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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난 과속하고 있는 건 아닌가"

[문화, 우주를 만나다] 속도위반 신기록

2009년은 유엔(UN)이 결의하고 국제천문연맹(IAU), 유네스코(UNESCO)가 지정한 '세계 천문의 해'이다.

실제로 2009년은 아주 뜻깊은 해이다. 갈릴레이가 망원경을 만들어서 천체를 관측하기 시작한 지 400주년, 허블의 우주 팽창 발견 80주년, 인류의 달 착륙 40주년, 외계 지성체 탐사 프로젝트 제안 50주년 및 메시지 송신 35주년을 맞은 해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2009 세계 천문의 해'를 맞아 한국조직위원회를 만들어서 국제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다. 이미 4월 2일부터 5일까지 전 세계 천문대에서는 100시간 동안 연속으로 별을 관측하고 길거리에서 천문학자·아마추어천문가가 일반인과 함께 별을 관측하는 전 지구적인 행사가 열렸다.

또 우리나라에서는 특별히 이동 천문대 '스타-카'가 소외 지역 아이들을 찾아가고, '과학과 예술의 만남'과 같은 전시회도 준비 중이다. 이런 내용은 2009 세계 천문의 해 한국조직위원회가 운영하는 홈페이지와 웹진 <이야진(IYAZINE)>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바로 가기)

<프레시안>은 이런 '2009 세계 천문의 해'를 맞아 '문화, 우주를 만나다' 연재를 <이야진>과 공동으로 연재한다. 하늘의 별을 바라보면서 꿈을 키웠던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별, 우주, 문화, 예술 등을 화두로 매주 한 편씩 에세이를 선보인다.

▲ 이 주의 천체 사진 : 2009년 5월 24일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에서 오후 9시에 찍은 북쪽 하늘.. 중앙에는 큰곰자리와 꼬리부분의 북두칠성이, 오른쪽에는 용자리와 작은곰자리가 보인다. 북두칠성은 조선시대에 제작된 천상열차분야지도에 그려져 있는 동양의 별자리로,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별자리로 여겼다. ⓒ한국천문연구원(사진=변성식)

지평선 한 쪽 끝에서 솟아올라 다시 땅으로 꺼지는 무지개…. 빌딩 숲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온전한 반원의 무지개는 단순한 장관을 넘어선 경이로움이었다. 알버커키 공항에서 산타페로 가는 길에 마주친 빛과 물방울의 축제! 머지않아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는 여정을 시작할 내게 파랗게 개어가는 하늘을 배경으로 나타난 일곱 빛깔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유학을 떠나던 그 해 봄에 보았던 무지개는 아직도 가끔 당시 느꼈던 두려움, 설렘과 함께 추억 속에서 반원을 그린다.

2009년, 뉴멕시코를 처음 방문한 지 10주년이 되는 올해, 나는 뉴멕시코 번호판을 달고 뉴멕시코 도로를 달리며 뉴멕시코의 작은 도시 한 구석에 위치한 아도비(진흙으로 지은 집)에서 뉴멕시코 문화를 즐기면서 뉴멕시코의 주민으로 살고 있다. 여기서 잠깐!

뉴멕시코가 어딜까~요? 사실 미국인들 중에서도 이 주가 어디 붙어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으며 외국 사람들의 경우에는 뉴멕시코가 미국의 일부인지 멕시코의 일부인지 헷갈려 하기도 한다. 나 같은 이방인보다 여행의 기회가 적은 미국인들이나, 미국의 50개주의 이름과 위치를 줄줄이 외울 이유가 없는 외국인들이 이 주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이 나에겐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뉴멕시코를 낯설어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이곳의 매력을 신나라 얘기해 줄 수 있어 기쁠 따름이다.

