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서 제주특별자치도는 기쁘고 서울과 부산시 관계자들의 속은 쓰릴 것이다. 다음달 1일 열릴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개최지를 놓고 벌인 경쟁 끝에 제주도가 최종 승리자가 됐기 때문이다. 아시아-유럽정상회의(2000년, 서울 코엑스),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2005년, 부산 벡스코)에서 연달아 고배를 마신 제주도는 삼수 만에 대형 회의를 개최하게 됐다. 제주국제컨벤션센터(제주ICC)의 존재감이 컸다.
이번 정상회의를 위해 제주도는 328억 원을 쏟아 부었다.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준비기획단 관계자는 "이번 정상회담으로 인한 홍보효과만 2600억 원 정도를 예상하고 있다. 미리 제주ICC를 리모델링하고 아세안 거리를 조성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자체들의 공격적 투자는 적잖은 잡음을 낳고 있다. 전시장이 난립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고, 적자 문제도 점차 심각해지고 있다. 건설비용부터 운영비에 이르기까지 전시·컨벤션센터에 관계된 자금 상당액은 지역민의 세금에서 충원된다.
▲제주ICC에서 열리는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소개 광고. 제주ICC가 광고의 핵심 장면으로 쓰였다(제주ICC 제공). ⓒ프레시안 |
지자체들 "짓자, 지어!"
2009년 5월 현재 한국의 전시·컨벤션센터는 총 12곳이다. 서울의 코엑스(COEX), 농업무역센터(aT Center), 세텍(SETEC) 등 세 곳을 포함해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KINTEX), 인천 송도컨벤시아 등 수도권에만 총 다섯 곳이 있다.
벡스코(BEXCO, 부산), 엑스코(EXCO, 대구), 세코(CECO, 창원) 등 영남권에 세 곳이 있고 광주(김대중컨벤션센터), 대전(코트렉스, 대전컨벤션센터), 제주(제주ICC) 등 나머지 지역에 네 곳이 있다. 가장 오래된 곳이 서울 코엑스(1979년 개장)이며, 바로 지난해 10월에는 인천에 송도컨벤시아가 문을 열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지자체들은 약속이나 한 듯 전시장 건설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당장 손에 꼽히는 곳만 서울 강북, 부산(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청), 경북 경주, 울산, 전북 군산, 전북 전주 등이다.
▲전국에 산재한 전시컨벤션센터 현황. ⓒ프레시안 |
코레일은 옛 서울역사 부지 5만6000㎡ 일대에 컨벤션센터를 건설하겠다고 밝혔고,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도 전시·컨벤션센터 건립 계획을 거론하며 정부 지원을 요청하는 터다. 송도컨벤시아를 개장한 인천은 영종도에 들어설 '밀라노 디자인 시티'에 전시장 크기만 20만㎡ 규모에 달하는 '피에라 밀라노 인천전시장(FIEX)' 건설 계획을 잡았다.
현재 전시면적 기준 국내 최대 전시장은 킨텍스다. 킨텍스 전시장 크기는 5만3000㎡로 국내 대형 전시회(서울국제공작기계전, 서울모터쇼, 경향하우징페어, 한국전자산업대전, 한국식품산업대전, 한국기계산업대전)를 모두 개최한다.
있는 곳은 대형화
회의, 곧 컨벤션만 열 것이라면 센터 대형화 필요성은 낮다. 하지만 큰 돈의 거래가 체결되는 대형 전시회를 열자면 시설도 확대해야 한다. 지자체가 일제히 전시·컨벤션센터 대형화 작업에 나서는 이유다.
킨텍스는 지난해 말 이미 2단계 공사에 착공했다. 오는 2011년이면 킨텍스 전시장 크기는 지금의 두 배인 10만8000㎡로 확장된다.
이에 발맞춰 접근도를 높이기 위한 대규모 기반시설 공사를 지자체가 측면 지원하고 있다. 고양시는 숙박시설이 없어 전시회 유치매력도가 떨어진다는 킨텍스의 지리적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대형 호텔을 짓기 위한 부지 매각에 나섰다. 서울 강남과 킨텍스를 30분 만에 연결하는 고속철도 공사 계획도 회자된다.
킨텍스만이 아니다. 벡스코와 엑스코 등 지역 전시·컨벤션센터도 확장 계획을 잡았다. 벡스코는 오는 2014년까지 부산 해운대 시네파크 부지에 1만5000㎡ 규모의 제2 벡스코 건설 계획을 세웠고, 엑스코는 2011년까지 전시장과 컨벤션홀 1만6000㎡를 확장할 계획이다. 세코는 회의시설을 확장했고 광주와 대전, 인천도 확장을 추진 중이다.
지자체들이 경쟁적으로 전시장 확장에 나서는 까닭은 일단 전시산업이 계절적 특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보통 전시회 성수기는 2~4월과 7~9월. 이때는 전시회가 집중되고 참가를 신청하는 업체의 수도 폭증해 전시장이 모자라는 경우가 많다는 게 전시·컨벤션센터 측의 입장이다. 지역 마케팅을 위한 중요한 기반시설인 전시장 측에서 확장을 요구하면 지자체로서 거절하기 어렵다.
일부는 실제로 전시장 가동률이 이미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엑스코 시설 가동률은 73%에 달한다. 전시업계에서는 통상 전시장 가동률 한계를 80%로 보며, 70%에 이르면 시설 관리가 어려워 추가 확장이 필요하다고 본다. 엑스코 관계자는 "세계 유수의 전시장 대부분 가동률이 50%대다. 추가 확장이 꼭 필요했다"고 말했다.
