 바쳐가며 이곳을 인간의 땅으로 만들어나갔다. 1976년까지 이곳에서 질병이나 사고로 죽은 사람은 1만 명이 넘는다. 소련의 도움으로 1954년, 드디어 농장이 본격 개간되기 시작했다. 중국 정부는 이듬해 8월 개간팀을 본격 파견했다.

인민해방군은 만들어지는 농장마다 마치 군부대처럼 이름을 붙여나갔다. 현재도 291농장은 당시 이름 그대로 남아 있다. 82세가 되던 1990년, 왕젠 장군은 자신의 평생을 바친 베이다황에 마지막으로 방문해 "국가를 위해 100억근 쌀과 고기를 생산하도록 분투하자"라는 글을 남겼다.

눈물의 개발사 거쳐 기업화하기까지

문화혁명기에 접어들면서 개척은 '지식청년'들의 몫이 됐다. "지식청년은 농촌에 가서 빈한한 농민에게 재교육을 받으라"는 마오쩌둥의 지시 아래 총 267만 명의 지식청년이 전국 각지로 흩어졌다. 1976년까지 54만 명이 넘는 지식청년이 베이다황을 거쳐갔다. 이들 중에는 제11대, 12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를 지낸 후야오방(胡耀邦)도 있다.

당시 지식청년들은 매일 같이 새벽 3시에 기상해 하루종일 노동하는 고된 삶을 이어갔다. 이 힘든 시기와 특수한 환경이 이른바 '베이다황 정신'을 낳았다. 베이다황 정신이란 '어려움을 이겨내 분투하고, 용감하게 개척하며, 전체적인 상황을 고려하고, 개인을 없애고 봉사하자'라는 말로 요약된다.

하얼빈 시내 베이다황국제반점(호텔) 옆에 위치한 베이다황박물관에는 커다란 글씨로 이 말이 요약돼 있다. 베이다황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왕위란(王玉蘭) 하얼빈사범대 부총장은 "베이다황 출신자들의 모임이 지금도 활발하다"고 말한다.

▲베이다황박물관 내부에 전시된 작품 '베이다황 사람들의 노래'. 실내 석판으로는 중국 최대 규모다. 138명의 주인공이 등장하고 32가지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손문상

80년대 접어들면서 기계화 농업 방식이 본격 유입됐다. 미국과의 해빙기를 맞이한 중국은 미국의 첨단 농기계를 수입해 베이다황의 생산량을 늘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과학화를 위해 농간과학원을 설립, 농업 전문 기술요원을 육성했다. 국가 주도의 현지 개간이 일반 농민 임대로 이어진 것도 이 시기이다. 마침내 2002년, 베이다황집단은 상하이 증시에 상장하며 적어도 겉으로는 지금의 주식회사 형태를 완성했다.

베이다황집단은 현재 △농업 △식품·화학 △물류 △부동산·건설 등 크게 네 분야의 자회사들을 거느리고 있다. 식품부문에서 나오는 상표만 33가지에 달한다. 베이다황의 재배지는 크게 9개 분국, 113개 농장으로 나뉜다. 각 분국마다 기술요원이 파견돼 농민들의 일을 돕는다.

개발이 낳은 것들

후야오방 전 총서기 외에도 베이다황이 낳은 유명인이 많다. 상징주의 시인으로 유명한 아이칭(艾靑), 중국 바둑계의 기린아 섭위평(聶衛平), 토지개혁적 성격의 소설 <태양은 쌍간에서 빛난다>를 쓴 여류작가 띵링(丁玲)이 이곳을 거쳐갔다. 띵링은 1957년 반우파 투쟁 당시 이곳으로 유배돼 12년간 노동했다.

워낙 본토와 떨어져 오랜 기간 힘든 나날을 보낸 곳이기에 자체 예술도 발달했다. 베이다황의 삶을 그린 영화는 9편 이상 만들어졌다. 자체 방송국과 신문이 지금도 활발히 지역 소식을 전하고 있으며 공연단 등도 유명하다. 특히 중국 판화의 중요한 흐름을 차지하는 판화예술이 지역의 자랑이다. 차오메이(晁楣)는 베이다황 판화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개척은 풍부한 식량자원을 중국인들에게 제공했다. 적어도 이 지역 일대 농민들의 생활 수준은 확실히 올라가고 있다. 베이다황집단에 투자한 주식투자자 일부 중에는 소위 말하는 '대박'을 터뜨린 이도 있을 게다.

하지만 부작용도 많다. 먼저 환경이 파괴됐다. 시허빈 베이다황농업고분공사 총경리는 "삼강평원은 지난 2000년을 마지막으로 개발을 중단했다. 현지는 물론, 한국과 일본의 기후에까지 (개발이)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라고 말했다. 자연히 동물들은 사라졌다.

야생동물들이 살아갈 터전이 파괴되면서 지역에 전통적 삶을 영위하던 사람들도 크고 작은 변화를 감내해야했다. 가장 큰 부작용은 인근 소수민족이 절멸 위기에 빠졌다는 점이다.

▲베이다황을 끼고 흐르는 헤이룽강(黑龍江). 강 너머는 러시아다. 이곳은 겨울이 되면 완전히 얼어붙는다. ⓒ손문상

대표적인 사례가 허저족(赫哲族, 러시아어로는 나나이족)이다. 현재 중국에는 약 4600여 명의 허저족이 있다. 56개 소수민족 중 가장 적은 수다. 이들은 과거 헤이룽강 유역에서 수렵과 어로로 생계를 이어왔다. 지역 특산물인 황어를 잡아 황제에게 바치고, 물고기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고, 야생짐승의 가죽으로 추위를 견뎠다. 대자연이 주는 선물이 사라지면서 이들 대부분은 관광업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초원 특유의 끈끈한 정 역시 앞으로 사라질 지도 모른다. 농촌개발은 달리 말하면 '중국식 자본주의'의 새로운 시험대라는 뜻이기도 하다.

과거 이 곳에서는 사람을 보기 힘든 현지의 특성과 혹독한 추위로 인해 극진한 손님맞이 풍습이 이어져 왔다. 메이지민의 <북대황>에 나온 다음 구절은 지금과는 사뭇 다른 옛 풍습을 보여주고 있다.

"행상대가 오기 전에, 목장들은 미리 그들을 맞을 준비를 한다. 여인들은 집 안팎을 말끔히 청소하고 아이들에게는 새 옷을 입힌다. … (중략) … 행상대가 방문하면, 거의 모든 목장 사람들은 행상대에게 간곡히 부탁하여 적어도 하루를 자기네 목장에서 묵게 한다. … (중략) …풍성한 송별잔치가 아침식사로 끝나면, 상인들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낙타의 고삐를 잡고 또 길을 떠난다."

베이다황은 아직도 개발 중이다. 인공의 힘은 겨울이 되면 지하 2m까지 얼어붙는 이 동토의 땅에 벼와 포도가 자라도록 만들었다. 새로운 혜택이 나왔고, 그만큼의 부작용도 생겼다. 앞으로 이곳은 또 어떻게 변화할까. 자연을 밀어내고 이 땅의 주인이 된 사람에 달렸다.

▲베이다황에는 아직 미개척지가 많다. 환경에 미치는 영향 때문에 앞으로 개발 규모는 점차 줄어들 예정이다. ⓒ베이다황집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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