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그럴 것이다. 언론의 표현을 빌리면 노조 정・부위원장으로 당선된 사람은 '친사장파'다. 이병순 사장이 서운해 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잠깐이다. 짧은 기쁨 뒤에 만성 두통에 빠져들게 돼 있다.
▲ KBS노조 선거 개표장면 ⓒ미디어오늘 |
누구일까? 대규모 구조조정의 1차 대상이 될 사원들이 누구일까? 두 부류로 추릴 수 있다. 기술직과 시니어그룹이다.
아날로그 방송을 디지털 방송으로 바꾸는 작업이 속도를 내면 낼수록 유휴인력은 많아진다. 방송 콘텐츠를 생산하는 직종이 아니라 방송 시스템을 운용하는 직종에서 상대적으로 많은 유휴인력이 발생한다. 그 직종이 바로 기술직이다.
방대한 조직을 슬림화하면 할수록 잉여인력이 많아진다. 두 팀을 한 팀으로 통합하고 세 개 부서를 한 개 부서로 축소할수록 '장' 직함은 반비례해서 줄어들고 상대적으로 높은 연봉의 가치 또한 줄어든다. 그 대상이 바로 시니어 그룹이다.
이들부터 쳐내야 한다. 이병순 사장이 진정으로 방만・부실경영을 털어내고자 한다면, 사심없이 구조조정을 하고자 한다면 이들에게 칼을 대야 한다.
하지만 어렵다. 기술직과 시니어 그룹은 이병순 사장의 강력한 지지기반이다. 노조의 주축세력이기도 하다. 이들에게 칼을 겨누는 순간 이병순 사장의 회사 장악력은 떨어진다. 노조의 지원도 줄어든다.
이러면 어떨까? 노조가 이병순 사장의 구조조정을 묵인하면, 구조조정 명단에 기술직과 시니어 명단 '일부'가 포함되는 것을 눈감아주면 어떻게 될까?
그럼 이병순 사장의 구조조정이 탄력을 받겠지만 더불어 다른 곳에서도 탄력이 붙게 된다. 노조 지지자 '일부'에서 거센 항의와 반감이 나타날 수 있다.
겨우 66표 차로 당선된 노조다. 이런 노조가 지지층 '일부'의 이반을 방기하면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롱런 가능성은 그만큼 줄어든다. 51과 49의 산술적 차이는 크지 않지만 정치적 차이는 엄청나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해법을 사내에서가 아니라 정치권에서 구하는 길이 있다. 여권에 호소해 수신료 인상을 따내는 길이 있다. 가장 효율적이고도 가장 빠른 길이다.
하지만 이 방법 또한 그리 쉬운 게 아니다.
여권의 지원을 끌어내려면 명분을 줘야 한다. 정부와 한나라당에 수신료 인상 명분을 줘야 한다. 그 명분이 바로 구조조정이다. KBS 노력이 가상하니 이제 선물을 줘도 된다고 한나라당이 대놓고 얘기할 수 있게 하려면 먼저 자기부터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쉽지 않다. 힘없고 '빽'없고 급여조차 많지 않은 계약직을 칼질하는 정도로는 '자기희생'을 주장할 수 없다. 자기희생의 극적 모습을 연출하려면 '자해'해야 한다. 정규직을 손대고 지지세력을 쳐내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어차피 물고 물리게 돼 있다. 이게 이병순 사장의 처지다.
마지막 남은 한 가지 요소, 국민 여론은 어떨까? 여권이 눈 딱 감고 수신료를 올려주려고 하면 국민이 순순히 응할까? 기대할 바가 못 된다.
KBS는 스스로 문을 닫고 말았다. 노조 선거를 기점으로 국민과의 소통창구를 스스로 닫고 말았다. 이병순 사장이 어떤 일을 벌이든 사원들은 공정방송을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하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쇼윈도를 없애버렸고,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는 심정으로 수신료 인상에 동의해 달라고 호소할 확성기를 없애버렸다.
YTN을 보면 안다. 낙하산 인사가 사장실을 꿰차도, 대표 프로그램이 불방 돼도 국민이 지지를 철회하지 않는 이유를 보면 안다. 노력하고 있다고 믿는다. 방송통신위의 징계와 회사측의 고소・고발을 마다하지 않고 방송을 지키려는 사원들을 믿는다. 그런 사원들의 대열이 유지되기만 하면 방송의 본령을 세우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판단한다.
KBS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이 생명줄을 스스로 끊어버렸다.
* 이 글은 뉴스블로그 '미디어토씨(www.mediatossi.com)'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