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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종교, 한 쪽에 꼭 판돈을 걸어야 하나?"

과학과 종교의 대화 <16> 독자의 말, 말, 말

지난 4월 시작한 '과학과 종교의 대화'가 독자의 뜨거운 관심 속에서 마무리를 앞두고 있다. 각각 과학자(장대익 교수), 신학자(신재식 교수), 종교학자(김윤성 교수)의 입장에서 진행되는 대화를 보면서 많은 독자들이 여러 가지 의견을 주었다.

오랜 만에 지적 유희를 느낄 수 있는 수준 높은 대화라는 의견부터 '현장' 과학자가 빠진 이런 대화 형식에 문제제기하는 과학자의 지적도 있었다. <프레시안>은 '과학과 종교의 대화' 연재를 마무리하면서 몇 가지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독자의 글 세 편을 간추려 싣는다.

세 필자를 대표해 김윤성 교수가 이런 독자의 문제제기에 답하는 글을 쓸 예정이다. '과학과 종교의 대화'는 연재를 보완해 사이언스북스에서 책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편집자>
장대익, 김윤성, 신재식 교수님께

프레시안에 연재된 세 분의 '과학과 종교의 대화'를 흥미롭게 읽고 있습니다.

솔직히 철학, 종교학 또는 신학과는 생판 다른 지질학을 전공하는 본인으로서는 낯선 용어들이 많아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 없지 않았으나 나의 평생 연구와 깊은 관련이 있어 거의 정독을 하다시피 읽었습니다.

우선 본인 소개부터 해야겠습니다. 본인은 40년 가까이 대학에서 화석을 다루는 고생물학자로서 생물의 역사 다시 말하면 진화에 관심을 기울여 왔습니다. 5년 전 정년퇴직한 사람으로서 세대가 다른 세 분의 논의를 탐독하면서 매우 솔직하고 담대한 내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가운데 국내에서는 아직 창조와 진화에 대해서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은 1980년대 중반 이후 간간히 여러 대중매체를 통해 있어왔습니다. 비록 논의의 내용은 매우 초보적인 것이긴 해도.

장 교수께서 자세하게 설명하신 대로 창조과학회 회원들이 1980년대부터 교회의 일반 교인들뿐 아니라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순회 강연을 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진화는 거짓이고 창조론이야말로 참 과학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그 강연에 참석하고 온 학생들은 본인의 지질학과 고생물학 강의와 상충되는 내용으로 혼란을 겪는 것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학생들을 통해 그들이 어떠한 내용으로 창조론을 주장하는지를 들으면서 "그것은 아닌데…" 하면서도 이들 논의나 토론에 한동안 뛰어들지는 못했습니다. 한창 자신의 연구에 몰두해야 할 시기에 이러한 비생산적인 논쟁에 말려들기에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만 혼란을 겪는 학생들에게 창조론과 진화에 대하여 고생물학의 입장에서 설명해 주는 것으로 그쳤습니다.

그러다가 1987년 뉴웰(컬럼비아대학 교수, 미국자연사박물관의 큐레이터로서 미국 고생물학계에 거두. 하버드대학의 굴드와 미국 자연사박물관의 엘드리지를 키워낸 교수)과 엘드리지(하버드대학의 굴드와 함께 1971년 단속평형 진화 모델을 발표하여 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킨 장본인)의 초청으로 6개월간 뉴욕의 미국자연사박물관에 머무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하루는 뉴웰이 나의 방을 찾아와 자신이 저술한 책이라며 권하는 것이었습니다. <창조와 진화(Creation and Evolution)>라는 제목의 책이었습니다.

이 책 내용에 매혹되어 속독한 후 "이 책의 내용은 제가 평소에 생각했던 내용이 잘 정리되어 있군요. 이를 한국에 돌아가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싶습니다"고 번역서 출간 의사를 밝히고 허락을 받았습니다. 귀국하여 1989년 <창조와 진화>라는 책을 번역 출간하였습니다. 이때부터 본인은 뜻밖에 진화론의 전도사처럼 여기 저기 불려 다니며 진화를 설명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습니다.
▲ 진화 논쟁을 다룬 <타임>의 표지. ⓒ프레시안

