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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ST, 서울대 '접수'한 교회…그 다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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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KAIST, 서울대 '접수'한 교회…그 다음은?"

과학과 종교의 대화 <14> 나의 '진화 vs 창조' 논쟁사

'과학과 종교의 대화'는 이번 회부터 한국의 상황에 주목한다.

장대익 교수는 국내에서 진행된 '진화 vs 창조' 논쟁의 중심에 서 있었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창조론과 그것의 한 부류인 '지적 설계' 주장이 전개돼온 역사를 훑으면서, 그것의 학문적 기초가 얼마나 허약한지 낱낱이 해부한다. 특히 그는 "끊임없이 '논쟁'을 시도함으로써 발언권을 확보하려는 창조론자의 전략"을 소개하면서 '진화 vs 창조' 논쟁이 계속되는 중요한 근거를 제시한다.

장대익 교수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를 졸업하고 서울대 과학사및과학철학협동 과정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런던정경대학(LSE) 과학철학센터에서 생물철학과 진화심리학을 연구했다. 최근 한국 지식사회에서 큰 관심을 모은 <통섭>(사이언스북스 펴냄)의 역자이기도 하다.

장대익 교수는 2006년 7월부터 1년간 미국 보스턴에 있는 터프츠대 인지연구소에서 대니얼 데닛 교수와 함께 연구를 했다. 이 편지는 그 당시에 초고가 작성된 것이다. <편집자>

신재식 선생님과 김윤성 선생님께,

보스턴에 온 지 벌써 한해가 다 되어 갑니다. 새로운 곳에 정착해 살다 오기에 1년이라는 기간은 정말 짧은 것 같아요. 적응하는 데 두 달, 떠나는 데 두 달이라는데, 그렇다면 이제 주변을 정리하고 짐을 싸야 하는 시점입니다. 여기 학기도 거의 끝나가니 지난 1년간의 삶을 자연스레 되돌아보게 됩니다. 최근 몇 년 동안 가장 크고 도전적인 지적인 자극을 받았던 시기라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어요. 제가 앞으로 어떤 자세로 학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할지, 어떤 화두를 갖고 연구해야 할지, 그리고 어떤 흐름을 좇아야 할지를 치열하게 고민했던 행복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김윤성 선생님의 편지는 지난 1년 정도가 아니라 지난 10여 년의 제 삶을 되돌아보게 만들더군요. 선생님의 '창조 과학 탈출기'도 무척 공감하면서 읽었지만, KAIST 내의 창조 과학 전시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시는 대목에서는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제가 거기 출신이거든요.

'창조 과학'은 한물간 지적 퇴행

우선,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최고의 이공계 대학 KAIST와 그 속에 동아리 형태로 존재하는 과학원 교회,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창조 과학 전시관의 관계에 대해 저도 좀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놓겠습니다.

저는 솔직히 김 선생님의 '창조 과학 탈출기'랄 만한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저는 '진화 vs 창조 논쟁기'는 있습니다. 제가 과학고등학교와 KAIST라는 이공계 대학을 다니며 과학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 좀 익숙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대학에 와 기독교인으로 거듭난(?) 이후에도 저는 창조 과학 같은 것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좀 불편한 점도 있었지요. 솔직히 천박해 보였거든요. 학부 시절에 저의 신앙에 가장 큰 걸림돌은 진화론보다는 오히려 종교 다원주의 같은 상대주의 철학이었습니다.
▲한국창조과학회 홈페이지. ⓒ프레시안

어쨌든, 대학 3학년 때였던가요, 기독교에서 진리를 발견했다고 생각하고 한창 열심히 배우러 다니던 때였습니다. 제가 KAIST의 밖에 있는 교회를 다니기는 했지만 교내 기독 공동체에서도 활동을 했기 때문에 교내에 있는 과학원 교회라는 곳에 들락거리기도 했었죠. 거기에는 창조 과학 연구회(RACS)라는 단체가 하부 조직으로 있었습니다. 그 연구회 멤버들이 말하자면 과학원 교회의 핵심 멤버들이었습니다. 제가 그 선배들과 인간적으로 친하게 지내서인지 자연스럽게 과학원 교회나 창조 과학 연구회 모임에 참여하기도 했었지요.

