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3년 산업연수제 도입 이후 10년이 지났다. 산업연수제는 그간 '연수생'이란 이름하에 합법적으로 노동력을 '착취'하게 한 불합리한 제도로서 무수한 비판을 받았다. 정부는 이를 수용 지난해 7월 다소 진전된 고용허가제를 도입했으나, 산업연수제와 병행실시로 말미암아 정책의 실효성에 대해 의구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참여연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외국인이주노동자대책협의회는 '산업연수제 10년이 남긴 것과 외국인력 제도의 나아갈 길'이란 주제로 16일 오전10시부터 약 3시간동안 국가인권위 배움터에서 토론회를 개최했다.
***"정부, 산업연수제 폐지 아니라 고착화시켜려한다"**
산업연수제는 지난 1993년 도입된 후 인권침해, 불법체류자 양산 등 각종 폐단이 드러난 것은 기정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 법무부와 중기청 등이 산업연수제를 확대 강화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개선안'을 마련하고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정부는 고용허가제를 도입하면서 산업연수제를 단계적으로 축소해 폐지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고기복 외노협 사무국장은 이날 토론회에서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고기복 외노협 사무국장은 "최근 정부는 산업연수제를 개선한다는 명목으로 산업연수제를 고착화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며 "이는 수많은 폐단이 드러난 산업연수제를 점차 축소해 폐지하겠다는 당초 약속과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고 국장에 따르면, 지난달 11일 외국인력도입을 주관하고 있는 중소기업청은 국무총리 산하 국무조정실 외국인력 운영관련 관계부처 합동회의에서 "내년 산업연수생 배정쿼터를 올해 3만8천명보다 두 배인 6만명으로 확대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법무부 역시 지난달 29일 현행 산업연수 1년+연수취업 2년 산업연수제를 순수기능실습 2년 뒤 고용허가제로 우선 취업을 허용을 골자로 하는 개선안을 마련했다.
고 국장은 이에 대해 "중기청은 이익집단과 손발을 맞춰 노골적으로 산업연수제의 유지 확대를 의도하고 있고, 법무부 역시 중기청과 중기협의 의중에 따라 개악안을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정부, "일면적으로만 보지 말아달라"**
고 국장의 지적에 대해 법무부와 노동부를 대표해 토론에 참가한 이규홍 입국심사과 사무관과 권기섭 노동부 외국인력정책과장은 "일면적 해석"이라고 일축하면서도 "이주노동자의 입장과 기업의 입장을 같이 고려할 수밖에 없는 정부의 입장을 이해해달라"고 고충을 털어놨다.
이규홍 사무관은 "법무부의 개선안은 산업연수제를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간 산업연수제 실시기간 중 주된 문제점으로 부각된 송출기관 비리를 해소하기 위해 마련된 방안"이라며 "순수기술연수 2년 뒤 바로 고용허가제로 2년 취업을 하게 하면, 송출기관이 끼어들지 못하는 잇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권기섭 과장도 "사건별로 이주노동자 사건을 보면 참으로 불쌍하고 안타까운 것이 사실"이라며 "그러나 정부는 전체 국익을 고려하며 균형적인 시각 아래 정책을 추진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편 이들은 "개선안 마저도 현실에 적용해 폐단이 발생할 경우에 산업연수제를 폐지해야 한다는데는 정부 부처간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고 덧붙였다.
***"필요없고, 폐단 심하면 폐지하면 되지, 왠 개선안이냐", "이권때문에 폐지 못하나?"**
한편 정부 관계자들의 해명과 설명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패널들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즉 산업연수제의 문제점과 한계를 같이 공유하고 있으면서 굳이 폐지하지 않고 시한을 연장시키려는 의도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박경태 성공회대 교수는 "산업연수제를 유지해야 될 이유가 무엇인지 오랫동안 고민해봤다. 결론은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며 "산업연수제의 불합리성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정부를 포함해도 없는데, 왜 이런 얘기를 해야하는지 서글프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이어 "개선이든 개악이든간에 유지하려고 하는 이유는 결국 '돈' 때문인 것 같다"며 "산업연수제를 통해 이득을 보는 곳은 결국 사업주, 중기협, 중기청, 산자부가 아니겠냐"고 말했다. 그는 이어 "현재의 틀에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변칙적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완강히 제도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진 변호사도 "산자부와 중기청은 왜 산업연수제 존속을 통해 연수업체에 특해를 존치시켜야 하는지에 대해 명확한 해명이 있어야 할 것"이라며 "법무부도 이들 기관에 휘둘려 '개악안'을 내지 말고 연수제 폐지를 위한 로드맵과 고용허가제의 문제점 개선을 위해 주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홍세화, 시각-철학부터 바꿔야**
한편 수년 동안 프랑스 파리에서 택시를 모는 등 이주노동자 출신인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은 정책을 집행하는 정부가 먼저 이주노동자에 대한 시각과 철학을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홍 위원은 프랑스 체류 경험을 소개하며 "프랑스에서 택시를 운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산업연수제도, 고용허가제도 아닌 노동허가제의 혜택을 받았기 때문"이라며 "인간이 아닌 노예로 인식되고 있는 한국 이주노동자를 보면 참담한 심정"이라고 말했다.
홍 위원은 이어 "이주노동자에 대한 처우 수준은 한 사회의 인권수준을 알려주는 지표"라며 "우리 사회는 경제논리로 완전히 장악돼 있고, 이주노동자에 대해서는 더욱더 확실히 관철되고 있다"며 "이를 보완해야 할 사회부처인 노동부, 복지부, 법무부가 친자본성향의 재경부, 산자부를 견제할 의지나 노력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프랑스에서는 지식인, 언론, 심지어 정부 관계자들도 '불법체류'란 말을 쉽게 사용하지 않는다"며 "미등록이주노동자들에 대해 서슴없이 '불법'이라고 부르며, 강제단속하는 우리 정부와 시각과 철학에 있어 큰 차이가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정부는 이주노동자 문제를 말할 때 '정주화'의 위험성을 강조하는데, 이것 역시 철학과 시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며 "이주노동자가 이 땅에 정착을 하면, 그만큼 그들의 문화와 우리 문화가 비벼질 수 있는 기회이고, 다양성과 창의성을 발현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3시간여 진행된 이날 토론은 시민단체 인사 뿐만아니라 정부 관계자 역시 산업연수제의 문제점에 대해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부 관계자는 제도 존속 추진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피력하지 못한 채 "한번더 개선안을 시도해보고 그 때도 문제가 발생하면 폐지하겠다"는 약속으로 일관했다. 향후 정부가 산업연수제 개선안을 확정해 어떤 방식으로 국민들을 설득할지 귀추가 주목되는 부분이다.
이날 토론에는 조현철(변호사, 경남 민변), 이철승(경남외국인노동자상담소 소장), 황필규(변호사), 고기복(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 사무국장), 김형주(열린우리당 의원), 홍세화(한겨레 기획위원), 권기섭(노동부), 이규홍(법무부), 박경태(성공회대 교수), 김진(변호사, 민변)이 참여했다.
한편 이번 토론회를 준비한 박원석 참여연대 시민권리국장은 "산업연수제 존속-강화를 꾀하려는 산자부, 중기청에 토론에 참여해줄 것을 수차례 요청했지만, 결국 거부했다"며 "산업연수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지 않을 뿐 아니라 공론의 장에서 토론마저 거부한 것은 깊은 유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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