1991년 <과학동아> 편집기자가 창조와 진화의 논쟁을 특집으로 낸다면서 진화를 설명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이에 "진화는 고생물학자보다 생물학자가 설명하는 게 더 적격"이라고 사양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논쟁에서 진화의 설명은 인하대 양서영 교수(생물학)가 맡았고 창조론 쪽에는 당시 KAIST의 자료공학자인 K모 교수가 참여했습니다. 한 달 후 다시 <과학동아> 기자가 전화하기를 "다음 호에는 양 교수님의 글을 반드시 실어야겠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창조론 쪽 이야기가 주로 화석을 다루고 제목도 "화석 기록은 창조론을 지지한다"라는 거예요. 그러니 고생물학자면서 <창조와 진화>라는 책도 출간했으니 직접 이에 답 글을 실어야 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창조론 쪽의 글을 찾아 읽어보니 화석 전문가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아마추어 수준 이하의 글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논쟁에 참여하기로 하고 부랴부랴 "그게 아니다"라는 글을 발표하였지요. 제목은 "비전문가의 아전인수식 해석은 곤란하다"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두 번째 논쟁에는 서울대 환경대학원 김모 교수와 지리학과 배모 교수가 창조론을 설명했습니다. 여기서는 더욱 말이 안 되는 비전문가의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즉 지질학과 지리학의 기본 개념인 층서학적 상하와 지형학적 상하를 구별하지 못하는 만화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발달된 동물들은 노아 홍수를 피해 높은 곳까지 도망가서 익사해 상위 지층에 보존되었고 덜 발달한 동물은 멀리 도망갈 수 없어 낮은 하위 지층에 보존되었다는 겁니다.

층서학적 상, 하위는 생성 순서에 따라 오래된 지층은 하위, 신기 지층은 상위 지층으로 순서를 정한 것입니다. 이는 지형학적 상하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예를 들어 포항 해변의 신생대 지층은 지형으로는 가장 낮은 곳에 분포하지만 층서 상으로는 상위 지층입니다. 한편, 태백시 산정의 삼엽충이 발견되는 고생대 지층은 시대가 오래 되어 층서 상으로는 하위 지층이지만 지형적으로는 포항보다 상위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질학에 관한 ABC의 상식도 없는 이들과 논쟁하는 것은 전문 과학자로서 자존심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더 이상의 논쟁은 사양했습니다.

그 후에도 '교수아카데미'라는 단체에 불려나가 창조와 진화 토론회에서 진화를 설명하고 (이때에는 창조론 쪽에 참여하려는 인사가 없어 대타로 성균관대의 생물학 교수가 창조론을 거들어 설명했음), 대구계명대학 '목요철학회'에서 역시 창조와 진화 논쟁에서 진화를 설명하였고(이 경우에는 경북대 물리교육과 양승훈 교수가 창조론을 설명), 몇 년 전에는 <과학동아>에서 개최하는 극장식 과학 토론의 역시 창조와 진화 논쟁에 참여하였고(여기서는 연세대 김정훈 생물학과 교수가 지적 설계론으로 창조론을 설명), 최근에는 교육방송(EBS)의 심야 토론회에도 출연하여 진화를 설명했습니다(이 경우에는 강남대의 김모 신학과 교수와 어느 목사가 창조론을 설명하고 진화론 쪽에는 전북대의 생물학과 모 교수가 함께 참여). 이 외에도 일반 신문이나 대학 신문에 창조와 진화 논쟁의 글을 싣기도 했습니다. 본인이 참여한 이상의 창조와 진화 논쟁 외에도 장 교수님을 비롯하여 여러분들이 논쟁에 참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창조론의 문제는 자연 현상에 대한 해석의 근거를 성서에 두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구의 나이가 6000년 혹은 1만 년 이내로 해석한다든지 노아의 홍수가 역사적 사실이라고 한다든지, 심한 경우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은 완전하여 하나도 더하고 뺄 것이 없다는 성경 구절에 억매여 지구상에 출현한 종은 일시에 창조된 후 멸종되거나 새로운 종의 출현이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화석을 대홍수로 익사한 생물들이라고 합니다.

