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일찍이 이명박 대통령이 이런 승부수를 던질 수밖에 없는 국면으로 몰릴지도 모른다고 예고했었다. 정치에 문외한인 나같은 사람도 그런 생각을 했고, 대논객인 김대중도 드디어 공개적으로 그것을 발설했다. 궁지에 몰린 청와대도 그런 승부수를 궁리해 보지 않았을 리 없다. 국민들의 신임을 다시 묻겠다는 것은 직접민주주의적 명분도 갖고 있다. 실제로 촛불을 든 이들의 상당수도 갑갑한 나머지 재신임국민투표를 요구하고 있다. 이는 재신임국민투표와 같은 승부수가 현실화될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한다.
필자는 재신임 국민투표에 대한 생각을 지난 7월 8일자 <프레시안> 기고에서 이미 개진한 바 있다.
그 글에서 위헌 논란을 우회하며 사실상의 재신임 국민투표는 가능하며, 다만 그것은 어느 측에게나 극약처방이며 특히 촛불에게 독배(毒杯)가 될 것이라는 점을 엄중 경계한 바 있다.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 때문에 몹시 힘들어 하듯이, 필자 역시 온 몸에 마비가 올 정도로 탈이 났다. 별다른 치료약이 없는 2MB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고통을 겪고 있는 셈이다. 그 고통의 와중에서도 김대중의 글을 보며 무뎌진 손가락과 어깨 통증에도 불구하고 자판을 두들기지 않을 수 없다.
이 대통령은 안에서도 왕따 당하고 밖에서도 왕따 당한다. 어느 글쟁이의 표현대로 '글로벌 호구'다. 눈을 비비고 살펴봐도 잘하고 이쁜 구석이라고는 도무지 발견할 수 없다. 그런데 그는 왕따 당하는 이유를 모른다. 아니 왕따 당하고 있다는 것 자체를 잘 모르는 듯하다. 그런 이를 국가원수로 모시고 살아야 하는 국민만 울화통이 터지고 불쌍하다. 필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누구나 그러한 것 같다. 이명박 정권의 기관지격인 조ㆍ중ㆍ동 지면에서도 이명박 정권을 칭찬하는 기사를 본 적이 없다.
<조선일보>의 대논객인 김대중도 차마 듣기 거북한 언사로 대통령을 질타하며 승부수를 강요하고 있다.
"이 대통령은 승부수를 준비해야 한다. 헌법적으로 무리가 있겠지만 드골이 개헌을 내걸고 자신의 진퇴를 걸었듯이 국민에게 시간을 얻어 신뢰를 회복하는 조건으로 자신의 진퇴를 제시하는 정도의 승부수를 던지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 자신 지리멸렬하게 4년 반을 보낼 만큼 무기력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김대중의 글에서 '헌법적으로 무리가 있겠지만'이라고 표현한 것은 노무현 탄핵 재판 당시에 노무현이 재신임 국민투표를 제안한 것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위헌 판결했기 때문일 것이다. 드골을 거론한 것은, 드골이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 임기 중에 다섯 번이나 국민투표를 실시했던 과거사 때문이다. 68혁명 직후인 1969년 4월의 국민투표에서 드골은 재신임에 실패하여 물러났지만, 그에 앞선 네 번의 국민투표에서 승리했다. 김대중이 드골을 거론하면서 두차례나 재신임국민투표(1969년, 1975년)로 승부했던 박정희를 거론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아마도 드골은 훌륭한 지도자이고 박정희는 독재자라는 식의 대중적 인식이 작용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박정희 식 경제성장의 기억 때문에 이명박은 압도적으로 당선될 수 있었다. 김대중 등의 구보수들은 MB실용을 '기회주의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하며 냉전시대와 개발독재 시절 박정희 식의 '朴明博'이기를 주문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명박의 딜레마가 존재한다. 