북미에는 많은 주들이 무질서하게 얽혀있는 가운데 네 주의 모퉁이가 자로 잰 듯 만나는 곳이 딱 한 군데 있다. "Four Corners Monument"라는 곳에 가면 몇 해 전 동계올림픽이 열렸던 솔트레이크 시티의 주-유타, 그랜드캐넌의 주-아리조나, 록키산맥의 주-콜로라도 그리고 오늘 이야기의 배경인 뉴멕시코를 포함하여 네 개 주를 동시에 밟을 수 있다.

▲ 미국 전도. ⓒmaps.google.com

이렇게 서북쪽으로는 쟁쟁한 주들을 끼고 있는 데다 그 반대편으로는 어마어마한 땅 크기를 자랑하는 텍사스로 둘러 쌓여있으니 상대적으로 덜 유명한 게 아닌가 싶다.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남쪽 끝의 반 정도는 멕시코와 맞닿아 있다. 이 땅을 처음 찾은 이방인들은 16세기 멕시코에 거주하던 스페인 사람들이라 전해진다. 보물을 찾아 유럽인으로는 최초로 이곳에 도착했단다. 이것을 시작으로 100년 쯤 지나 멕시코의 한 주로 포함이 되었다는데 그 후 약 2년여에 걸친 멕시코 전쟁의 결과 1848년 미국의 영토가 되었다. 이렇게 "New Mexico"의 이름은 사실 한 두 문장으로 요약하기에는 너무나 처절한 과거를 반영하고 있다.

1912년 마흔 일곱 번째로 미국의 한 주가 된 뉴멕시코는 50개의 주 중 다섯 번째로 크며 그 면적이 남한 땅의 세 배가 넘는다.

▲ 뉴멕시코 주. ⓒmaps.google.com
뉴멕시코에서 가장 큰 도시는 선포트(Sunport) 국제공항과 뉴멕시코대학(University of New Mexico)의 본부가 있는 알버커키(Albuquerque)이다. 상업의 중심지이자 매년 10월에 9일간 열리는 세계적인 기구축제로 수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이며 지리적으로도 거의 한 가운데에 위치한 알버커키는 뉴멕시코의 심장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알버커키는 사실 이 주를 대표하는 주도(capital city)는 아니다. 주도는 알버커키의 약 100킬로미터 북쪽에 위치한, 미국 도시 중 역사가 가장 오래되었다는 산타페(Santa Fe)이다. 우리에게는 모국의 유명한 자동차 이름으로, 혹은 한 때 화제가 되었던 유명한 일본의 여배우가 자신의 원초적 본능으로 완성시켰던 화보집으로 잘 알려진 곳이지만 미국인들에게 산타페는 명상가와 예술가들의 도시이다. "기운"이 좋다나 뭐라나? 영엄한 기운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 아름다운 경관을 보면 왜 자연스레 명상에 젖지 않으며 왜 절로 예술적 영감이 떠오르지 않겠는가?

산타페를 비롯 북쪽으로는 최첨단의 과학과 공학의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 로스알라모스 (Los Alamos), 인디안 유적지와 스키 리조트로 유명한 타오스(Taos)가, 남쪽으로는 하얀 모래의 바다, 화이트샌즈국립기념지(White Sands National Monument), 1년에 두 번만 일반인에게 공개되는 최초의 핵폭탄 실험지 트리니티 사이트(Trinity Site), 깊은 동굴 속 주민, 박쥐들을 직접 만날 수 있는 칼스배드(Carlsbad), 그리고 지구 밖에서 오셨다는 손님들과 그들의 교통 수단인 하늘을 가르는 반짝이 접시로 떠들썩해진 로스웰(Roswell)이 유명하다. 이처럼 아직 인류의 손길이 많이 닿지 않은 자연, 긴 역사, 현대 예술이 최첨단의 기술과 공존하며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주가 바로 뉴멕시코이다.