▲대형 전시를 위한 전시장 증축은 중요하다. 하지만 '전국의 모든 전시장이 대형화해야 하는가'는 다른 문제다. 사진은 올해 킨텍스에서 열린 서울모터쇼 전경. ⓒ뉴시스 |
크게 보면 결국 '전시산업 선진화를 위해 전시·컨벤션 가용부지가 확대돼야 한다'는 논리다. 정부도 이와 같은 취지에 공감한다. 정부는 지난해 발표한 신성장동력분야 가운데 하나로 'MICE(Meeting:기업회의, Incentives:관광, Convention:컨벤션, Events:국제행사)'로 대표되는 전시·컨벤션산업을 선정했다. 하지만 애정어린 눈으로만 바라보기에는 적잖은 문제가 산재하고 있다.
전시장은 넘치고, 콘텐츠는 부족하고
우선 꼽을 수 있는 문제점은 전시산업이 지나치게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는 것이다. 정부가 집중육성 계획을 발표한 18개 전시회 중 부산의 조선해양대전을 제외한 모든 행사가 수도권 전시회다. 이는 추가 부작용을 낳고 있다.
삼성·LG 등 국내 대형 바이어와 해외 유수 바이어가 상대적으로 국내 전시회에 큰 매력을 가지지 못하는 판국에 정부 육성마저 일부 전시회에 편중되니 자연스레 소형 전시회는 서로 배끼기로 연명하게 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엑스코가 키운 그린에너지 액스포다. 대구에서 성공 사례가 나오자 다른 전시회도 경쟁적으로 비슷한 테마의 전시회를 내놓은 바람에 내년 쯤에는 유사 전시회가 전국 십여 곳에서 난립할 전망이다.
수도권의 전시·컨벤션센터 관계자 A씨(익명 요청)는 "전시회가 너무 난립한다는 점은 문제다. 어느 정도 조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백창곤 계명대 전시컨벤션학과 초빙교수는 "서로 괜찮은 전시회를 자꾸 유치하려 경쟁하다보니 문제가 생긴다"면서도 "인위적으로 정부가 나서 차별화를 유도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독일의 경우 전시산업진흥회격인 아우마(Auma)에서 교통정리에 나섰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고 언급했다.
전시장들이 출혈경쟁에 나서는 근본 원인은 결국 전시장 난립이다. 전시장 수는 최근 십여 년 사이에 급증했는데 전시 콘텐츠는 부족하다보니 한 전시장의 성공사례를 너도나도 모방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벡스코 관계자는 "대구는 섬유, 광주는 광산업 등으로 차별화를 해 놓으면 이를 어느 정도 보전해줄 방안이 필요하다. 전시장 난립을 우려하는 목소리는 분명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 ⓒ프레시안 |
만성적 적자 해소 방안 있나
전시·컨벤션 시설의 만성적 적자 구조도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현재 국내 전시장 중 흑자를 내는 곳은 코엑스와 벡스코 단 두 곳에 불과하다. 킨텍스는 지난해 말 26억8000만 원 적자를 내 2년 연속 적자며 엑스코는 지난 2001년 이후 누적 적자액만 100억 원을 넘어섰다. 일부 전시장은 적자 규모를 줄이기 위해 감가상각비를 손익산정시 제외하고 발표한다. 통상 전시장의 한해 감가상각비는 50~70억 원 규모다.
전시·컨벤션센터가 지역 경제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커 단일 센터 수익성만으로 효용성을 따지는 것은 무리라는 지적도 물론 있다. 경기도 경제정책과 관계자는 "직접 유발효과보다 간접적 파급효과가 더 크다는 면을 봐야 한다. 바이어나 학회가 센터에 들러서 체결하는 계약 규모와 인근 시설에서 소비하는 금액 등을 다 따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전시장 건설비용이 지역민의 세금으로 충당된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곤란하다. 경기도에 따르면 킨텍스 제2전시장 건립사업에 투입되는 비용만 3591억 원에 달한다. 이 중 1/3이 경기도민의 세금으로 충당된다. 사정이 이 정도이니 적자 문제를 "성장하는 산업이니 당연한 것"이라는 식으로 두루뭉술 넘어가는 태도는 문제다. 취재 결과, 일부 전시장은 당기순손익을 집계조차 않는 것으로 확인됐다.
지원만 한다면 모든 전시장이 성장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한국전시산업진흥회에 따르면 지난 2007년 한국에서 열린 전시면적의 66%가 국내참가업체 면적이다. 해외 참가업체의 경우도 절반 이상은 국내에 진출한 외국기업의 에이전트로 실제 해외에서 국내 전시회에 참여하는 비율은 극히 저조하다.
대형 전시장이 과연 업계의 요구만큼 많이 필요한지도 의문이다. 앞으로 수년 내에 국내 상당수 전시장이 3만㎡ 이상의 전시면적을 갖게 되지만 이 정도 규모의 전시회는 한해 국내에서 열리는 400여회 전시회 가운데 3%에 불과하다. 무조건 '짓고 보자'는 식의 접근이 능사가 아니라는 얘기다.
A씨는 "지자체들이 일단 돈이 된다고 하니 너무 이 산업을 쉽게 보는 것 같다. 운영상 적자가 엄청난데 이런 부분도 고려하지 않고 일단 짓고 보자는 식으로 나서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황희곤 한림대 컨벤션이벤트경영학과 교수는 "지역에 이미 있는 전시장을 보다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이 있다. 부산과 창원이 조선관련 전시를 같이 하는 식"이라며 "적자를 줄이기 위해 전시장의 가동률을 올리고 지역 특성에 맞는 행사를 보다 열심히 발굴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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