이는 지질학의 기초를 거부하는 것으로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주장입니다. 지질학은 화석의 층서학적 분포에 근거하여 지질시대를 구분합니다. 중생대, 고생대는 물론 캄브리아기, 쥐라기, 백악기와 같은 지질시대 명칭은 그 시대에 살던 화석 생물에 의해 정의하고 구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창조론에서는 생물 진화를 거부하면서 백악기 캄브리아기 등 지질시대를 거론합니다. 이는 스스로 논리적 모순을 들어내는 것입니다. 생물의 진화를 거부한다면 지질시대 구분은 불가능하고 캄브리아기나 백악기라는 시대 명칭은 사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화석에 대한 근대적인 해석은 수백 년 전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채석장에서 작품을 위해 석재를 채취하면서 화석이 암석 속에 그 성분으로 들어있는 것을 보고 대홍수 시에 익사한 생물이 아님을 간파했습니다. 홍수에 익사한 것이라면 지표면에 얹혀있어야지 어떻게 암석 속에 들어 있는가. 이것은 암석이 생성될 당시 지구상에 살던 생물이 다른 암석의 성분과 함께 보존된 것이며 이들이 높은 산악 지대에서 발견되는 것은 지각변동에 의해 바다에 퇴적된 것이 융기하여 육상에 노출된 것이라고 현대적인 해석을 한 것입니다.

지구의 나이를 1만 년 이내 6000년 정도로 보는 것은 도킨스의 표현대로 서울에서 대구까지의 거리를 300미터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잘 아시겠지만 지질학은 지구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구체적으로는 암석의 역사, 돌의 역사를 연구합니다. 지구의 나이가 그렇게 수천 년 또는 1만 년 정도밖에 안되었다면 강가의 돌 하나도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 돌이 어디에서 기원했으며 어떻게 기반암에서 분리되어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인지 설명할 수 없습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동위원소 지질학에서는 여러 가지 동위 원소들을 연구하여 지구의 나이를 상당히 정확하게 읽을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였습니다. 이들에 의하면 지구의 나이는 46억년이라는 것입니다.

대홍수 설화를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도저히 수긍할 수 없습니다. 홍수와 같은 강수 현상은 단순한 물의 순환일 뿐입니다. 즉 바닷물이 증발하여 강수 현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매우 분명한 현상을 이해하지 못하고 땅 위에서 가장 높은 산을 덮을 정도로 물이 덮여있었다는 것은 일종의 신화로 받아들여야지 이것을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하면 과학이 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즉 아무리 심한 홍수가 오랫동안 일어나도 국지적으로 하천물이 넘칠 뿐 전 세계 해수면이 올라가지는 않습니다.

창조론에서 화석 기록에 관해 약방의 감초처럼 거론하는 것이 종과 종 사이의 연계종이 매우 드물다는 사실인데 이는 엘드리지와 굴드 두 고생물학자가 1970년대에 제시한 단속평형 진화 모델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단속평형 진화 모델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윈이 진화를 설명할 때 "거대한 모집단(母集團) 내에서 오랜 기간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작은 변이가 서서히 축적되어 새로운 종이 출현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화석으로 연계종이 발견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엘드리지 등에 의하면 새로운 종이 출현하는 것은 모집단 내에서가 아니라 모집단 주변의 새로운 환경에 도전하는 소수의 개체에서 비교적 짧은 기간에 출현한다는 것입니다. 소수의 개체에서 비교적 짧은 기간에 새로운 종이 출현하기 때문에 연계종이 화석으로 보존되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과학철학을 하시는 장대익 교수님은 물론이고 종교학과 신학을 하시는 김윤성, 신재식 교수님도 성서의 문자적인 해석을 거부하고 진화론을 수용하시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세 분 모두 개신교에 영향을 받았으면서 창조론에 매몰되지 않은 것은 자유로운 정신을 소유한 열린 마음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본인은 중고교 시절부터 축자영감설 같은 성서의 문자주의에 반대하는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의 진보적인 개신교에서 자라 진화론을 수용하는 데 별로 갈등을 겪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종교는 종교대로 과학은 과학대로 각각 고유의 영역이 있다고 믿는 편입니다.