위 : 타오스 인디안 마을(왼쪽) ⓒtaospueblo.com,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가 활동하던 애비큐(Abiquiu) 부근 고스트 랜치(Ghost Ranch) ⓒhghostranch.org 가운데 : 알버커 기구 축제(왼쪽) ⓒballoonfiesta.com, 산타페 중심부 ⓒflickr.com 아래 : 화이트샌즈국립기념지(왼쭉) ⓒhickerphoto.com, 로스웰 UFO 축제(가운데) ⓒroswellufofestival.com, 칼스배드 천연동굴 ⓒrozylowicz.com

그리고 이곳이 나에게 더욱더 특별한 이유는 바로 'VLA(Very Large Array)'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VLA는 1956년 설립된 미국 전파천문대(NRAO·National Radio Astronomy Observatory)가 1970년 대 초에 시작한 야심찬 사업이다. 직경 25미터의 스물일곱 개 안테나가 Y자로 배열되어 하나의 큰 안테나로 활용되는 현존하는 대표적인 전파 간섭계 (radio interferometer)라 할 수 있다.

▲ Very Large Array (VLA) ⓒnrao.edu

안테나라고? 그걸로 뭘 본다는 거지? 일반인들에게 천문학이라 하면 대개 광학 망원경과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우주에는 우리의 별 태양과 같이 연속된 전자기파, 즉 빛의 파장 중에 가시광선 영역에서 대부분의 에너지를 내는 항성들만 있는 게 아니다. 별과 별 사이, 은하와 은하 사이를 메우고 있는 입자, 가스와 먼지들이 온도, 밀도나 압력과 같은 물리적인 상태에 따라 가시광선보다 파장이 긴 전파, 적외선이나 그보다 파장이 짦은 자외선, X선 등에서 더 많은 에너지를 내기도 한다. VLA는 그 중 전파 영역에서 나타나는 천문 현상, 예를 들어 차가운 성간 물질과 같은 정적인 우주의 모습부터 별의 폭발이나 은하 중심부에 있는 어마어마한 질량의 블랙홀로 인해 입자들이 가속화되면서 나타나는 매우 활동적인 우주의 모습들을 관측하기 위해 만들어진 '전파 망원경'이다.

▲ M81과 그 주변의 모습. 왼쪽 사진은 광학 망원경을 통해 우리 눈에 실제 보이는 모습이며, 오른쪽 사진은 VLA를 통해 얻은 전파 이미지다. 하늘에 투영된 세기에 따라 임의의 색을 입혔다(메사추세츠 대학의 윤민수 교수의 연구 결과). 가시광선 영역에서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이는 세 은하가 전파 영역에서 보면 성간물질들이 서로 얽혀 하나의 그룹을 형성하고 있는 것을 볼수 있다. 이같이 우주 공간에는 가시광선 영역에서는 예상치 못한 현상들이 관측되며 천문학자들은 전파를 포함한 다양한 파장을 이용하여 우주의 진화를 연구한다. ⓒnrao.edu

여러 대의 안테나를 넓은 지역에 배열하고 전자기파의 간섭현상을 이용하면 제작이 거의 불가능한 하나의 큰 안테나와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 VLA의 경우 배열이 가장 클 때에는 그 직경이 36킬로미터나 되니 서울 한복판 명동에서 수원성곽에 이르는 원 안에 스물일곱 대의 안테나들이 한 곳을 응시하며 함께 움직인다고 상상해보라! 이렇게 넓으면서도 평평한 땅을 필요로 했던 VLA는 관측 조건이 좋은 건조한 기후를 찾아 뉴멕시코 중서부에 위치한 고원(Plains of San Augustin)에 둥지를 틀게 되었다. 내가 태어나던 해에 들어선 첫 안테나를 시작으로 나머지 스물여섯 개의 안테나가 모두 자리를 잡고 공식적으로 출발을 알린 것이 1980년, VLA는 지난 30년간 수많은 주요한 연구 결과를 내며 세계 전파 천문학을 이끌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내가 현재 살고 있는 곳은 VLA에서 동쪽으로 약 80킬로미터 떨어진 소코로 (Socorro)라는 도시다. 약 1만8000여 명이 살고 있는 작은 도시이지만 광산(mining)학으로 유명한 뉴멕시코공대와 내가 현재 박사후 연구 과정으로 있는 미 전파 천문대의 분서가 위치하고 있어 뉴멕시코 내에서는 여러 공학과 과학의 요지 중 한 곳이기도 하다.