제가 창조 과학을 의심스럽게 생각했던 것은 바고 그때였습니다. 대학원생 선배들이 교회에 나가 일반 신도들을 대상으로 창조 과학 강연회를 다녀오곤 했습니다. 대체로 박사 과정 선배들이었지만 개중에는 석사과정생도 있었지요. 그들은 창조 과학회에서 제작해 준 슬라이드와 대본 등으로 일정 정도 훈련을 받은 후에 틈나는 대로 강연을 뛰어 다녔습니다. 그 '대본'이 지금 생각해 보면, 김 선생님도 열심히 공부하셨다던 <진화는 과학적 사실인가>였던 것 같아요. 그걸 달달 외워서 교회에 나가는 선배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이건 아닌데…'라고 생각했었죠.

그들 중에는 물리학, 화학, 생물학과 같은 자연 과학을 공부하는 대학원생도 있었지만 주류는 공학도들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들은 150년 동안 수많은 과학자들에게 검증받고 승인된 진화론을 300쪽도 안 되는 책 한 권으로 단 1시간 만에 자빠뜨리더군요. 참으로 용감한 선배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늘 의기양양하여 돌아왔습니다. 마치 은폐된 진실-진화론은 거짓이고 창조 과학이 사실이라는-을 당당하게 밝혀낸 전사들의 모습이었다.

두 분도 잘 아시겠지만, 과학은 이런 식으로 굴러가지 않습니다. 김 선생님도 지적하셨듯이 과학은 기본적으로 집단적인 작업이지 않습니까? 어떤 주제를 연구하는 일군의 과학자 공동체가 있고, 그 사람들이 공유하는 문제, 해답, 풀이 방식이 존재합니다. 이건 꼭 과학 철학자 토머스 쿤의 패러다임 이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이지요. 그래서 만일 어떤 이들이,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기존의 과학 이론을 비판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면, 기본적인 규칙을 잘 지켜서 해야 합니다. 대다수의 과학자들이 믿고 받아들이는 진화론을 일개 대학원생이 하루 이틀 공부하고 대본을 달달 외워 선량한 교인들을 상대로 "아멘, 할렐루야"를 이끌어내는 행위는 열성적 종교 행위일 수는 있을지 몰라도 과학자들이 대중들과 소통하는 정상적인 방식은 아닙니다.

당시에는 저도 기독교인이었고, '모든 지식이 하나님의 지식'이라는 야무진 생각을 갖고 있었던 때라 창조 과학에 대해 아주 부정적인 것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종교 행위를 과학 활동과 혼동하는 선배들을 보면서 적잖이 실망한 적이 있었습니다. 두 분 선생님 모두 그런 경험 있으실 거예요. 젊은 과학도나 박사, 혹은 교수가 교회에 와서 창조 과학 강연을 하면 순진한 교인들은 과학에 권위를 갖고 계신 분이 와서 과학계의 진실을 이야기하고 간다고 느끼잖아요. 특히, 그동안 지식이 없어서 찜찜하게만 여겼던 진화론을 잘근잘근 씹어 주니까 얼마나 통쾌하겠습니까? 지적 열등감이 단숨에 해소되는 경험이랄까요. 저도 교회에서 중고등학교 때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었어요. 특히 고등학교 때는 제법 진지한 고민도 했었죠. 학교 생물 시간에는 진화론을 배우지만 교회에서는 창조 과학 이야기를 듣지 않습니까?

그런데 제가 대학에 가 보니 창조 과학 강연자들이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선배 과학도였고, 학문적 권위를 갖고 강연 내용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은 없었던 거죠. 말하자면 저는 창조 과학에 매력을 느끼기도 전에 이미 그 내부의 실상을 보게 된 경우입니다. 인문학도들의 입장에서는 과학에 대한 막연한 동경 같은 것이 있을 수도 있어서, 김 선생님처럼 창조 과학의 내용 자체를 진지하게 공부해 보는 사람도 계시지만, 저의 경우는 금세 감이 왔다고 할까요. 이건 아니다….

