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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빅뱅이 무수리인가요?"

[나도원의 '대중음악을 보다'] 관제동원-애국주의-대중예술인의 삼각퍼즐

옛것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한 청기와집 사람들다운 발상이다. '빅뱅' 등에게 '나라사랑 랩송'을 부르게 한다는 발상에서 관제동원에 대한 애틋한 향수가 풍겨 나온다. 상상하는 것 이상의 기상천외한 일들이 일상이 되어 이제 남산에서 화산폭발이 일어난다 해도 믿을법할 마당이라지만, 그 분들이 '건전가요'의 추억까지 되살려주시겠다니 좀 심했다. 차라리 누군가를 음악인으로 거듭나게 해주는 편이 나아 보인다. 어렵지 않다. 콧노래를 대충 악보에 옮겨 주고선 음악저작권협회에 등록하면 된다. 물론 그렇게 한심한 일은 본 적이 없다. '박정희 작사·작곡'의 <새마을노래>만 제외하면. 지금은 탐사로봇이 화성으로 떠나는 21세기다.

'검토 중'이라는 발표는 여론을 보고 진행 여부를 결정하는 공적 수순이다. 이번에는 누군가의 '돌출행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라 사정은 안 좋아지고 인심까지 잃은 시점에 3·1절 90주년을 계기로 쓸 만한 이벤트를 만들어내고자 한 모양이다. 상급자의 지시에 실무진이 머리를 쥐어짜는 고초를 겪거나, 윗선이 즉흥적으로 아이디어를 내고 스스로 대견스러워하며 실행방안을 만들어내라고 하는 장면이 그려진다. 아무리 유능한 인재라도 어떤 조직에 들어가면 무능해지는 이유는 정치적 이해와 역학관계 속에서 생존해야하기 때문이다.

결국 '위 아 더 월드(We Are The World)'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그런데 자발성에서 관제동원으로, 기아구호에서 정권수호로 방식과 목적이 바뀌었다. '관제'와 '즉흥성'은 최근에 발표한 음악산업 관련 정책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외국의 그래미상과 같은 시상식과 빌보드·오리콘 같은 차트를 관 주도로 만들겠다는 안도 있다. 없는 것보다는 낫지만, 상기한 외국 사례들은 모두 민간에서 만들어져 정착한 것들이다. 외주를 주는 방식이 될 테니 그러려니 해도, 실무진이 충분히 검토하고 방안을 세우기 전에 발표한 정황이 있다. 즉흥적 아이디어와 관제만능으로 무장한 상사를 모시면 이렇게 아랫선은 영락없이 고생한다.

▲빅뱅은 한국 아이돌의 대표주자이자 대중음악계 최고 스타다. 그만큼 문화적으로, 정치적으로도 상징성을 갖는다. ⓒ뉴시스

철 지난 관제동원과 과도한 애국주의의 만남

역시 허술한 냄새가 나는 '나라사랑 랩송' 기획은 이른바 애국주의가 온 나라에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는 상황이라 가능했다. 그런데 현 정권의 선구적인 성취가 아니라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특히 2002년부터 2006년 무렵까지 정점을 이루었는데, 이 시기는 이전과 달랐다. '국민'이 자발적이었으며 시장이 주도했다. '국민'의 감성에 호소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기업PR과 상품CF는 일상화의 지표였다. 외국에 나간 운동선수가 대사관의 태극기에 감격하고, 해외 주둔군 군영의 은행지점에 태극기가 펄럭이고, "한국 사람은 눈이 작아 반도체를 잘 만들고 밥을 빨리 먹어 발전했다"는 황당한 카피까지 연일 브라운관을 채웠다.