이 도시의 이름 "Socorro"는 스페인어로 "도움"(help, aid)이라는 뜻이며 이곳에 처음 도착한 스페인 사람들이 사막의 잔인함과 싸우고 있을 원주민들이 음식과 물을 제공해준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말이 도시지 그 모습은 한국에서도 이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시골동네와 흡사하며 도시 곳곳은 서부영화에 나올 법한 황량한 마을을 연상시킨다.

얼마 전 보수 공사 후 다시 개관한 유일한 극장은 시간차를 두고 두세 편의 영화를 돌려가며 상영해야 하는 하나의 스크린이 있을 뿐이고, 이 동네에 자리한 첫 중국 식당은 그 당시의 혁명으로 전해 내려올 만큼 문명의 이기와는 상당히 먼 환경이다. 이처럼 문화적으로 격리돼 있기 때문에 소코로를 주거지로 적합하지 않은,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고 농담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저마다 특색 있는 진흙집들과 한 다리 건너면 서로 어떻게든 알고 있는 이 곳 주민들의 친밀함과 친절함은 나와 같은 이방인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따뜻한 매력이다.

서론이 좀 길기는 했으나 오늘 이야기는 바로 2008년 마지막 밤과 2009년 첫 새벽에 '우리동네' 소코로에서 VLA를 오가며 겪은 황당한 사건에 관한 것이다. 지난해 12월 31일 수요일, 마음의 동요와 주변의 변화가 많았던 한 해를 나만의 특별한 방식으로 마무리하기 위해 종일 열심히 궁리했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경험과 함께 새해를 기념하고 싶었다. TV를 통해 뉴욕 타임스퀘어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지켜보는 거 말고, 사람들과 어울려 한 잔 하는 거 말고, 이곳이 아니면 안 되는 무언가가 없을까? 그 순간 어둠속 고원에서 꿋꿋이 서있을 안테나들이 머리 속에 떠올랐다.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곳, 자연과 동화되어 맘껏 사색을 즐길 수 있는 곳, VLA 사이트보다 더 좋은 곳이 있을까?

기본적으로 차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이므로 여유 있게 자정이 되기 두 시간 전 쯤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사막의 밤은 춥다. 양말도 웃옷도 바지도 모든 걸 두 겹씩 겹쳐 입고 따뜻한 외투에 엄마께서 떠주신 털모자를 쓰고 스노 부츠를 신었다. 뒤뚱뒤뚱 한번 넘어지면 쉽게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은 복장을 하고 혹시 필요할지 모를 손전등을 들고 집을 나섰다.

소코로에서 VLA로 가는 길의 처음 반 정도의 구간은 가로등도 없는 꼬불꼬불 산길이다. 낮 동안에도 차가 많이 다니지 않는 도로이며 새해 자정에는 더더욱 한적할 수밖에 없다. 언제 뛰어들지 모르는 야생동물까지 생각하면 밤길 운전은 극도의 주의가 필요하다. 중간쯤 되는 거리에 위치한 막달레나(Magdalena)라는 인구 8~900명의 작은 마을에 도달해야 한꺼번에 시야에 들어오는 차가 두 대 이상이 된다. 마을을 관통하는 1킬로미터 남짓한 구간에는 가로등도 있다.

불빛을 보고 반가워 속력을 내도 안전하겠지 생각하면 오산이다. 여느 작은 마을처럼 이곳도 몇 안 되는 주민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제한 속도가 매우 낮다. 구간에 따라서는 소코로에서 지금까지 달려온 속력에서 다섯 배를 줄여야 하는 "speed trap"이다. 속력을 줄이고 차창 밖으로 막달레나의 밤 풍경을 구경하며 천천히 달렸다. 마을 사람들이 함께 불꽃놀이라도 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 곳을 거의 다 빠져나가는 동안 거리에서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속도 제한 구간의 마지막 20여 미터를 남겨두고 엑셀을 다시 힘차게 밟는 순간, 아뿔싸! 나를 따라 붙는 경찰차.