본인의 소박한 성서 이해는 신의 말씀을 직접 녹음하여 성서를 만든 것이 아니고 옛 성서 기록자들이 명상 (또는 기도)하는 가운데 신의 계시를 받아 기록한 것이라고, 그리고 신의 계시라는 것은 기록자가 속한 당시 사회의 지적 수준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성서 어디에도 "지구"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 없고 언제나 "땅"과 "하늘"뿐입니다. 이는 당시 지구가 둥글다는 생각이나 지동설이 나오기 훨씬 전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세분의 논의 가운데 본인 의견을 첨가하자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윌슨의 <생명의 편지>에 대한 신 교수님의 독후감 대부분은 매우 잘 정리하신 것이어서 본인도 이 책을 읽고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만 해결 방법에 너무나 "과학중심주의" 또는 "생물학 중심주의"의 색채가 농후하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저자가 생물학자이므로 자기 분야의 이야기를 했을 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과학자는 자신의 전문 분야 외에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매우 꺼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물학 전문가로서 지구 생태계의 위기를 설명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종교에 손을 내밀면서 과학 일방주의 자세를 보인 것을 섭섭하게 생각할 일은 아닙니다. 윌슨의 편지에 대한 회답은 종교인으로서 적극 호응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 일반 교인들을 어떻게 설득하고 행동할 것인지 종교인 나름대로 호응할 일입니다. 분야와 영역을 떠나 현재 당면하고 있는 생태계의 위기를 함께 고민하고 해결 방안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누가 이 문제에 주도권을 쥐고 해결할 것인지는 문제의 심각성에 비추어 너무 한가로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신 교수님이 안데스 산맥과 남미의 파타고니아를 여행하면서 장엄한 자연을 경험하고 신비를 느끼셨다는 이야기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러나 지질학을 전공한 본인은 이러한 자연에 대하여 별로 신비를 느끼지는 않습니다. 즉 캐나다 럭키산맥이나 노르웨이의 빙하지형이나 만년설을 보면서 신비를 느끼지는 않았던 것은 이들의 형성 과정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실 과학자는 '신비'라는 용어를 별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형성 과정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을 때는 모른다는 표현을 사용하지요. 지진이나 화산 또는 낙뢰와 같은 자연 현상을 접한 옛 조상들은 그 원인을 몰라 신의 노여움이나 초자연적인 능력을 생각했을 겁니다. 신학자와 과학자가 자연을 감상하는 내용이 반드시 같을 수는 없겠습니다. 장엄한 자연과 우주의 광대함이나 생명의 오묘함에 대하여 과학자들이 느끼며 표현한 경외라는 용어에서 종교적인 함의가 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신 교수께서 소개하신 존 호트의 "설명의 다원주의"는 매우 매력적입니다. 결국 종교와 과학이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 상보적이라는 해석은 상당히 호감이 갑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사항에 접했을 때 결국 굴드 등의 분리적 사고와 다르지 않은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굴드 등의 분리적 사고도 과학과는 다른 종교 영역을 남겨 놓아 설명의 다원주의나 계층구조와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장 교수님과 김 교수님이 같이 논의하고 설명하신 기도의 효능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불가지론자로 자처하신 김 교수님의 개인적인 경험은 모든 사람이 누구나 한두 번쯤은 겪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김 교수님이 지적하신 KAIST에 창조론 전시관이 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데요. 장 교수님 이야기로는 전시관 뿐 아니라 교회가 있고 서울대에도 교회가 있다니 참 너무하는 거 아닌가 생각합니다. 정치와 종교의 분리 그리고 종교의 자유를 표방하는 나라에서 국가 기관에 이런 특정 종교의 전시관과 교회가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관이 공교육을 담당하는 교사들의 직무에 관한 재교육 실시 기관으로 지정되었다니 더욱 놀랍고 한심스러운 현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종교단체가 설립한 중고교(실질적으로는 공교육 기관이나 다름없는 사립고)에서 특정 종교 교육을 강요하는 일 역시 헌법에 위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울의 D고교의 어느 학생이 이에 반대하여 일인 데모를 한다는 이야기는 언론을 통해 들었으나 이는 한낱 흥밋거리로만 간단히 취급하고 심각하게 다루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헌법소원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사회가 교육열이 지나칠 정도로 높은 것 같으면서도 교육 내용이나 질 그리고 교육의 본질에 대해서는 의외로 무관심한 것은 아직도 후진 사회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대 과학의 총본산이라고 하는 미국에서 창조-진화의 논쟁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현상은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 교수께서 1925년 스코프스 재판에서 2005년 도버 재판에 이르기 까지 비교적 소상하게 소개하신 것 역시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창조론이 다시 머리를 내민 데 대한 이야기를 간단히 첨언한다면 굴드와 엘드리지 등 고생물학자가 단속평형 진화 이론을 발표하면서 부터입니다. 즉 그들은 다윈이 예상한 것처럼(다윈은 전 세계적으로 화석을 철저히 연구하면 생물종들이 진화하는 모습을 활동 사진처럼 볼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음) 화석에서 흔히 연계종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그 이유를 설명했던 것입니다. 이를 기회로 창조론 쪽에서는 이것 봐라 고생물학자들도 다윈의 이론이 잘못되었다고 하지 않느냐, 이제 다윈의 진화론은 더 이상 과학이라고 할 수 없으니 대신 창조론을 교육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연방법원까지 올라가 당사자인 고생물학자들의 증언을 듣게 되었고 거기서 굴드 등은 "우리는 다윈의 진화이론(theory)에 잘못이 있음을 지적한 것이지 진화의 사실(fact)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라고 밝힌 것입니다. 지적하신대로 창조론에 관한 문제는 단순한 종교와 과학만의 문제가 아니라 교육과 정치를 비롯한 온갖 요소가 얽힌 매우 복잡한 문제입니다.

