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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과 피의자의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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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노무현 '전 대통령'과 피의자의 권리

[법치의 표리(表裏)]"정치적 의미 부여보다 사실 규명이 먼저다"

연일 언론을 달구던 노무현 전(前)대통령 사건이 정점으로 치닫고 있다. 박연차 씨에 대한 국세청의 탈세혐의 고발로 시작된 이 사건 수사 과정에서 노 전 대통령의 형인 노건평 씨와 측근인 이광재 의원 등이 구속되었고 마침내는 노 전 대통령의 가족, 친척이 미화 600만 달러의 돈을 받았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청와대 비서관이 심부름꾼의 역할을 맡아 청와대 관저로 돈을 운반하였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노 전 대통령을 열렬히 지지하던 사람들도 할 말을 잃은 듯하다.

검찰에 출석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응과 관련해서 많은 사람들이 변호인의 참여, 진술거부권 행사 등 피의자로서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타당한지 의문을 표시한다. 어차피 정치적, 도덕적으로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고 스스로 자신을 버리라는 말까지 한 마당에 굳이 권리를 주장하는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에는 지난 4월 7일 노 전 대통령이 발표한 사과문을 보고 느낀 심정이 담겨있는 것 같다. 정상문 전 청와대 비서관이 박연차 씨로부터 돈을 받은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이 사과문은, 도덕성에 관한 한 역대 어느 정권보다도 깨끗하다고 자부하던 참여정부에서 대통령의 가족이 돈을 받은 사실을 인정했다는 점에서도 경악스러운 것이었지만, 돈을 받은 주체를 노 전 대통령 본인이 아닌 '저의 집'이라고 한 점에서도 미묘한 파장을 일으켰다.

'집'에서 받은 것을 남편이 모를 수가 있느냐는 불신도 컸지만, 아내가 받았건 아들이 받았건 잘못은 마찬가지인데 그냥 안고 갈 일이지 굳이 가족 핑계를 대느냐는 반감이 더 심했던 것 같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예전에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이 수사를 받던 당시의 얘기를 꺼내면서 적어도 그들은 가족이나 측근 핑계를 대지는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언론 매체에서 노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서 "치밀한 법리 검토를 바탕으로 사법처리를 피하기 위한 차단막"이라거나 "변명처럼 들리고 궁색해 보인다. 모든 의혹이 노 전 대통령 본인을 둘러싸고 일파만파로 번져왔는데도 그동안 전혀 진실을 밝히지 않았다"라고 비난을 하는 것을 보면서 노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마저도 차라리 남자답게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 30일 자신의 변호를 맡은 문재인 변호사(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 보좌진들과 함께 검찰에 출석하고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 ⓒ연합

그러면 막상 검찰의 소환조사를 받는 노무현 전 대통령으로서는 어떤 대응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지난 정권의 대표자로서 책임을 인정하고 한 마디의 변명도 하지 않아야 할까. 혹은 피의자로서의 권리를 행사하면서 사실관계 하나하나에 대하여 공방을 벌이는 편이 맞을까.

내 의견을 묻는다면 후자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어떤 사건에 대해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먼저 사실관계가 확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피의자의 권리를 비롯하여 형사소송법에 규정되어 있는 여러 제도들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설계된 것이기 때문이다. 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는 피의자에게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단순히 안심하고 조사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검찰의 공격과 피의자 측의 방어권 행사가 균형을 이룰 때 사안의 진상을 밝힐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아지기 때문이다.

노 전 대통령이 검찰청에 출석하여 조사를 받았지만, 이것으로 사건이 종결되는 것은 아니다. 구속이건 불구속이건 기소될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이는 이 사건은 재판을 통해서 법적인 검토가 이루어질 것이고 그 이후에도 도덕적, 역사적 평가를 받아야 한다. 올바른 평가를 위해서는 우선 편견 없이 사실관계를 규명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며 그것은 검찰의 치밀한 수사와 함께 피의자인 노 전 대통령의 방어권이 자유롭게 행사될 때 가능해진다.

전직 대통령이 피의자로 소환된 사건의 경우 검찰로서도 가능한 모든 역량을 다 동원해서 수사를 하게 된다. 일각에서는 검찰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공개하고 노 전 대통령 측의 대답을 들어야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그것은 수사 실무를 잘 모르는 입장에서나 할 수 있는 말이다.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서 수사기관은 때때로 피의자가 짐작도 못한 증거를 확보하고 있다가 들이밀어야 할 때도 있다. 미리 피의자 측에 모든 것을 알려줄 경우 그에 대비할 여유를 주게 되고 자칫 사건이 미궁에 빠질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전직 대통령이라는 이유,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을 일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노 전 대통령에게 혐의를 부인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주장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변호인의 도움 등 받을 수 있는 도움을 다 받아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것이 진실을 파악하는 데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논란이 되는 사건은 대개 그렇지만, 노 전 대통령 사건에 있어서도 사건의 정확한 진상이 밝혀지기 전에 성급한 평가가 난무한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한편에서는 "노 전 대통령의 비리 의혹은 5년 동안 이 나라 국정을 떠맡았던 정치세력이 허상이요 신기루였음을 증언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생계형 범죄"라거나 "정치 보복"이라는 말을 들먹이며 검찰 수사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사건에 대한 평가는 국민과 역사의 몫이며, 노 전 대통령을 지지했던 사람이건 반대했던 사람이건 국민들에게는 먼저 진상을 알 권리가 있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아직 수사도 끝나지 않는 사건에 대해서 성급한 비난을 하려 드는 것이나, 혹은 대통령을 둘러싸고 수십억 원의 돈이 오간 사건에 대해서 무조건 수사를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나 합리적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다. 먼저 실체를 파악한 후에 비난이나 옹호를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검찰 수사에는 변호인이 동석을 하여 신문과정에 참여를 했다. 스스로 판사와 변호사를 지낸 법률가인 노 전 대통령이 변호인과 함께 조사를 받은 것은 피의자로서의 권리를 충분히 행사하고 말하고 싶은 내용을 자유롭게 말하고 싶다는 뜻으로 보인다. 사안의 진상을 밝히는데 도움이 된다면 반감을 가질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검찰의 수사를 통해서건 노 전 대통령 측의 변론을 통해서건 이 사건의 진실을 반드시 밝혀져야 하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입장과 상관없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지난 정부의 비리가 밝혀지고 전직 대통령이 조사 받는 것은 국민의 한 사람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수사를 담당한 검찰이나 혐의를 다투는 노 전 대통령이나 어떤 면에서는 진실을 밝혀야 할 의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각자 가지고 있는 권한과 권리를 사용해서 도대체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그러한 일이 일어난 원인은 무엇인지 이론의 여지없이 규명하기를 바란다. 철저한 진상 규명과 그것을 기초로 한 반성만이 다시는 이런 부끄러운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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