▲ 막달레나(Magdalena) ⓒmaps.google.com

경찰 : 안녕하슈?
애리 : 예, 수고가 많으십니다. 근데 제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요? (가슴이 콩닥콩닥콩닥)
경찰 : 속도 위반입니다. 여기 제한속도가 얼마인지 아슈?
애리 : 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마치 아무런 표지판도 못 본 냥) 얼.만.데.요?
경찰 : 시속 50킬로미터 지역에서 80킬로미터로 달리고 있었어요.
애리 : (아이고 내가 미쳤지) 제가…그랬어요?
경찰 : 어디서 왔소?
애리 : 저는 소코로에 살구요, 천문학하는 시람인데요.
경찰 : VLA 사이트에 가는 길이요?


그렇다. 나는 VLA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공적인 볼 일이 아닌, 별이 쏟아지는 하늘 아래서 2009년을 맞이하고자 하는 다분히 사적인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상대가 알아서 마련해 준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있나!

애리 : (마치 연구로 급히 볼 일이 있는 양 명쾌한 목소리와 적당히 심각한 표정으로) 네.
경찰 : 신년 자정이기도 하고 나도 이런 깊은 밤에 일하러 가는 사람 벌금 물리기 싫은데 제한속도 지킬 거라 약속할 수 있겠소?
애리 : (하하, 아저씨도 참, 그런 어려운 부탁을) 그럼요!


마음씨 좋은 경찰 아저씨는 나의 운전면허와 차량 등록증을 확인하고 속력을 줄일 것이라는 약속을 받아낸 후 나를 보내주셨다. 콩닥콩닥. 한동안 심장 뛰는 소리가 멈추질 않았다. 계속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천천히 차를 몰아가던 중 저 멀리 어둠속에서 안테나가 희미하게 하나 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자정 20분 전. 예상대로 VLA 관측실에서 나오는 불빛을 제외하고는 다른 인공조명은 찾아 볼 수 없었다. 각 안테나에 안전등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소코로 집 마당에서 보다 훨씬 인상적인, "별이 쏟아지는 밤"만이 기억에 남을 뿐이다. 관측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웠다.

주변은 너무 고요했다. 브람스 (Brahms)의 레퀴엠 (Ein Deutsches Requiem)을 틀었다. 2008년의 사건들이 하나 둘 씩 떠올랐다. 나 스스로 꾸지람하고 싶은 일 들, 칭찬해주고 싶은 일 들, 1년 동안 스쳐간 소중한 인연들, 그 인연들과 울고 웃었던 기억들, 그리고 추억과 함께 하나 둘 씩 떨어지는 별똥별! 1년 동안의 추억을 되새기고 "하나의 소원"을 비는 동안 어느새 뉴멕시코에도 새해가 찾아왔다.

돌아오는 길, 막달레나를 통과하며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마을을 빠져나가는 순간까지 매우 조심스레 차를 몰았다. 그러데 또다시 아뿔싸! 나의 뒤를 조용히 따르던 수상한 차가 내가 마을 끝에 가까이와 액셀을 밟자 불을 켜고 따라붙기 시작한다.

경찰 : (많이 어려보인다) 속도 위반입니다.
애리 : (억울한 표정으로) 여기 시속 90킬로미터 구간 아닌가요?
경찰 : 여기는 아직 70 구간이에요. 좀 더 가야 90 구간이랍니다. 어디 가는 길이에요?
애리 : 소코로에 사는 전파천문대 연구원인데요. VLA 다녀오는 길이랍니다. (또 한 번 통하나 보자).
경찰 : (무척 존경스러운 표정으로) 아, 그래요. 밤늦게까지 열심히 연구하시네요.
애리 : 그러게 말이에요. 남들은 다 신년이라고 파티하고 있을 텐데. (나 배우해도 되겠다.)
경찰 : 다신 위반 안한다고 약속하면 경고장만 드리지요.


