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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먼 자들의 도시…당신은 눈을 뜨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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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먼 자들의 도시…당신은 눈을 뜨고 있는가?"

[화제의 책] 스탠리 코언의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

영국의 사회학자 스탠리 코언의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States of Denial, 조효제 옮김, 창비 펴냄)은 불편한 책이다. 옮긴이가 지적한 대로 이 책에서 다루는 '부인(Denial)'이 한국 사회의 부조리로 다시 등장했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1970~80년대나 있었을 법한 인권 침해의 기억을 쏟아지는 뉴스 속에서 발견하고 몸서리친다. 그리고 계속되는 부인들.

부인의 메커니즘

먼저 이 책의 분석이 얼마나 한국의 현재 상황에 들어맞는지 살펴보자. 코언은 부인을 '문자적 부인', '해석적 부인', '함축적 부인'으로 나누고 20세기의 끔찍한 인권 침해 사건을 해석한다. 이런 코언의 해석은 이명박 정부 들어서 벌어진 인권 침해 사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예를 들면 용산 참사는 어떤가? 참사가 일어나자마자 경찰은 부인으로 맞섰다. "과잉 진압은 없었다.(문자적 부인) 경찰의 과잉 진압 정황이 드러나자 경찰은 또 다른 부인 논리를 내세운다. "철거민이 뿌린 시너에 화염병 불이 붙어난 사고이므로 경찰에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 전국철거민연합과 같은 외부 세력의 개입이 근본 원인이다."(해석적 부인)

급기야 시간이 지나면서 용산 참사의 본질은, 즉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사망자가 발생한 인권 침해 사건은, 전혀 엉뚱한 모양으로 왜곡된다. "진압 책임자 사퇴 주장은 반정부 세력의 체제 전복 시도다."(함축적 부인) 이렇게 정부가 부인하는 동안, 한때 끔찍한 인권 침해에 경악했던 대중은 용산 참사를 잊거나 혹은 외면한다.

옮긴이는 코언이 제시한 이런 해석 틀의 중요성을 이렇게 설명한다. "(가해자가) 내세우는 부인의 메커니즘을 철두철미하게 규명할 수 있다. 최소한 그들의 부인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를 정확히 이해하고, 대응 논리를 만들어내며, 부인의 패턴을 예측할 수 있게 해준다."

"누구? 나 말이에요?"

▲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스탠리 코언 지음, 조효제 옮김, 창비 펴냄). ⓒ프레시안
코언은 이 책에서 가해자의 부인 논리를 규명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가 오히려 관심을 둔 것은 바로 인권 침해를 직·간접적으로 목격하고도 방관하는 대중이다. 이렇게 '부인하는' 대중을 '시인(acknowledgement)'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데 꼭 필요한 일이다.

다시 용찬 참사를 돌아보자. 처음에 충격을 받았던 대중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자신의 방관을 정당화한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이런 레퍼토리 중 하나를 읊었을 것이다. "나랑 상관없는 일이야." "겉보기와는 다르게 진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누가 알겠어?" "내가 나선다고 뭐가 달라질까(누구? 나 말이에요?). "자기들이 그런 일을 자초한 거나 마찬가지야." 등.

이렇게 방관자는 "골치 아픈 상황에서 발을 빼기 위해서" 혹은 "사건 당시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은 것을 사후에 정당화하고자" 갖가지 해명을 내뱉는다. 코언이 보기에 이런 행위는 "또 다른 인권 침해 등을 허용하거나 심지어 조장하기까지 한다는 점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또 다른 모습의 '가해'이다.

이런 '부인의 문화'를 극복할 가능성은 있을까. 선뜻 긍정할 수 없다. 우리들 대부분은 세상일에 상관하지 않고도 편히 살기 때문이다. (심지어 코언도 그렇다. 코언은 햄버거를 둘러싼 문제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도 매번 이렇게 부인하며 그것을 먹는다. "이게 다 내 책임은 아냐, 이보다 더 심한 문제도 많은 걸, 이런 문제는 관심 갖는 사람들이 충분히 많잖아.")

자, 그럼, 어떻게 현실을 바꿀까?

"왜 우리는 불의를 참지 못하는가?"

코언은 질문을 바꿔보자고 제안한다. "우리는 왜 현실에 눈을 감는가," 이런 질문을 던질 게 아니라 "우리가 현실에 눈을 감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렇게 말이다. "세상이 불의하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이 잘 알고 있는데, 왜 극소수의 사람만이 그것을 시정하려는 것일까? 어떤 조건 때문에 한 나라에서는 타인을 적극 돕는 반면, 다른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을까?"