국내에서 창조과학회의 활동과 근본주의 및 복음주의 개신교의 관계에 대해 잘 정리해주시어 이해하기 쉬웠습니다. 여러 대형교회들을 포함하는 주류 개신교는 물론 몇몇 대학교까지 하나같이 근본주의나 복음주의 개신교에 속하여 사회와 정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현상은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국내외를 막론하고 주류 과학계 (혹은 과학자들의 집단)에서는 창조론이든 지적설계론은 받아드려지지 않습니다. 신 교수님 말씀대로 그들만의 리그입니다. 스스로 과학자를 자처하는 일부 인사들이 창조론이나 지적설계론을 거들고 있으나 이들은 전체적으로 극소수에 불과하고 주류 과학자 사회에서 이 문제로 활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과학 이론이 다수결에 의해 좌우되는 것은 아니지만 절대다수의 과학자가 각기 경쟁과 검증을 통해 제시하여 과학자 사회에서 합의된 내용은 아무나 함부로 거부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사항입니다. 즉 과학계가 창조론과 진화론으로 둘로 갈라진 것은 아닙니다.

데닛의 말처럼 '생물의 진화에 있어서 과학자를 당혹케 하는 많은 문제들을 과학이 아직 말끔하게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창조론이나 지적설계론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설명할 준비조차 되어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최근 장 교수님이 설명하신대로 지적설계론은 약간 세련되게 옷을 가라 입은 창조론에 불과합니다.

미국 사회에서 지성인들이 모여 창조론이나 지적설계론에 대하여 무시할 수 없는 단계가 되었다고 판단 "지적사고"를 편찬한 일은 만시지탄의 느낌이 듭니다. 국내에도 가칭 '진실을 위한 지성인들의 모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일반인을 깨우쳐 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프레시안>에서 다룬 세분의 '과학과 종교의 대화'는 우리 사회의 의식 구조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기회를 마련한 것 같아 기쁩니다. 장 교수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사회가 혼란할수록 이러한 담론이 우리 사회의 기본을 다지는 일로 생각되어 더욱 장려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하튼 이번 기회에 오랜만에 실질적인 공부를 하게 되어 <프레시안>에도 감사합니다.

2008년 8월 1일

대구에서 양승영(경북대 명예교수) 드림.

종교와 과학, 그 위험한 도박에 대하여

지금까지의 논쟁을 다소 단순화시켜 생각해 보면(필자들껜 미안하지만), 장대익 교수는 진화 생물학과 무신론적 관점에서, 신재식 교수는 기독교 목사로서 유신론적 관점에서, 김윤성 교수는 종교학자의 관점에서, 세 분 모두 대체로는 큰 이견 없이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얼핏 기본적으로는 세 분이 전혀 다른 입장에 서 있을 것 같은 데,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여기에는 뭔가 이유가 있을 듯합니다. (독자의 관점에서 존칭은 생략했습니다.)

우선 그 이유를 한번 생각해보면, 이 논의 과정에서, 그 다른 어떤 문제보다 현재 한국 교회의 병리적 모습과 기형적 행태가 가장 큰 문제로 제기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말하자면, 무신론적 관점에서도, 종교학적 관점에서도, 심지어는 유신론 또는 기독교적 관점에서도 지금의 한국 교회는 납득하기 어려운 문제점들이 많다는 것이겠지요.
▲ 한국 교회의 총체적 반성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크다. ⓒ뉴시스