이번엔 기록에도 남지 않는다는 경고장에 서명도 했다. 경찰 청년은 건네주면서 버려도 된다고 했지만 난 액자에 끼워 벽에 걸어두고 오래오래 반성하겠노라고 답했다. (나 진짜 배우해도 되겠다). 정말 인상적인 것은 경찰 청년의 마지막 한마디. 난 벌금 없이 보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이 경찰 청년은 내가 이런 시골동네까지 와서 천문학 연구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단다. 순수과학의 중요성을 아는 "지각"있는 청년이다.

운전대를 잡은 이래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속도 위반. 그것도 몇 시간 내에 두 해에 걸쳐 두 번이나! 이리하여 스물일곱 대의 거대한 안테나들과 함께 하려던 사막 고원에서의 "낭만적인" 신년 맞이는 속도 위반 신기록으로 인해 가슴 떨리는 에피소드가 되고 말았다. 지금쯤 난 아마도 막달레나에서 "speeding astronomer"로 명성을 날리고 있지 않을까? 그나마 경고만 받고 끝난 게 얼마나 다행인지.

내가 천문학에 빠져든 이유는 지극히 단순하다. 어린 시절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나도 모르게 넋을 잃게 되었던 게 그 시작이었다. 인공 조명 때문에 별도 많이 보이지 않는 서울 하늘 아래서 컸지만 한참을 바라보고 있으면 나의 사고는, 나의 영혼은 어느새 하나 둘 씩 더 보이기 시작하는 별들 사이를 빠져나가 저 먼 우주의 어딘가를 떠돌고 있었다.

"우주의 끝이 있을까? 있다면 그 끝은 무엇이며 어떤 모양일까?" 그리고 그 질문은 언제나 부메랑처럼 내 자신을 향해 돌아왔다. "나는 이 우주에서 어떤 존재일까?" 뒤이어 찾아드는 한없이 작아지는 그 느낌. 그런데 난 소름이 돋으리만큼 초라해지는 그 느낌이 싫지 않았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어 무조건 도전하고만 싶은 그 느낌! 광활한 우주에서 한없이 작은 확률의 지구와 같은 행성에 태어난 것만으로도 우주의 탄생과 진화에 대한 도전은 나에겐 너무 자연스러운 것이었는지 모른다.

연속된 두 번의 속도위반으로 조금 아찔한 사건이 되었으나 이번 경험이 나에게는 지난해를 정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별이 쏟아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내가 이 길을 선택하게 된 동기를 스스로에게 상기시켜 준 것이다. 모순처럼 들릴지 모르나 천문학을 전공으로 택하고 학문의 깊이가 조금씩 깊어질수록 내게는 밤하늘을 바라볼 기회가 오히려 줄어들었다.

천문학 기술은 지난 반세기 동안 그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발전해 왔고, 따라서 흔히들 떠올리는 노출된 공간에서 밤새 추위에 떨며 망원경을 들여다보며 사색하는 천문학자의 모습을 요즘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대부분의 시간을 연구실에서 지내다보면 문득 열정을 가지고 우주를 바라보던 나를 잃어가는 건 아닌지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출발점이 어디였는지 기억도 없고 어떤 길을 달려왔는지 돌아보지도 않고 또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생각할 시간도 없이, 나는 인생에서 너무 과속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정애리
엄청나게 빠르게 돌아가는 사회, 잠시라도 모든 것을 멈추고 자신과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나를 비롯한 모든 현대인들에게 꼭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 NRAO에서는 현재의 VLA 수신기에 비해 더 넓은 파장을 동시에, 더 먼 우주를 보다 쉽게 관측할 수 있는 수신기로 그 내용을 교체하는 사업을 진행 중이며 2012년에는 더욱더 강력한 EVLA(Expanded VLA)로 제 2의 인생을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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