과학에 대해 사람들이 자주 혼동하는 몇 가지가 있는 듯해요. 과학의 본질은 '내용'이 아니라 '절차' 또는 '방법'인데, 사람들은 자꾸 내용에 대해서만 물어요. '공룡과 인간이 같은 시대에 살았다는 주장이 과학이냐?', '외계인이 사람을 납치해 간다는 주장이 과학이냐?', 'B형 남자는 성질이 더럽다는데 그게 과학적 사실이냐?' 등. 표현의 자유를 보장받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그 어떤 내용을 담은 주장도 원칙적으로 제지당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이 모든 것이 과학이라고 해도 경찰에 연행되지는 않지요(도대체 뭔 이야기냐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갈릴레이 때까지만 해도 끌려가고 심지어 화형도 당했으니 너무 당연한 이야기는 아니겠죠?).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주장들이 과학자 공동체의 인정을 받진 못합니다. 과학자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런 주장들이 과학적 절차나 방법을 거쳐서 나온 것인가 하는 것이지요. 누구나 참신하고 엉뚱한 주장을 할 수는 있겠지만, 과학자 공동체는 그 주장의 내용보다 그 주장이 나온 절차를 문제 삼습니다. 물론 그 절차에 대해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20세기 과학 철학의 역사 속에 등장한 귀납주의, 가설 연역주의, 반증주의, 패러다임 이론 등은 바로 그 절차에 관한 논쟁의 결과물들입니다.

그렇다면 창조 과학은 과학이랄 수 있을까요? 다들 동의하시겠지만, 과학에 대한 그 어떤 기준을 들이대도 창조 과학은 과학의 문턱을 넘을 수 없습니다. 카를 포퍼식으로 이야기하면, 창조 과학은 '반증 불가능한 이론의 집합'이고, 토머스 쿤식으로 이야기하면 창조 과학에는 '인상적인 문제 풀이가 전혀 없'습니다. 이미 김 선생님께서 현대 과학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창조 과학의 몇 가지 가설과 주장들에 대해 언급을 해 주셨는데요, 지금도 한국 창조 과학회 홈페이지(☞바로 가기)에는 과학자들이 보기에 정말로 쇼킹한 이야기들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6500만 년 전에 멸종한 공룡과 몇 십만 년 전쯤에 진화한 현생 인류가 공존했다는 기사가 최신 뉴스가 되질 않나, 지구의 실제 나이는 1만 년 정도라고 하질 않나, 과거에 빛의 속도가 변했었다고 말하지 않나, 정말 점입가경입니다. 과학계를 통해 검증받지 않은 황당한 주장들이 아무런 제재 없이 사실로 둔갑하여 교인들을 현혹하고 있습니다.

사실, 일반 교인들에게 이공계 박사, 교수라고 하면 자연 세계에 대해 만물박사인 양 권위를 인정받기 일쑤입니다. 일반인들은 입자 물리학 전공 박사에게 캄브리아기의 대폭발의 디테일을 묻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고 여기지요. 그런데 어디 그렇습니까? 전문 과학자들은 만물박사가 아니잖아요. 한국의 창조 과학 옹호자들은 교인들의 이런 무딘 지성을 십분 활용하여 교회 내에서 권위를 획득해 왔지요.

여기서 제가 '창조 과학자'라는 말 대신에 창조 과학 '옹호자'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가 있습니다. '과학자'라고 하면 자신의 연구 주제와 방법론을 가지고 연구 성과라는 것을 내는 사람들이지요. 국내 창조 과학회 회원들 중에서 이런 실천을 보이는 사람은 제가 알기로 없습니다. 다시 말해 창조 과학을 옹호하고 그것에 대해 강연을 하고 심지어 그것을 가르치려는 사람들은 있지만, 정작 그것을 연구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지요. 이건 어쩌면 당연한 귀결입니다. 창조 과학은 새로운 사실을 예측하거나 기존의 설명보다 더 그럴듯한 설명을 제시하기는커녕, 반례들에 대해 땜질도 잘 못하는 수준이니까요. 과학 철학자 라카토슈는 이런 수준의 가설들을 "퇴행적 연구 프로그램"이라 부르고 과학이 아니라고 판결해 줬지요.