기업·상품 광고들이 과도한 애국주의에 편승하거나 아예 조장한 것 외에도 소속 집단에 대한 애정과 자신감 회복을 넘어버린 사례들은 많다. 애국주의의 효용도 존재하지만, 중요한 가치들을 유보할 수 있게 하는 방패로 이용되고 진실을 은폐하는 눈가리개가 된다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한다. 개발권이 생존권보다 중요하고 패권이 인권을 앞서게 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무엇이든 적정선을 넘으면 과도함이 된다. 과도하다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말이다. 그리고 일상화의 징후는 관습화를 예고하고 관습은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한다. 그래서 경도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애석하지만 지금도 다르지 않다. 몇몇 재벌기업은 유난히 국가를 내세운 광고를 계속 내보낸다. TV뉴스들은 문화콘텐츠 '강국'을 제안하고, 스포츠 스타를 떠들썩한 영웅 만들기에 주연으로 출연시킨다. 그런데 예술은 삶과 가까이에 있는가. 엘리트 스포츠 국가의 주민들은 기껏해야 퇴근 후에 공원을 줄지어 걷거나 약수터 나무를 등으로 때리고 있을 뿐이다. 더 이상 갖다 바칠 금붙이도 남아있지 않은 구성원들을 줄지어 세워 집단을 위해 희생을 강요하는 행렬에 동참시키려는 기도는 성공하지 못한다. 그런 일은 개미들이나 성공했다. 애국심이 없어서가 아니다. 분노한 사람들은 다시 이렇게 외치고 싶어 한다. "우리(나라), 사랑하게 해주세요!"

가수와 팬덤을 우습게 여기는 것이자 중요하게 보는 것

'나라사랑 랩송' 역시 벌써 빈축을 사고 있으며 게시판에는 팬들의 반대가 줄을 잇고 있다. 아무리 시간이 부족해 아침밥도 못 먹는 비정상적인 교육환경에 살더라도 집에 뉴스가 나오는 TV가 있는 학생이라면 이런 이벤트가 가수에게 손해라는 걸 안다. 재치 있는 팬은 이렇게 적었다. "빅뱅이 무수리인가요?", "인기 있는 가수 이용해먹을라고?" 그들은 자신들에게 나라사랑 마음을 되새겨주겠다고 웃음 짓는 아저씨들의 속내를 훤히 알고 있다. 수십만의 활동적인 팬덤을 적으로 만들 정도로 대담하다면 더욱 기상천외한 발상도 실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회색성장'에 매진하느라 바쁘더라도 그 정도 수준은 아니길 빈다.

듣자하니 빅뱅이 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한다. 팬덤은 충성도에 따라 스타를 지원하는 개념으로 음반과 책을 산다. 열성 지지자의 투표 참여와 비슷한 의미이다. 이러한 소비행태가 자리 잡았다. 그런데 '나라사랑 랩송' 제작에 참여하는 순간 아무리 인기 있는 아이돌 그룹들이라 해도 정권홍보에 가담했던 선배들의 오명 밑에 이름을 보태게 되리라는 건 누구나 알 수 있다. 팬들을 게시판이나 도배하고, 비판조의 기사 밑에 괜한 트집이나 잡는 집단으로만 보면 오산이다. 기실 현 정권을 탄생시킨 기성세대가 다음 세대의 지성과 의식을 염려할 자격이나 있는지 모르겠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이 지난 4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에브리싱 노래연습장에서 '음악산업진흥 중기계획'을 발표하고 난 뒤 기념촬영을 하고있다. 이곳은 특정 기획사가 소유한 곳이라 발표후 논란이 됐다. ⓒ뉴시스
그런데 시작과 함께 해프닝이 되어버린 사건을 만지작거려보면 좀 심각한 얘기들이 굴러 나온다. 정권이 대중예술을 활용하는 법을 타진해보고 있다는 것이다. 대중예술을 통한 선전은 고도의, 그리고 필수적인 정치기법이다. 최근 문화부는 음악산업성장정책을 발표했으며, 대통령 내외는 독립영화를 직접 관람하고 전용관을 언급했다. 실효성 있는 지원정책들을 연이어 폐지하면서도 문화예술계에 손짓을 보내고, 대중스타와 팬들을 자기 편으로 만드는 작업의 일환이다. 그럴 가능성은 낮지만, 성공한다면 정치적으로 영리한 제스처다.

수적으로는 적어도 대중예술인의 활동과 작품은 지하수처럼 깊고 넓게, 그리고 길게 영향을 미친다. 예술은 사회의식과 정치성향을 창조하진 않지만 대중이 이를 발견하거나 확인하도록 하며, 나아가 강화시킨다는 사실을 여타 정치세력은 진정으로 인식하고 있는가. 생각을 드러낼 기회가 없어 발을 구르고 있는 잠재적 지지자들을 향해 먼저 손을 내밀 현실적이고 창조적인 정책을 고민해왔는가. '소 잃고 개집 고치는' 현 정권은 이용가치와 활용수법만은 인식하고 있다. 물론 여전히 우습게 여기고 있지만. 왜?

