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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 vs 장기하 (上) 그들은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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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서태지 vs 장기하 (上) 그들은 닮았다?

[나도원의 '대중음악을 보다'] 높아지지 않았다. 높'여'졌다.

서태지의 새 앨범과 '장기하와 얼굴들'의 데뷔앨범

"서태지의 새 앨범이 차트를 점령했다. 팬들을 음반을 사려 긴 행렬을 만들고, 비평가와 기자들은 앞 다투어 분석을 쏟아내고 있다."

아무래도 이런 성대한 환영기사를 다시 보긴 힘들어 보인다. 서태지의 여덟 번째 앨범 [Atomos]는 잔잔한 미풍을 타고 조용히 항해 중이다. 더 이상 장식장을 채우기 위해 새로운 트로피를 가져갈 필요가 없으니 섭섭해 하진 않을 것 같다. 재미있는 것은 주류 음악에 호의적이었던 집단이 서태지의 신작을 음악적으로 비판하는 것과 달리, 비판적 태도를 유지했던 그룹이 오히려 호평하고 있다는 정도이다.

▲서태지의 새 앨범 [Atomos] ⓒ예당엔터테인먼트
격한 반응은 엉뚱한 구멍에서 흘러 나왔다. 앞서 발표한 두 장의 싱글에 실린 곡들을 제외하면 새로운 노래는 달랑 둘뿐이다. 이례적인 싱글과 앨범의 구성이고, 결과적으로 세 번째 싱글의 확장버전일 뿐이라는 볼멘소리가 들린다. 싱글들을 예고편으로 생각하며 전모를 궁금해 한 이들은 허망해 하거나, "이럴 줄 알았다"고 하거나, 그도 아니면 "대장이 하는 일이니 지지한다"로 갈린다. 어쨌든 'Human Dream'의 노랫말, "난 더 이상 못 들어, 똑같은 노래를/ 똑같은 표정으로, 두 번 다시"를 누가 불러야할지 모를 상황이긴 하다.

달력을 몇 장 뒤로 넘겨본다. 정규앨범을 내기도 전에 싱글과 공연, 방송과 인터넷을 통해 높이 떠오른 어느 신인 밴드는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사고 있었다. '장기하와 얼굴들'은 활동을 시작한지 1년도 되지 않아 전국구 스타가 되었고, 인기투표에서 태양(빅뱅)과 접전을 벌여 이기기까지 했다. 비록 반아이돌 정서와 인터넷 커뮤니티의 활동성이 개입된 듯 하나 무언가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이어 음악시상식에서 트로피를 3개나 가져갔다. 장식장을 채웠는지, 베란다에 누워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곧이어 대학교 선거운동에 '미미시스터즈' 복장이 등장했다는 목격담까지 전해졌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정규앨범 [별일 없이 산다]는 이러한 인기의 근거와 본의 아니게 '인디의 대표선수'로 호명된 처지에 대한 검증이 될 수밖에 없었다. 누구 말처럼 단지 비수기에 거둔 일시적 성공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딴따라질'이 가능한 뮤지션으로 인정받아야 했다. 다행히 진짜 앨범이 별로라면 '미미 시스터즈'가 덤블링이나 불쑈라도 해야 되지 않을까 했던 걱정은 기우였다. [별일 없이 산다]는 나쁘지 않았고, 장기하는 별일 없이 살지 않고 있다. 싱글이나 EP로 활동을 하다가 정규앨범을 내는 것은 해외 음악계에선 전통적인 수순이고 한국에서도 일반화되었는데, 이처럼 서태지와 장기하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그의 새 정규앨범을 놓고 논란은 끊이지 않는다. ⓒ서태지 홈페이지

그들의 공통점, 전복의 쾌감과 오해

둘을 나란히 놓고 말하는 것에 격분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활동경력이 20년이나 되는 서태지와 신인급 인디뮤지션 장기하를 비교하는 것이 격(?)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 둘은 같지 않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다르지 않다'의 전모는 나중에야 드러나겠지만, 그들 사이에 유사점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서태지와 장기하 모두 주체적이었다. 서태지는 '시나위'의 베이스 연주자를 거쳤고, 장기하 역시 록 밴드 '눈뜨고코베인'의 드럼 연주자로 먼저 활동했다. 자기 팀을 만들면서 선배 프로듀서의 도움을 받지도 않고 나름의 경험과 연구로 거쳐 자기작품을 쓰고, 기획사시스템과 가드레일 밖에서 음악적 주도권을 쥐고 자신의 그룹과 밴드를 이끌었다.