어느 정도 지적인 토대를 갖춘 사람이라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들을, 큰 교회들에서 가르치고 설교하며 전파하는 지금의 모습은, 한국의 교회가 이미 그 고비성(임계성)을 넘어섰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에 대한 총체적인 철학적 반성이 교회 내적으로, 그리고 외부로부터도, 이제야말로 필요한 시점이 된 듯하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와는 별도로, 그러나 주제와는 중요하게 관련되어 있는 어떤 내용을 한번 살펴볼 필요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는 세 분 모두 창조과학과 지적설계론, 그리고 기독교의 문자주의적 해석에 대한 비판에는 큰 이견이 없고, 나아가 이 이론들이 과학의 틀 안에서, 과학과 동등한 선상에서 다루어지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저는, 우리가 종교와 과학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반드시 고려되어야 하고, 간과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문제가 하나 더 있다는 점을 제기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바로 종교와 과학의 문제와 논쟁은 어떤 투기성 제로섬 게임과 같은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마치 선물 투자에 있어서나 도박에서 판돈을 걸듯이, 다소 근거가 더 있어 보이거나 신뢰도가 높은 정보들을 통해 어떤 것을 '선택'하고, 그렇게 해서 자신의 선택이 맞으면 이로부터 이득을 보고 틀리면 손해를 보게 되는, 그리고 한편이 수익을 내면 다른 편은 손실을 보는 그러한 종류의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왜냐하면 무엇보다, 과학과 종교의 문제는, 다른 어떤 누구도 책임질 수 없는, 자기 자신의 실존적 선택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무신론자로서든 유신론자로서든, 아니면 또는 불가지론자로서든, 우리는 어떤 입장을 끊임없이 요구받게 됩니다. 그런데 그 선택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저는, 그것을 간단히 사색적 선택과 도박적 선택으로 규정하여 부르기로 하겠습니다.

영어에 'speculation'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철학책을 읽을 때는, 사색의 의미로 이해를 해야 하고, 금융공학 관련 서적을 읽을 때는, 투기의 의미로 봐야합니다. 투기와 사색, 완전히 다른 의미처럼 보이는 것이, 어떻게 그렇게 같은 표현을 이루고 있습니다. 좀 이상해 보이지만, 그런데 그 어원을 보면 왜 그런가 이해가 됩니다. 라틴어 스페큘럼(거울)에서 파생되어 나온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종교적이든, 과학적이든, 어떤 근원적인 것에 관해 '사색'을 하는 것은, 마치 거울을 보듯이 알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언제나 그 '도박적' 요소가 있다는 것으로 서로 관련지어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옛날 거울은 구리로 만들어져서 희미하게 보이기 때문에 (고린도전서에도 '지금은 거울처럼 희미하게 보이지만'이라는 표현이 있죠) 이런 의미가 된 듯합니다.

물론, 오늘날의 거울은, 마치 현대 과학의 놀라운 발전에서처럼, '선명하게' 모든 사물을 비쳐볼 수 있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우리가 이것을, 유신론과 무신론, 또는 창조론과 진화론, 또는 종교와 과학의 문제, 즉 해결하기 어려운 그와 같은 근본적 주제들로 반영해 볼 때는, 여전히 모든 것이 '희미하게 보이고' 그렇게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성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이것들은 '실존적으로' 결단하기 어려운 문제라는 것이겠죠.

