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 세계가 디플레이션(경기침체) 압박에 시달리는 가운데서도 인플레이션 발생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이름이 높은 경제전문가 일부도 인플레이션에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을 공공연히 펼친다.
인플레냐, 아니면 디플레냐. 대다수 전문가들은 여전히 디플레 압박이 강한 만큼 인플레이션 우려를 지금 당장 할 필요는 없다고 입을 모았다. 지금은 수요를 살려야 할 시기라는 뜻이다.
하이퍼인플레이션 투자 상품까지 등장
선진국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이어가고 있는 와중에도 인플레이션 가능성이 제기되는 근본 원인은 결국 달러다.
국제 투자자금이 최근 들어 미국 국채에서 원자재 시장으로 눈을 돌리는 가운데, 미국 달러화 가치가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있다. 올해 1달러당 0.716유로이던 미국 달러가치는 지난 1일 현재 0.705유로로 하락했다. 한때 달러당 1500원을 넘나들던 원화 역시 최근 들어 1230원대까지 내려가는 등 달러대비 강세를 보이고 있다.
▲윌리엄 페섹 <블룸버그> 칼럼니스트는 최근 일본 증시 급등에 대해 "일본 경제에 다시 버블유령이 오고 있다"고 경고했다. 도쿄시내에서 한 남자가 주식시세판 앞을 지나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
달러 가치가 낮아지자 아예 하이퍼인플레이션(Hyper-inflation, 물가상승률이 비정상적으로 높은 현상)을 노린 국제 투기자금의 움직임도 가시화되고 있다. 지난달 31일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블랙스완>의 저자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가 투자자문을 맡은 유니버사 인베스트먼트는 각국 정부가 추진한 경기부양책이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질 것으로 보고 이에 베팅하는 '인플레이션 펀드'를 설립했다.
유니버사는 지난해 증시 하락에 베팅해 100%가 넘는 수익률을 기록, 투자자들이 몰리면서 지난 2007년 1월 3억 달러에 불과하던 운용자산 규모가 현재 60억 달러에 이른다.
"인플레이션 시대 코앞" 과감한 예언자들
서브프라임 사태를 예측한 월스트리트의 대표적인 비관론자로 '닥터 둠'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투자분석가 마크 파버 역시 하이퍼인플레이션 시대 도래를 예견하고 있다.
그는 지난달 26일 홍콩에서 가진 <블룸버그TV>와 인터뷰에서 "미국에 곧 짐바브웨 수준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닥칠 것을 100% 확신한다"며 "정부 부채 증가로 금리를 올려야 할 때 중앙은행이 제 역할을 못 해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짐바브웨는 지난해 7월 물가상승률이 무려 2억3100만%에 달한 대표적인 하이퍼인플레이션 국가다.
파버가 하이퍼인플레이션 시대 도래의 이유로 꼽은 것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연준)의 디플레이션 우려로 인한 기준금리 인상 지연이다.
통상 하이퍼인플레이션은 단순히 통화량 증가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정부 재정적자가 지나치게 심화해 국채로 이를 메우는 게 불가능해지는 시점이 어느 순간 다다를 때 발생한다는 게 학계의 평가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경제학)는 "물가가 일정 수준을 넘어가버리면 도저히 세금을 걷어서 재정 충원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닥친다. 이 경우 정부는 중앙은행을 압박해 돈을 추가로 더 찍을 수밖에 없게 된다. 이 악순환이 심화되면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온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1년 사이에 물가가 두배 올랐다면 지난해 납세자의 세금 100의 올해 가치는 50에 불과하다. 그만큼 재정 충원이 미흡해진다. 미국의 경우 FRB가 마크 파버의 전망대로 인플레이션이 현실화했음에도 기준금리 인상을 포기한다면, 즉 통화가치 하락을 계속해서 묵인한다면 납세자의 화폐가치가 떨어져 세금으로 걷어 들인 재정의 실질가치 역시 하락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막대한 재정적자에 시달리는데다 경기침체 탈출까지 이끌어야 하는 미국 정부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화폐를 더 찍어 산업에 뿌리는 수밖에 없고, 이는 전례없는 인플레이션을 이끌 것이라는 게 '하이퍼인플레이션 도래'를 예견하는 이들의 시나리오다.