이명박은 구보수와 약간 다른 신보수의 측면이 극히 제한적이지만 분명 있었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의 지지율은 바닥인데 국내외적 환경을 고려할 때 국면을 타개할 마땅한 대안은 없다. 이런 상황에서 구 지지층과 보수층의 결집을 시도하지 않을 수 없다. 김대중 말대로 이명박이 '우파마저 잃으면 그는 사실상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친박인사의 일괄 복당이나 1%의 '강부자'들을 위한 부동산 세제 개편 시도 등이 그러한 예들이다. 경기 회복과 일자리 창출이란 구실 하에 재벌과 가진자의 이해를 대변하게 됨에 따라 부족한 세수는 공공요금과 간접세의 증대로 귀결될 것이고 양극화는 더욱 심화될 것이다. 부동산 버블도 더해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최근 조중동 지면을 장식하고 있는 노무현 마녀 사냥도 보수층 결집의 일환이다. 이미 시골 노인인 노무현 마녀사냥은 현권력의 선택지가 얼마나 제한되어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명박은 선택의 여지없이 보수층 결집에 집착할 수밖에 없고, 보수에 어필할 수 있는 보수적 정책을 제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대중은 이명박에게 재신임투표와 같은 승부수를 통해 수구적 방향으로의 일로매진을 촉구하고 있다. 이명박도 그런 승부수에 대한 유혹을 벗어나기 어렵다. 김대중이 말한대로 이명박은 결코 '무기력한 인간'이 아니다. 그는 회사와 오너를 위해 생명을 걸고 금고를 지켜냈던 독종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재신임을 묻는 국면이 막상 닥치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좀 난감하다. 재신임 승부수를 덜컥 받으려는 멍청이들이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사안과 결부지어 재신임을 물을지가 관건이기도 하다. 가령 대운하와 결부지어 재신임을 묻는다면 촛불에게도 승산이 있다. 하지만 꿈깨길 바란다. 재신임의 선택권과 주도권은 대통령이 쥐고 있다. 내가 여태 관찰한 바에 의하면, 이명박은 승산이 불확실한 진검 승부를 택할 위인이 결코 아니다. 이러한 점들을 감안하면 재신임 국민투표는 촛불에게 독배가 될 것임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김대중은 드골과 박정희는 물론 가까이는 2003년 노무현 재신임 해프닝 과정에서 그 승부수에 대한 힌트를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당시 노무현도 이명박과 비슷한 지지율이었다. 게다가 최도술 사건으로 도덕성에도 흠집이 나자, 노무현은 재신임을 거론했다(물론 노무현의 과오는 이명박의 그것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미미한 것이었고 차원도 달랐다). 그러자 한나라당과 보수들은 그것이 독배인 줄도 모르고 덜컥 받았다가 여론조사 결과들을 살펴보고 난 후에야 독배를 슬그머니 내려 놓았다. 필자는 이러한 우화같은 장면들을 지켜보면서 한국의 보수들이 건전한 판단력을 상실했고 수준 이하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그 후 탄핵 해프닝을 보며 그런 생각을 더하게 되었다. 좀 더 합리적이고 수준 높는 보수의 지배를 받고 싶다. 그러한 보수를 신보수라 일컬어도 좋을 것이다.
이명박 정권에 약간이라도 존재하던 합리성과 신(新)보수성은 날이 갈수록 사라지고 구(舊)보수성은 강화될 것이다. 누차 말하지만 그것은 필연이다. 구보수성이란 쉽게 말해 극단적이고 시대착오적인 것들이다. 이명박과 보수세력 그리고 조중동 등의 성장동맹 수구동맹의 결속력도 더해질 것이다. 필자는 이미 지난 글에서 조중동이 이명박과 운명공동체가 된 점과 여론전의 막중함을 역설했다. 당분간 이명박은 보수층 결집과 언론통제에 집중할 것이다. 재신임 국민투표도 이 두가지 전제조건이 일정하게 마련된 상황에서 고려의 대상이 될 것이다.
