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 폐지의 열기가 여의도 국회 앞에서 광화문 교보문고 앞 거리로 자리를 옮겼다. 토요일인 18일 오후 5시부터 4시간 동안 국가보안법 완전폐지를 열망하는 5천여개의 촛불이 광화문 일대에 켜졌다.
***광화문, 국보법 폐지 5천여개 촛불 점화**
사전행사에 이어 오후 6시부터 본대회가 시작했다. 파병반대·국보법폐지 등 각종 정치집회 사회자를 맡았던 개그맨 노정렬씨가 이날 행사에도 사회자를 맡았다. 본대회 시작은 촛불점화로 시작됐다.
촛불점화식은 김진선(37, 부평), 이승민(7) 모자가 불을 밝히면서 이뤄졌다. 아들 승민군은 어머니 품에 안겨 단상에 마련된 커다란 초에 불을 붙이고 난 뒤 집회 참가자들을 향해 고사리 손을 흔들었다.
단상에 내려온 김진선씨는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국가보안법은 죄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받게 한 악법, 너네들이 컸을 때는 그런 일이 없어야 된다'고 아들 승민군에게 말해줬다"고 말했다. 김씨는 이어 "집에서만 있을 것이 아니라 이런 광경(촛불집회)을 아들에게 보여줘 마음이 뿌듯하다"고 집회 참가 소감을 덧붙였다.
단상에서는 각계 대표자들의 발언이 이어지는 가운데 집회대오 주변에는 다양한 형태의 국가보안법 폐지 선전전이나 홍보활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또 겨울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오뎅 국물을 마시며 몸을 녹이고 있는 사람들도 상당수 눈에 띄었다.
무대 왼쪽 광화문 우체국 앞에는 5명 남짓의 대학생들이 촛불을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그들 중 백미란(20, 인천 전문대)씨는 국회 앞 단식 농성에도 참여하고 있다. 백씨는 "내년이면 해방 60주년이다. 이에 앞서 국가보안법을 올해까지는 폐지 시켜야하지 않나. 지금까지 많이 참아왔다"고 말했다.
백씨는 "지나가는 행인들 중에 국가보안법 폐지에 찬성을 하는 사람도 있고,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촛불을 나눠주면 다 받아간다"며 "효순-미선 추모 촛불이 켜진 이후 탄핵, 파병 등을 거치면서 촛불문화가 정착한 것 같다"며 촛불집회에 대한 시민들의 달라진 태도에 대해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이날 연단에는 국회 법사위간사로 일관되게 국보법 완전폐지를 주장해온 최재천 열린우리당 의원도 올랐다. 최 의원은 "2백99명 국회의원 중 1백61명이 동의한 법안에 대해 상정과 심의조차 거부하는 한나라당이 과연 진정한 민주주의 정당이냐"며 "악법을 폐지하는 것이 국회의원인가, 악법을 지키는 것이 국회의원인가"라며 성토한 뒤 "민생이 먼저지 국가보안법 폐지가 뭐가 중요하냐고 질문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인권, 사상·양심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이 바로 민생"이라고 주장했다.
***김삼석씨, "지금도 고문기술자들이 국정원에 있다"**
이날 무대에는 과거 '남매간첩단조작사건'으로 안기부에서 고문을 당했던 김삼석씨가 집회 참가자들을 향해 큰 절을 올린 뒤 "저는 안기부 지하실에서, 대전교도소에서 살아남았다. 그곳에서 목숨을 잃은 수많은 선·후배 열사들에게 죄송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어내기 위해서"라고 큰 절을 올린 이유를 밝혔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이기도 했던 김씨는 "중앙일보가 조사관 과거 전력을 크게 보도하며 의문사위의 정당성을 공격할 때 색깔론이 21세기에도 여전하다는 생각으로 애통했다"며 "이제는 수구보수 신문들의 색깔론 공세를 보지 않기 위해서라도 국가보안법은 폐지되야 한다"고 말했다.