물론 지나치게 과도하다는 지적이 보다 많다. 인플레이션 우려가 커지고 있기는 하지만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거론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말이다.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는 2009 서울디지털포럼에 참석해 인플레이션 발생 가능성을 경고했다. ⓒSBS |
아직은 경기침체 걱정해야… "인플레? 헛소리"
하지만 다수 경제전문가의 의견은 "아직 인플레를 걱정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데 맞춰진다. 여전히 세계경기 침체라는 발등의 불부터 꺼야 한다는 얘기다.
전성인 교수는 "한국의 최근 생활물가가 올라서 인플레이션 우려가 커지지만 아직은 경기침체에 따른 부작용이 더 큰 문제다. 미국은 말할 것도 없다"며 "근본적으로 미국의 인플레이션 발생 가능성은 연준이 정부의 입김에 굴복한다는 가정이 성립돼야 하는데, 독립적인 의사결정기구인 연준이 그런 실수를 할 가능성은 낮다"고 말했다.
전 교수는 "어느 정도 (인플레이션) 우려가 있겠지만 적절한 시기에 통화 환수책을 사용하면 이를 콘트롤 할 수 있다"며 "인플레를 노린 투기세력이 횡행하면 오히려 통화환수 필요성이 커지는만큼 지금은 크게 우려할 사항이 아니다"라고 못박았다.
이효근 대우증권 경제금융팀장도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려면 기본적으로 수요가 뒷받침돼야 하는데 여전히 제한적"이라며 "세계적인 인플레이션이 그렇게 쉽게 발생한다고 볼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지금은 폴 크루그먼 교수가 말한 것처럼 돈을 더 과감하게 풀거나 산업 구조조정을 지속적으로 이끌어 수요 진작책을 펼쳐야 할 때"라고 덧붙였다.
여전히 디플레이션 위험을 해소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세계적인 실업률 상승 공포를 떨쳐 동시적인 경제붕괴 재앙을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존 립스키 국제통화기금(IMF) 수석부총재는 지난 1일 <월스트리트저널>과 인터뷰에서 선진국 실업률이 내년까지도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을 했다.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는 지난달 18일 <한국경제TV>가 주최한 세계경제금융컨퍼런스에서 "기본적으로 세계경제는 L자형이 될 것"이라며 당분간 세계경기가 침체를 벗어나기 어려우리라 예상했다. 그는 "이번 위기로 미국의 경우 저축률이 높아져 민간의 소비심리는 더 위축될 게 분명하다"며 "금리가 낮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기업의 투자 역시 활발해지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소비가 활성화되지 않아 인플레이션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뜻이다.
실제 사실상 마이너스 수준에 머물던 미국의 저축률은 최근 5.7% 수준까지 올라왔다. 이처럼 소비로 세계 경제를 지탱하던 미국인들은 최근 들어 저축을 늘리고 빚을 갚는데 소득의 상당부분을 쓰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외국계 금융기관 간부는 "인플레이션은 없다. 미국 달러화의 약세도 없다"고 선을 그으며 "최근 40달러 선에 머물던 유가가 70달러까지 올라갔다고 하지만 이 전에는 140달러선에 거래됐다. 국내 소비가 살아난다고들 하지만 강남 일부 아파트 가격만 오를 뿐이다. 소비가 안 살아나는 한 인플레이션은 도래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세계의 동시적 인플레이션 역시 가능성이 낮다고 그는 일축했다. 그는 "중국산 제품이 엄청나게 싼 가격으로 온 세계에 수출되고 있다. 중국 제품의 가격이 폭등하지 않는 한 인플레이션이 세계 각지에서 동시에 발생할 가능성은 없다"며 "일부 투기세력이 최근 위안화 강세를 두고 인플레이션 가능성에 베팅하지만 완전한 오판이다. 이는 중국의 정치적 이유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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