그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서는 많이 다뤄지고 있지 않은 '인과율'에 대한 문제입니다. 논리학에서는, 충분이유의 원리, 또는 충족 이유율로 말해지는 바의 것이죠. 과학은 기본적으로, 바로 이 인과율에 대한 '믿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데이비드 흄이 이미 제기했던 문제라 할 수 있겠죠. 물론 흄은 인과율에 대한 그의 설명으로 기독교의 유신론을 비판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이것이 과학의 한계에 대한 비판도 함께 내포되어 있다는 또 다른 측면을 놓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과학과 종교 모두, 결정론과 인과율, 즉 모든 결과에는 그 원인이 있다는 믿음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마도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인과율에 대한 것은 '과학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기인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아는 모든 과학 법칙은 자연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있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인간이 바로 과학 법칙의 입법자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조금 더 논의를 진행시키면, 우리가 과학적 진리라고 부르는 것들은 모두, 인간의 감각과 직관력, 이해력, 그리고 추리력 등 말 그대로 인간적 요소들에 속하는 바로 그 한계 내에서만 설명이 가능한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는, 종교와 과학 모두, 하나의 믿음 체계, 다소 심하게 말하자면, 인간의 감성과 오성에 의해 한계지은 어떤 '미신'에 불과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날의 다소 거창한 주제들, 환경 문제, 전쟁, 기아, 빈부 격차, 불확실한 인류의 미래 등과 관련해서는, 종교적 문제들 뿐 아니라 과학에 대한 지나친 맹신 또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적절한' 균형이 요구되어야 하며, 나아가 이에 대한 비판이 바로, 우리가 방기하고 있는 '철학'이라는 부문의 역할이라고 생각됩니다. 즉 핵심은, 철학은 언제나 종교를 향해서든, 과학을 향해서든 최후의 보루인 '비판 정신'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비판'이 무엇인지는 별도의 논의를 필요로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유신론 뿐 아니라 무신론도 이러한 '투기'적 요소를 제외하고서는 선택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과학적 지성(오성)이나, 이성적 사고에 의해서라고 할지라도, 유신론적 입장을 견지할 때만이 아니라 무신론적 입장에 들어설 때 역시, 형이상학적(한편으로는 신학적) '선택'이 개입되어야 가능한 것이지, 단순히 과학의 발달에 의해 밝혀지거나 이로서 드러나는 문제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만일 그 투기적 요소를 제외하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유신론자도 무신론자도 되기 어려울 것이며, 결과적으로 도박적 선택을 하던가, 사색적 선택을 하던가 하는 또 다른 선택밖에는 남지 않을 것입니다. 전자는 자신이 유신론자이거나 무신론자임을 선포하여 이에 대한 논리를 개발해 나가는 자세라 할 수 있으며, 후자는 그 어떤 결론 없이 그 주제를 끊임없이 탐구하며, 회의하고, 지향하고, 또 다른 방법론을 숙고해 나가는 그런 자세라 할 수 있으며, 저는 이것이 본말이 맞다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 진화론과 창조론 모두, 인간 본성의 한계라는 테두리 내에서, 나아가 서로 다르게 그 자체적 방식으로 마련된 논리 구조의 한계 내에서만 가능한 '설명들'에 불과하다는 것도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 기준이 다르고 척도가 다른데, 상대방의 잣대(방법)가 무엇이고 어떻게 다른 것인지는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방법론만이 모든 것을 대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된 전제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보게 되면, 진화론은 창조론을 반박할 수 없으며, 창조론 또한 진화론을 반박할 수 없는 것이며, 이 두 가지는 완전히 다른 언어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즉, 언어의 의미가 다르고 그 논리 구조와 사용 방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로고스라는 의미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애당초 '불가능한' 일을 여기서 하고자 하는 것이라는 거지요.

'창조과학 또는 지적설계론'이라는 것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먼저 이러한 무리수를 두게 된 것이며, 이에 말려들어 반대의 입장에서 '진화론적으로' 반박하려는 것 또한, 과학의 한계를 지나치게 넓게 설정하여, 과학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곧 창조과학이나 지적설계론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마찬가지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말하자면 유신론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태도뿐 아니라 무신론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태도 모두 대동소이한 잘못이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과학적 진리, 그것을 패러다임으로 부르든, 과학자들의 어떤 '절차'에 의한 '합의'라고 부르든, 언제든 새로운 증거가 생기면 바뀔 수 있는 개연성이 있는 그것들, 그런 지식에게만 의존해, 우리의 운명을 모두 내맡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위험한 도박'에 속하는 것이며, 결코 '사색적 선택'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사색'은 불가피하게 언제나 구리 거울을 통해 반영해보듯 '흐릿하게' 보이는 바의 것이며, 따라서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중요한' 주제들은 그렇게 명명백백하게 드러날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이 아니라, 개인의 실존적 결단과 사색에 의해 언제나 계속되어질 바의 것, 즉 끊임없이 반복해서 질문되어지고, 대답되었다가, 다시 잊혔다가, 또 다시 질문되고, 깨달았다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또 다시 깨닫게 되는, 그런 종류의 질문이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한 듯합니다.

2008년 7월 28일

한 독자(오디세우스)의 의견

논의 방향이 '과학 친화적 종교' 찾기입니까?

9·11이 종교 전쟁의 결과가 아닌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아는 일입니다. '신학'이 아니라 다른 '정치학' 같은 것을 동원해서. 그리고 모든 '논리'는 인식의 한계를 뚫고 어떻게 더 가까이 '사실'로 다가가는가의 문제입니다. 요즘에야 '사실'보다 '해석'이 더 문제되는 시점에 있고 그만큼 '과학주의' 그 폐해가 일반화된 탓도 있긴 하지만, 종교건 과학이건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는 시점은 늘 '상징과 비유'를 통해서 뭔가 사람들을 조작하고 동원하는 이런 방향으로 빠졌을 때입니다.

