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을 비롯한 경영진 인사는 물론이고 MBC의 위상과 방향까지 결정한다. 지난 10일 <시사인>이 여론조사기관 '미디어리서치'에 의뢰해 전국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전화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가장 신뢰하는 매체로 문화방송(MBC)이 선정됐다. 향후 그 신뢰도를 유지하면서 양질의 콘텐츠와 공정성있는 보도를 유지하려면 방문진 이사구성은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방통위의 방문진 이사선임은 내부 구성원의 공감을 얻지못해 지난 11일에는 조간 신문마다 문화방송 최대주주인 방문진 이사들의 출입을 막는 문화방송 노조원들 사진이 일제히 실렸다.
방송국 이사라는 자리가 매달 수백만 원에 가까운 월급과 수당이 있어 과거에도 정권의 전리품으로 나눠먹기, 코드 인사는 어느 정도 관행이라 했고, 이번에도 이사 9명에 119명이 지원서를 냈다고 하니 그 열기가 짐작이 된다. 그런데 방문진 이사 선정 결과 발표 후 내가 깜짝 놀란 일은 내가 이사로 선정되지 않은 것 때문이 아니라 9 명의 방문진 이사 중 여성이 한 명도 없었다는 점이다. 지난 정부에서 여성 총리가 나오고 한국 사회에 여성 파워가 서서히 커지는 요즘 같은 세상에 방문진 이사 중 여성 이사가 한 명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2006년 방문진 이사회에는 김정란 상지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와 이옥경 <미즈엔> 대표가 여성 부문을 대표해 이사로 임명됐다. 또 KBS 이사회 역시 같은 해 경제·경영 부문을 대표해 이지영 공인회계사와 여성 부문을 대표해 이춘호 한국자유총연맹 부총재, 남윤인순 한국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가 이사로 임명됐다.
제 아무리 코드인사라 해도 방송국이라고 하는 공공적 성격의 기관을 운영하는 이사진에는 당연히 여성이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다. 세상의 절반이 여성이라는 해묵은 진리를 되뇌일 필요조차 없다. 철저하게 힘의 논리에 따라 나눠 먹기식으로 구성되었다는 방문진 이사진에 여성이 실종된 까닭은 무엇일까? 이명박 정부의 대답이 궁금하다. 여성이라 해서 다 갈등을 해소하고 평화적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지난번 언론악법 통과 시도 때 민노당 이정희 의원의 사지를 낚아챈 의원들도 다 여성 국회의원인 것을 보면 그들도 다분히 폭력적이고 철저하게 이해관계에 복무하는 것이지만 적어도 남녀 균형은 맞추어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이번 방문진 이사구성은 노골적인 이해관계 중심이며 남성편중 사례일뿐 아니라 이명박 정부의 여성관, 여성할당제의 허울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이다.
▲ 방통위의 방문진 이사선임은 내부구성원의 공감을 얻지못해 지난 11일에는 조간 신문마다 문화방송 최대주주인 방문진 이사들의 출입을 막는 문화방송 노조원들 사진이 일제히 실렸다. ⓒ프레시안 |
김대중 정부 집권 이후 청와대는 정부기관의 각종 위원회에 연령과 여성할당제를 강력하게 주문했고 실무진은 때로는 울며 겨자 먹기로 이 규정을 적용했지만 결과적으로 자연스럽게 물갈이도 되고 각종 위원회 분위기가 일신되어 활성화되는데 기여했다. 각종 위원회마다 적극적이고 창의적인 여성들의 참여에 힘입어 서로 윈윈하는 결과를 가져온 경우도 많았으므로 그런 원칙이 무너지리라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들어 단번에 깨진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시대정신에 역행한다'는 평가가 괜한 것이 아니다.
나는 지난 20년간 시민운동을 하며 많은 여성들을 만났다. 그 여성들은 전문직 여성이건 시민단체 관계자, 대학교수이건 간에 그들중 대부분이 전문성을 지니고, 합리적이고 한국사회에 대한 애정을 지니고 있었다. 오래 전 내가 EBS 시청자위원에 참가했을 때 만난 여성들도 전문성과 소통력이 뛰어났다. 그 여성들이 나의 의견과 늘 같은 것은 아니었으되 그녀들이 한국 방송 문화 발전에 기여할 것임은 분명했다. 그러나 요즘은 그 여성들마저 설 곳을 찾지 못한 채 자취를 감추었다.
현대 사회에서 여성의 파워는 점점 더 커지는 현실이고 한국 사회 방송 영역 역시 여성들이 방송에서 소비자로서 생산자로서 차지하는 역할이 크다. 내게 교육 문제 인터뷰를 위해 전화를 하는 수많은 방송국의 구성작가들은 전부 여성이다. 내가 만나는 기자의 절반도 여성이고 방송 모니터나 미디어 쪽 내노라 할 만한 활동가들에도 유독 여성들이 많다. 더구나 방송 소비자로서 요즘같이 경제 불황인 시기에 우리가 지친 일상에서 헤어나 잠시나마 휴식을 취하고 싶을 때 우리는 가장 손쉽게 TV와 방송에서 휴식과 위로를 찾는다.