또한 '서태지와 아이들'과 '장기하와 얼굴들'은 이름과 형태뿐만 아니라 공히 대중, 혹은 일부 수용자들에게 전복의 쾌감을 선사했다는 점에서 같다. 확실히 개구쟁이 이미지의 서태지와 의뭉스러운 동네청년 풍의 장기하는 새로운 욕망을 확인시키며 어떤 '상상도'를 그려주었다. 그림의 크기나 모양은 다르더라도, 화가 나서 쓰레기통을 걷어차고선 쪼그리고 앉아 널 부러진 쓰레기를 다시 주워 담는 소심한 이들에게 대리분출의 대상이었다.

덕분에 서태지는 신세대의 아이콘이자 문화담론의 커리큘럼이 되었다. 서태지를 재발견하기에는 너무 많이 파악되었고, 다시 파악하기에는 너무 많이 노출되었다. 역사 속 인물의 일면이 시대의 필요로 후대에 유난히 강조되는 경우가 있는데, 당사자들에겐 억울할 수도 있는 일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장르를 창출하는" 식의 무의미한 홍보문구와 어느 매체에 실렸던 [Atomos Part Secret]에 대한 야박한 평가를 삭제시키는 따위의 자해성 매니지먼트를 못 본 것으로 한다면, 서태지에게도 억울한 면이 없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2007년 말, 서태지의 컴백이 알려지자 대중음악계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거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두 가지 면에서 오판이다. 겉보기와 달리 당시 대중음악은 내용적으로 침체되어 있기는커녕 새로운 움직임과 양질의 작품들이 쏟아지고 있었고, 대형스타가 나타나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시대도 이미 지나고 있었다. 공교롭게 그 무렵부터 다시 음악이 공통의 화제가 되었으나, 그 활기를 서태지가 만들지는 않았다. 공통의 화제였던 영화가 2006년부터 평균제작비도 감소하는 하강기에 맞물렸다고 해서 전적으로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서태지는 그 한 조각으로 맞물렸을 뿐이다.

장기하 역시 서태지처럼 높아진 것이 아니라 높여졌다. 날이 더워지면서 좀 식긴 했지만, '장기하 신드롬'을 '인디 신드롬'으로 연결시키거나 주류와 비주류의 격돌로 보는 해석은 성급했다. 특히 장기하가 인디 붐의 물꼬를 텄다는 것은 심각한 오도이다. 좋아하는 책이 뭐냐는 질문에 <걸리버 여행기>라고 답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나같이 웃거나 반응이 없었다. <걸리버 여행기>가 실은 어떤 책이라고 모두 알고 있어서라고 확신했다. (물론 농담이다.) 이런 식으로 눈 감고 코끼리 더듬는 식의 리포트가 나왔고, 그에 대한 반발로 코끼리 꼬리를 쥐고 흔들며 대응하는 일이 벌어졌다. 모두 쉬지 않고 누워있거나 부지런히 자면서 인디음악의 현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고백했을 뿐이다. 결의에 찬 표정으로 칼집을 내던진 장수처럼 용맹하게 칼을 휘둘러 잡초나 벤 셈이다.

<워낭소리>가 크게 울리고 <똥파리>의 날갯짓이 거세다고 독립영화, 나아가 한국영화 부흥의 신호라고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더구나 인디음악 붐은 그 반대의 과정을 거쳤다. 십여 년의 역사와 제반 상황을 통하여 인디스타들이 배출되기 시작했다. 장기하 열풍은 방아쇠가 아니라 탄환이나 탄피다. 그래서 사려 깊은 관찰자들은 대체로 하나의 '현상'으로 주목하고 있었다. 합심하여 띄워주기를 한다는 오해도 있었지만 "신춘문예용 음악"이라는 어느 평론가의 일갈과, "만담"에 불과하다는 또 다른 평론가의 혹평도 있었다.

원래 장안에 회자되기 위해선 아주 대단하진 않아야 뜨는 법이다. 하지만 장기하에겐 시대와의 공감과 키치적인 유머 코드, 그리고 적당한 수준의 음악이 있었다. 그리고 미완의 과정에 있긴 하지만 후배가 아니라 선배에게 자극을 주는 밴드라는 것도 사실이다. 이처럼 적당한 평가에는 반발과 반감이 작다. 그런데 과한 평가와 그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반감이 뒤섞이면 오해가 만들어진다. 이 소비의 법칙은 서태지에게도 해당된다. 여기까지는 닮았다.