한나라당이 집권해도 70~80년대 식으로 결코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예측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촛불 진압 방식과 방송과 인터넷 장악 과정에서의 그 무모함과 몰상식에서 냉전과 개발독재시대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것을 생생하게 목격하고 있다. 물론 그것은 거시적으로는 그들의 무덤을 스스로 파는 과정이지만 한편 공동체 구성원 대부분에게 엄청난 재앙이 될 것이다. 이러한 추세를 견제할 수 있는 동력은 촛불밖에 없다. 그래서 필자는 촛불에 집착하게 된다.
KBS사장 사퇴 여부와 교육감 선거 결과가 그 시험대가 될 것이다. 이것은 언론과 교육의 차원을 넘어 촛불의 앞날에 중대한 전환점이 될 것이다.
이명박의 극약처방: 재신임 국민투표 일각에서 탄핵과 주민소환을 주장하기도 한다. 대통령 탄핵은 국회의 권한인데 현 국회의 구성을 감안하면 전혀 현실성이 없다. 주민(국민)소환제법에서 대통령과 국회의원은 그 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쇠고기협상에 대한 국민투표를 주장하기도 하지만 현재의 쇠고기협상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감안하면 이명박 대통령이 이를 선택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재신임국민투표가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재신임 국민투표가 위헌이라는 주장도 있다. 노무현탄핵판결 당시 헌법재판소는 다음과 같이 판결했다. "국민투표는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사안에 대한 결정' 즉, 특정한 국가정책이나 법안을 그 대상으로 한다. 따라서 국민투표의 본질상 '대표자에 대한 신임'은 국민투표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러한 헌재의 판결을 두고 보면 재신임 국민투표 자체는 위헌 소지가 있지만 어떤 정책이나 중대 사안을 국민투표에 붙이면서 재신임을 결부시키는 사실상의 재신임 국민투표는 최후의 카드일 것이다. 그런 전례도 있다. 박정희는 1969년 삼선개헌안 국민투표(10월 17일)를 앞두고 특별담화(7월 25일, 10월 10일)를 통해 자신의 신임을 결부지었다. 그리고 유선헌법 반대에 대응하여 1975년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2월 12일)를 앞두고 특별담화(1월 22일)를 통해 신임과 결부지었다. 자신의 신임을 연계함으로써 3선개헌안과 유신헌법에 대한 찬성을 강제하기 위한 변칙이었다. 이와 유사하게 재신임이 아니라 쇠고기 협상과 같은 중대 현안을 국민투표에 붙이면서 사실상의 재신임과 결부하면 위헌 논란을 피할 수 있다. 물론 쇠고기 협상과 같은 사안을 국민투표에 회부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헌법 72조에는 '대통령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외교·국방·통일 기타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을 국민투표에 붙일 수 있다'고 규정되어 있다. 가령 쇠고기협상과 대운하 등이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행정수도 이전에 대한 위헌 판결시에 황당하게도 관습헌법을 들먹인 헌재의 과거로 미루어 보건데, 이명박이 결심하면 위헌 논란은 잠재울 수 있을 것이다. 노무현 재신임 해프닝 과정에서도 재확인된 것이지만 국민투표는 일반적으로 현 집권자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것이다. 국민투표는 정당성과 신뢰를 잃은 권력자들이 취하는 위기 돌파 수단이기도 하다. 한번 잃은 신뢰는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게다가 번번이 촛불의 저항에 직면할 것이다. 상당 기간 동안 국내외적 어려운 환경을 감안하면 추락한 지지도를 만회할 신통한 대안 역시 없다. 또한 재신임 국민투표는 촛불로 나타난 직접민주주의적 요구를 수용한다는 명분도 있다. 하지만 재신임 국민투표는 어느쪽에게나 극약처방이다. 필자는 그것이 촛불에게 더 극약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장기화될 국내외적 위기 국면을 돌파하기 위해 권력이 유사 파시즘적 조치들을 취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재신임 국민투표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해야겠다. 그래서 재신임 국민투표는 보다 신중하게 접근될 필요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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