이런 코언의 질문은 역사 속의 수많은 '소수'를 떠올리게 한다. 그 중에는 이런 믿지 못할 예도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프랑스에서는 나치 부역 행위가 극심했다. 그러나 한 작은 마을에서는 개신교 교도들이 목사의 지도하에 수백 명의 유대인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다. 한나 아렌트가 소개해 유명해진 한 독일군은 어떤가?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유대인 게릴라를 돕다가 결국 처형되었다.

우리 주위를 둘러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여전히 사람이 모이는 곳마다 촛불을 들고 용산 참사를 기억하자고 목소리를 높이는 시민이 있다. 자신의 이익과 무관한 택배 기사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해 싸우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박종태도 그런 특별한 소수이다. 자, 다시 묻자. 왜 이들은 부인 대신 시인을 선택하는가?

쉽지 않다. 코언 역시 명쾌한 해법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다만 그는 프랑스 혁명의 원칙 중 제일 간과되어온 한 가지 원칙을 강조한다. 바로 '자유', '평등'에 가려 주목을 못 받아온 '우애'가 그것이다. 너무 한가한 소리라고? 하지만 바로 이 우애를 실천한 소수가 있었기에 우리는 저 '야만의 20세기'를 지나는 동안 최소한의 '인간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지금 당장 시인하라!

"대다수 사람들은 거의 언제나 '역사를 창조'하는 것보다 '생계를 꾸리는' 일에 더 관심이 많은 법이다. (…) 평범한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 그러나 사회정의는 분명 법 이상의 어떤 것을 요구한다. '훌륭한 시민성'이라는 상태도 있을 수 있다. 이 덕목은 거창한 영웅적 행동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평범한 침묵을 장려하지도 않는다."

코언이 지적한 대로 사람들은 불의에 둔감하다. 그러나 바로 그 사람들이 인권 침해 사실에 경악한다. 그들은 이웃의 고통을 놓고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죄의식도 느낀다. 그들은 때때로 가족, 친지를 넘어선 생면부지의 타인에게 온정의 손길도 내민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아주 간혹 불의를 참지 못해 행동에 나선다.

자, 당신은 지금 어떤 상태인가? 시인할 준비가 돼 있는가?

'행동하는 지식인' 스탠리 코언

1942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난 스탠리 코언은 인권학, 범죄학 분야에서 '고전적 지위'를 획득한 독보적인 존재다. 그가 박사 논문을 펴낸 <대중의 적과 도덕적 공황>(1972년)은 2002년 출판 30주년을 기념하는 제3판을 펴낼 정도로, 지난 40년간 출판된 가장 영향력 있는 범죄학 관련 저서로 꼽힌다.

코언의 삶은 1980년 이스라엘로 이주하면서 큰 변화를 겪는다. 안락한 영국 대학 교수 자리를 박차고 이스라엘로 이주한 코언은 헤브루대학에서 이스라엘의 범죄 현황을 연구하다 팔레스타인 주민 인권운동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유대인 코언이 이스라엘 안에서 진행한 팔레스타인 주민 인권운동은 전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이스라엘의 인권 침해에 절망한 코언은 다시 영국으로 건너온다. 특히 그는 이스라엘에서의 삶을 계기로 자신의 연구를 범죄학에서 인권학으로 확장한다. 범죄학 연구가 "타자의 억압과 고통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의 차원으로 옮겨간 것. 2002년 펴낸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은 이런 그의 평생에 걸친 고민을 집대성한 노작이다.

평소 코언은 사적·개인적인 삶과 공적·정치적인 삶을 합치시키는 것이야말로 지식인의 책무라고 강조했다. 그는 자신의 다음과 같은 말을 그대로 실천한 학자다. "나는 인생의 모든 측면을 통합할 수 있다고 한 1960년대식 사상에 아직도 푹 빠져 있습니다. 사람의 영혼, 교육, 저술, 정치적 활동이 모두 한 인격 속에서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평소 "자신이 제일 존경하는 사회학자"로 코언을 꼽아온 놈 촘스키는 스탠리 코언을 기리는 책에 실린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미래에 희망이 있다면 코언이 용기있고 헌신적이고 정직하게 걸어간 길을 다른 사람들도 따를 것이기 때문이리라. 그의 모범적인 삶과 기억에 남을 만한 성취를 기념하여 이 자리에 몇 마디나마 보탤 수 있게 되어 진정 영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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