▲상반기 장기하와 얼굴들은 하나의 현상이었다. 지속될 수 있을까. ⓒ붕가붕가레코드

대중음악이 흐르는 물길이 달라졌다

'뉴 키즈 온 더 블록'의 대유행으로 전과 다른 의미의 십대시장이 인식된 후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함으로써 그 파괴력이 입증되었다. 당시 십대가 여유롭지는 않았다. 입시현실은 지금보다 가혹했다. 입시생에 비해 정원이 훨씬 적었고 자살하는 학생이 부지기수였다. 반면 그들에겐 시간과 구매력이 있었다. 1990년대 초반, 다시 교복을 입기 시작한 십대는 이전 세대와 다른 환경을 경험했다. 교복만 놓고 보아도 의미가 달라졌다. 군사문화와 학생지도의 구습으로 사라졌던 교복이 다시 학생지도와 빈부격차에 의한 위화감 해소를 위해 부활했다. 본격적인 소비의 시대에 그들은 문화소비의 중심으로 등장했고, TV와 매스미디어의 위력이 증폭되었다. 이 중심에 서태지가 있었다.

그러나 이후 10여년의 아이돌 전성시대를 거쳐 가요시장은 초등학생 수준으로 축소되었다(초등학생을 무시하는 발언이 아니니 양해를 구한다). 부모의 구매력, 즉 선물이라고 할까. 당시 음악이 다 나쁘진 않다. 개중에는 라면 끓여 먹으며 듣기에 아주 좋은 노래들이 많았다. 하지만 특정 세대 공략의 한계가 오자 20·30대로 확장하는 마케팅과 유행가를 재생산시킨 질적 향상이 이루어졌고, 지금 회자되는 대표적 인기그룹들의 공통점이 그것이다. 할리우드의 젊은 배우들이 우리 나이로는 중년이어서 놀라곤 했던 시절과 달리 한국에도 젊은 중년 배우들이 많아진 것처럼, 음악인들 역시 젊은 음악으로 활동한다. 인구성비와 문화의 변화는 영화와 음악, 방송 등 다방면에서 나타난다.

특정 층의 지지를 발판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시대는 지나갔을 뿐만 아니라, 미디어 채널의 독점력이 약화되고 인터넷과 페스티벌, 심야방송 등으로 창구가 다양화되었다. 경제력과 다원화가 반영되는 방송에서도 새로움만이 가치를 가지지 않고 익숙함이 중요해졌다. 가요 프로그램만 해도 '가요무대'와 '7080'이 자리를 잡았다. 과거에는 TV에 나오는 가수와 나오지 않는 가수로 오버와 언더가 분리되었지만 이제 만나고 있다. 라이브 음악인과 브라운관 가수의 분리 역시 몇몇 채널에서 공연과 방송의 만남을 꾸준히 시도하여 완화되었다.

팬들과의 소통방식 역시 달라졌다. 대체로 유명가수를 포함한 연예인 관련 기사는 크게 두 가지 경로로 전달된다. 기본적으로 기자가 취재를 하는 것이 있고, 기획사가 기삿거리를 만들어 제공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무슨 일의 주인공, 알고 보니 누구더라" "누구, 어디에 캐스팅"부터 알아서 재미없는 스캔들을 제공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기사 제목만으로 단번에 알아본다. TV에서 만든 '부부놀이'는 그저 남의 일 같아 심드렁해졌으며, 오히려 '티파니'와 '제시카' 동영상처럼 자발적으로 가십을 만들어내고 있다. 아이돌에 대한 환상이 도구(UCC)의 활용과 정보력에 의해 파열음을 내기도 하는 것이다.

다시 마이클 잭슨과 같은 세계적인 팝스타가 등장하긴 힘들다. 그의 죽음은 한 시대의 종언이다. 앞으로 새로운 월드스타의 탄생 대신 죽음을 차례로 지켜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철지난 유원지의 쓸쓸한 풍경이 아니라, 더욱 생동감 있고 다양한 장들로 대중음악계가 재편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달라지는 물길 속에 서태지와 장기하가 있다. 왜 서태지가 예전보다 더 섬세한 음악을 만들어냈음에도 예전 같은 파괴력을 가질 수 없고, 장기하와 얼굴들은 어수룩한 음악으로 일시에 붐을 일으켰다가 시나브로 파도의 일부로 흡수되었을까. 이제 정리할 서태지와 장기하, 혹은 '서태지와 아이들'과 '장기하와 얼굴들'의 10가지 차이는 그 압축상들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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