광화문 광장에 내방객이 100만 명을 넘어선 것은 방송의 영향력을 단적으로 증명한다. 전체 국민 대부분이 방송이 하라는 대로 하고 먹고 생각하고 발설하는 것이다. 이렇게 TV는 현실을 대변하기도 하지만 그 이외에 우리는 다른 것도 기대한다. 지친 삶을 사는 여성들에게 다람쥐 쳇바퀴가 아닌 삶, 정신의 고양을 통해 풍요한 삶,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 소박한 삶, 행복한 삶을 위한 다른 가치, 새로운 경로를 제시하는 역할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여성들은 방송이란 매체를 포기하지 않고 '방송 잘 만들라'며 늘 훈수를 둔다.
여성들의 철학과 활동 방향에 따라 대한민국의 흥망이 흔들릴 것이다. 그녀들이 민주시민의식을 가져야 자신도 2세 교육도 건강하게 유지할 것이다. 그러나 언론 악법 통과로 이러한 최소한의 기대마저도 좌절될 위기이다. 서울 강남 지역의 예쁘고 똑똑한 사모님들이 점차 강퍅해지는 것이다. 공동체고 뭐고 가족이기주의를 넘어서 과잉경쟁, 승자독식의 논리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인 결과이다.
솔직히 언론의 영향이 크다. 위의 <시사인> 조사결과 어느 매체를 가장 불신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선 <조선일보> 34.2%, <중앙일보>20.8%, <동아일보> 18.9% 순으로 조중동이 나란히 1~3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최근 <경향신문> 특집에 '한국 사회, 소통합시다'에서 불통의 첫번째 당사자 청와대에 이어 두 번째로 지목된 보수 언론은 그동안 육하원칙에 따른 최소한의 사실 보도도 외면해왔다. 촛불이 서울 시내를 뒤덮어도 그들 언론이 보도를 안하거나 축소하면 촛불은 볼품이 없이 전락했다. 그 신문 독자들에게 그 어제 촛불이 켜진 이유와 장면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반쪽의 진실, 진실의 왜곡과정을 손쉽게 거치는 것이다.
그 결과 서울 강남지역의 예쁘고 똑똑한 사모님들과 그들의 젊고 유능한 자녀들은 그네들이 선택한 언론사의 기사를 절대 신봉하고 있다. 더구나 그 여성들이 다 머리가 좋다보니 아침 조간신문에서 읽은 OO일보 기사를 마치 자기 생각인양 줄줄 외운다. 그녀들은 반모임, 골프모임, 점심 모임에 나와서 계속 그 기사를 퍼트린다. 이는 지난 6~7년 동안 그 경향이 더 심해져서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후 김모 교수의 말을 마치 자기 생각처럼 줄줄 말하는 사모님도 늘어나 서로 좋았던 관계가 정치적 견해로 인해 갑자기 서먹해지고 동네 미장원에서도 정치논쟁이 일어나기도 한다. 남과 북만이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강남에서도 OO일보 구독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들의 인식이 다르다. 지난해 7월말, 서울시교육감선거 마감시간을 몇 시간 앞두고 일으킨 강남 사모들의 반란표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앞으로 일부 신문사의 편향 보도가 방송으로 이어질 경우 내가 사랑하는 강남 사모들은 물론이려니와 강남 지역 이외의 전국의 여성들의 가치관과 정치관, 시민의식은 심한 불균형 상태에 빠질 것이고 절반의 진실만을 주장할 것이다. 경중은 다르지만 일부에서는 이러한 사례를 히틀러 정권 치하에서 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언론을 장악한 나치의 선전상 괴벨스 사례와 비교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를 치유하려면 많은 고통과 시간이 흐를 것이다.
방문진 이사선정에 이어 8월에는 KBS 이사선정이 뒤따른다. 지금 이 시간에도 각 정당과 단체들과 개인은 자천타천으로 이사 선정에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물밑 전쟁을 치르고 있을 것이다. KBS 이사의 자질도 방송의 민주화와 양질의 콘텐츠, 다양성을 원칙으로 해야하고 자본의 탐욕으로부터 방송의 공정성과 공익성을 지켜내는 것은 기본으로 삼아야한다. 여성 참여도 당연한 것이다. 그 이후에 코드니 뭐니 이해관계를 따지는 것이 순리이다. 특히나 요즘처럼 언론악법이 문제가 되고 방송 통제와 자본의 욕구, 민영화등이 사회 현안인 것을 감안하면 정치와 시장 논리로부터 독립되어 민주성과 다양성을 근본으로 평화와 돌봄과 공존을 추구하는 여성적인 에너지가 필요하다. 하긴 공존, 평화의 에너지는 이사진에 참여하는 모든 남성들에게도 요구되는 덕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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