김윤성 교수는 기독교 입장에서 '불교'보다 기독교가 '더 과학 친화적이다'를 말씀하시고 싶은 것처럼 여겨지는데 부질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과학 자체가 '기독교'에서 설정한 일종의 '존재론' 또는 '세계상'을 뚫고 성립한 '역사'가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어떤 일반화된 종교나 과학이 존재하고 그것들 사이의 문제를 이렇게 일반화시킬 수 있는 주제가 아닌 것입니다. '서양 기독교와 서양 과학'의 특정 시기 관계 문제 이렇게 되는 것이 맞습니다. 요컨대 '추상화'할 수 있는 종교나 역시 '추상화' 가능한 '과학'이란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레스터 브라운에 의하면 1997년 교토에 모인 '탄소 세력'의 대표 과학자들은 요컨대 '온실효과' 자체를 '부정'하려고 '과학적으로 애'를 썼습니다. 데이터가 동일해도 이렇게 해석을 전혀 달리하는 것이 '과학자' 또는 '과학'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되는 까닭은 '이해관계' 때문인 것이고 거대한 화력발전소에 고용된 과학자는 '데이터'를 달리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과학자도 이렇습니다. 하물며 '상징과 비유'로 구성된 종교야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 못지 않게 기독교 또한 과학 친화적이다 이런 말은 간단히 '의미 없는' 명제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종교 전쟁 대부분 '기독교'에 관련되었다는 점은 '역사적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종교'를 여러 가지 '문화 현상'의 하나로 '이해'하고 인식하면 그만일 따름이고 마찬가지로 과학도 그렇게 인식하면 됩니다.
▲ 코페르니코스의 우주관. ⓒ프레시안

요컨대 '나의 것이 절대적이다'라는 태도가 문제일 뿐이라는 것이죠. 그게 과학이건 종교이건 마찬가지입니다. 당장 '생생한' 사례가 있지 않습니까. 미국인들은 광우병 검사에 필요한 '과학 기술'을 갖고 있지만 0.1% 이상으로의 검사 확대를 절대 안하려 듭니다. 왜 그러겠습니까? 진리 결정권을 쥔 권력이 그렇게 하죠. 마찬가지로 권력을 쥔 '주교'는 코페르니쿠스는 물론 갈릴레이의 발견을 금지시켰던 것입니다. 그것이 당시 기독교 교리 또는 세계상에 어긋났고 결국 교회가 흔들린다는 판단이 있었고 나아가 사회가 불안정해진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지구는 돈다' 또는 '태양이 돈다'는 테제가 '교리'와 결합하여 특정 체제를 유지하는 '이념'으로 '구성'되었다는데 있습니다. 불교가 유독 과학 친화적 종교가 절대 아니고, 위의 글쓴이 말 그대로 온갖 '생각'들이 다 조합되어 나타납니다. 하지만 간단히, 지구가 돌건 태양이 돌건 '그런 문제'는 별로 '나의 고'를 덜어내는데 중요하지 않다는 이런 '원초적 문제 설정'에서 전혀 다르다는 이것뿐입니다. 특히 중요한 지점은 특정 시대의 '실재론' 또는 인식론과 '결합'한 어떤 '시스템'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늘 '모여들게'하려는 이런 '목적의식' 같은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교'와 '지질학자'가 지구의 '연령'이 4000년인가 6000년인가 아니면 1만 년인가와 같은 문제를 놓고 '성서'와 '과학적 방법'을 서로의 근거로 내세우면서 대립 논쟁하는 이런 일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하죠.

게다가 갈릴레이를 '파문'한 천주교가 히틀러 시대의 '독일'에서는 유태인 학살을 방조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천주교'가 문제인 것은 아니고 이것은 독일에서 히틀러 친화적이었던 주교들의 문제 즉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특정국가 '종교인'의 문제라고 할 수 있지만 기독교에 이렇듯 내재된 '존재론'적 세계상을 '비유와 상징' 또는 '과학적 설명'을 활용하여 '구성'하려는 '경향'이 이런 문제를 만들어 낸 것으로 보입니다. 지구가 도는가 태양이 도는가를 놓고 목숨 걸게 만드는 이런 실재의 사회적 구성 즉 '이념적 조작'을 했다는 사실이 문제인 것이죠. 이런 이유로 서양에서 '과학자'는 어쩔 수 없이 '기독교 교리'와 이곳 저곳에서 '충돌'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2008년 7월 13일

한 독자(사띠현정)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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