대중예술인 또는 문화예술인은 책임에서 자유로운가

자기 의사를 표출하는 가수들이 적은 이유는 절대적 '갑'의 위치에 있는 기획사들이 주류 대중음악을 장악하고 있는 현실과 무관치 않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공장 같은 기획사 시스템은 선진국에선 흔치 않은 유형이다. 하지만 대중예술인이 충분히 존중받지 못하는 현실에 적극적으로 기여한 부류는 따로 있다. 예술을 말하고, 인간과 삶을 말하고, 아름다움과 세상을 말하면서도 그러한 가치에 반하는 (굳이 이름으로 종이를 더럽히고 싶지 않은) 신문에 콘텐츠를 제공한 대가로 이름과 돈을 키워온 이들도 그런 부류에 속한다.

그들의 면면은 영화평론가, SF소설가, 스타급 영화전문기자, 영화자막으로 유명한 번역가, 음악평론가와 문학평론가, 시인과 소설가, 또 만화가와 미술평론가를 막론한다. 관념적인 옳음에 대한 생각은 가지고 있지만 실제적인 의식은 그에 미치지 못하거나, 이득을 위해 스스로에게 눈감아버리거나, 그도 아니면 동조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만약 그들의 명단을 적기라도 하면 적잖이 놀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곧이어 그들을 변호할 궁리를 시작할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들은 훗날 보다 거창하게 장식된 명부에 초대될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

그 신문의 문화면이 우수하다는 주장이 반박된 지 꽤 지났다. 공권력이라는 이름의 국가폭력을 정당화하려는 책에 서평으로 힘을 실어주면서도, 지향이 다른 서적을 소개할 때엔 핵심은 외면하고 "누구에게 유용하다"는 식으로 써먹을 거리나 정리해준다. 또는 "판단은 독자의 몫"이라는 (너무나 당연한!) 얘기로 얼버무린다. 가난한 사람들 이야기를 하다가 구조적인 문제 앞에 이르면 사고의 플러그를 뽑아버리고 온정주의의 한계 안에 스스로를 포박한다. 물론 그들은 일관성 없다는 점에서 일관성을 자랑하지만, 일관성과 양심을 중시한다는 매체들의 지면에서 위에서 말한 이들 중 상당수를 다시 보게 된다는 것은 놀랍다. 그것은 열린 포용이 아니다. 능력만 있으면 과거에 너그러워도 된다는 실용주의 한 양태일 뿐이다.

물론 문화예술인의 가치를 사회의식만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사회영역에선 지배층에 봉사했지만 예술영역에선 혁신의 역할을 맡아 훗날 내면의 혁명에 이바지한 예술가들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반대로 사회에 강력한 반항을 표하다가 길을 찾지 못해 결국 세상 탓할 시간에 자기일이나 잘하자는 식이 되어버린 경우도 많다. 반항심을 제공한 바로 그 체제에 흡수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 대중예술인 또는 문화예술인들의 사회적 행적은 기억해둘만한 이유가 있다. 다소 폭력적일 수도 있지만 최소한 기억은 해야 한다.

힘들어하는 이웃의 기운을 북돋우는 건 좋은 일이다. 그리고 이한철의 <슈퍼스타>처럼 자발적 창작일 때 더욱 가치가 있다. 또는 힙합가수 엘피(LP)처럼 기술적인 완성도에선 부족하더라도 거침없이 독설을 날림으로써 속을 시원하게 해주는 편이 낫다. 그런데 '나라사랑 랩송'은 이 정권의 행적들과 함께 대표적인 시대착오적 사례들 중 하나로 기록될 처지다. 아니다, 이것이면 충분하다. 그리고 재차 강조하는 것은 이 콩트가 강자 체제의 접착제 노릇을 해온 '과도한' 애국주의와 스스로 만들어놓은 대중예술의 가벼운 이미지와 관계한다는 사실이다. 가수들이 애국의 깃발을 흔드는 치어리더로 출연하는 연극의 연출자는 청기와집 사람들이지만, 조연 혹은 주연은 우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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