김씨는 또 안기부 지하실에서 성적농락을 당했던 기억을 되짚으며 "현재도 국가정보원에는 과거 성고문과 전기고문기술자들이 존재하고 있다"며 "이들에 대한 처벌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최민희 민언련 사무총장, "한나라당, 국민의 손을 잡으라"**
김씨에 이어 최민희 민언련 사무총장도 연단에 올라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지름길에 대해 발언했다. 최 총장은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언제까지 영남권 공주로, 유신공주로 머물러 있을건가. 국가보안법폐지를 당론으로 정해 국민들 손을 잡아라"며 "대권 꿈을 꾸고 있는 박 대표가 국가보안법 하나 폐지 못시키면서 어떻게 대통령이 될 수 있나"라고 말했다.
최 총장은 이어 과거 운동권 출신인 김문수·이재오·심재철 한나라당 의원들에 대해 "주성영 의원이 이철우 열린우리당의원에 대해 간첩 운운할 때, 왜 입을 다물고 있었냐. 정형근 의원 고문 사실이 드러났을 때 왜 모른척 하고 그냥 있었냐"고 강하게 질타하기도 했다. 그는 이어 열린우리당에 대해서도 "조선일보를 보지 말고, 조선일보 프레임에서 벗어나 국민들 손을 잡아라"고 덧붙였다.
노래패 우리나라, 희망새 등의 문화공연이 발언 사이사이 배치됐고, 오후 8시30분경 집회는 막바지를 치닫고 있었다. '국가보안법 완전 철폐하여 민주개혁 완성하자'고 구호를 외치는 사회자 노정렬씨의 목소리도 쉬어 있었다.
***정착한 촛불집회...달라진 집회 주변 풍경들**
한편 집회 장 주변에는 오뎅, 번데기, 라면, 구운 옥수수 등을 파는 상인들이 즐비했다. 집회 참가자들은 이 곳에서 따뜻한 오뎅 국물을 떠 먹으며 추운 날씨를 이겨내는 모습이 보였다. 종이컵에 담긴 오뎅국물을 마시던 한 집회참가자는 "촛불집회가 몇 년 동안 이어지면서 집회장 주변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다"며 "상인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촛불집회가 평화로운 행사라는 것을 반증하는 게 아닌가"라고 말했다.
이 참가자의 말처럼 촛불집회 내내 경찰들과의 갈등은 전무했다. 물론 집회장 주변에 많은 경찰 병력들이 배치가 되어 있었지만, 전투경찰들의 표정에는 '긴장'보다는 빨리 집회가 끝나길 원하는 '바람'만 목격됐다.
올해 탄핵국면에서 촛불집회를 두고 불법 시비가 일었던 것은 말그대로 지나간 옛일인 듯했다.
선전전 풍경도 많이 달라졌다. 물론 고전적 방식대로 선전물을 한아름 들고 소리높이며 내용을 선전하고, 선전물을 나눠주는 모습도 있었지만, 새로운 풍경도 목격됐다. 무대 오른편 교보문고 입구에는 둥그런 고수머리 가발을 쓴 사람들이 지나가는 행인들을 붙잡고 사진을 무료로 찍어주고 있었다. 이들은 '6·15 남북공동선언 이해을 위한 청년모임(준)' 소속 회원들이었다.
이 모임 대표 윤경희씨는 "사이월드 미니홈피 '미니미'에 올릴 수 있도록 집회 참가자들이나 지나가는 행인들의 사진을 찍어주고 있다"며 "젊은층에게 크게 인기있는 '미니미' 사진도 찍는데 대해 일반 행인들도 거부감없이 잘 응한다"고 말했다. '미니미'는 사이월드 미니홈피에 마련된 가상 공간으로 많은 네티즌들이 애용하고 있다.
***불탄 국가보안법 뒤엔 '민주'가 있더라**
이날 집회 마지막은 '국민연대' 공동대표 및 집행위원장들이 모두 함께 연단 앞에 마련된 대형 국가보안법 현수막을 불태우는 상징의식으로 마무리됐다.
집회참가자 5천여명의 뜨거운 눈길을 받으며 대표자들은 대형 현수막에 불을 붙였다. 순식간에 현수막은 불타올랐고, 타버린 현수막 뒤에는 '민주'라는 글귀가 나타났다. 국가보안법 폐지의 궁극적 목표가 민주주의의 진전임을 상징한 것이다. 풍물패의 '다스림'은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환호와 박수가 계속된 가운데, 집회참가자들은 '강강술래'에 맞춰 대동놀이를 질펀하게 벌인 후 행사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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