상식적으로 문제를 볼게요. 어떤 분야의 과학자 공동체가 있고 실제로 연구를 수행하는 개별 과학자들이 있다고 한다면, 당연히 그에 걸맞은 학술지가 존재합니다. 한국 창조 과학회의 경우에는 1981년에 <창조>라는 정기 간행물을 출간하여 139호까지 발간해 오다가 최근에는 웹 소식지를 매월 발간하는 형태로 바꿨습니다. 물론 학술지나 편집 위원, 그리고 연구 논문 시스템 같은 학회의 기본 구조는 전혀 갖추지 못했습니다. 대신 신도들을 위한 강연, 창조 과학 사역자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 프로그램 등은 여전히 바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기독교권 밖에서는 "변변한 전문 연구지 하나 없는, 학술 단체를 빙자한 종교 단체" 정도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지요. 정리하자면 한국의 창조 과학 운동은 기존의 과학자 공동체에는 전혀 호소력이 없는 반면, 근본주의 신앙을 가진 교인들에게만 위안이 되는 교회 대중 운동으로서 교회를 순회하거나 정기 강연회를 열어 교회 내에서 지지 세력을 형성하는 데 주력해 왔습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 있는 창조 과학의 위상은 사뭇 달라 보입니다. 한국 창조 과학회 홈페이지에 가 보면 현재 "석·박사급 과학자, 의사, 교수, 교사로 구성된 1000여 명의 회원과 1만여 명의 온라인 회원, 그리고 16개의 국내 지부와 5개의 국외 지부를 가진 비영리 사단 법인으로 성장"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외형적으로는 엄청난 조직입니다. 그리고 김 선생님도 지적하셨듯이 온누리 교회를 비롯한 개신교 대형 교회들, 그리고 한동 대학교, 명지 대학교를 비롯한 복음주의권 사립 대학들이 이 조직을 지원해 주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창조 과학은 한국 주류 기독교의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런 창조 과학 운동이 한국의 과학 문화에 끼친 악영향은 미미하다고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한국 교회에서 이런 강연회와 교육은 매우 광범위하게 퍼져 있습니다. 중·고등학교나 대학에서 진화에 대한 충실한 교육이 이뤄지고 있지 않은 현실에서 (많게는) 거의 매주 창조론을 옹호하는 설교나 강연을 학생들이 듣게 된다는 것은 과학 교육 측면에서도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궁금증이 생깁니다. 과학계의 컬트 문화에 불과한 창조 과학이 한국 사회에서는 왜 이렇게 개신교의 주류 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본격적인 답은 아무래도 신학자이신 신 선생님께서 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만, 저는 창조 과학과 겪었던 불화의 경험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카이스트와 서울대 안에 교회 있는 거 아세요?

제가 창조 과학의 메카(?)인 KAIST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과학 철학, 과학사, 진화 생물학을 공부하면서 제게 창조 과학은 어떻게든 정리되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박사 과정에 진학해서 공부를 하던 중에 어떻게 하다 보니 <복음과 상황>이라는 복음주의 계열 잡지의 편집 위원으로 몇 년을 일하게 되었죠. 두 분은 이 잡지의 성격에 대해 잘 아실 겁니다. 1980년대 후반에 창간되었고 복음주의 계열에서 거의 유일하게 진보적 성격을 띠었던 잡지였지요.

저는 1997년 10월부터 1998년 2월까지 "진화론과 기독교"라는 큰 제목으로 기독교와 진화론의 화해 가능성을 모색해 보는 글들을 연재했었습니다. 거기서 저는 영미권에서 활발히 논의되고 있던 이른바 '과학과 종교(science and religion)' 연구 프로그램에 입각하여 과학과 종교의 화해를 모색하는 일련의 흐름들을 한국적 상황에 맞게 소개했습니다. 한마디로, 한국의 개신교가 진화론을 공공의 적으로 상정할 필요는 없다는 논증을 펼쳤습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창조 과학 운동을 건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혈기왕성한 20대였기에 조심스럽게 접근하기보다는 직설적으로 비판했지요. 심지어 "창조 과학회는 사이비 과학으로 교인들에게 사기를 치는 단체 아니냐"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진화론을 연구하는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어떻게든 진화론과 기독교를 화해시켜 보려고 애를 썼던 상황이었습니다.

독자들의 반응은 나름 뜨거웠지요. 돌 맞을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복음주의 기독교인이지만 창조 과학은 영 아닌 것 같았는데, 가려운 데를 긁어 줘서 고맙다"라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고 응원의 이메일 메시지를 보내 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오히려 창조 과학회 측의 반응이 즉각적으로 나오지 않았었지요. 그러다 거의 1년이 지난 후에 창조 과학회 측 임원(모 대학 의대 교수)이 같은 잡지에 기고한 답장이 있었지요.

그 답장의 요지는 첫째 "진화론은 과학적이지 않다."라는 것이고 둘째는 "진화론은 무신론"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저는 바로 다음 호에 "진화론이 과학이 아니라면 과학은 없다"라는 제목으로 첫 번째 반론에 즉각적으로 대응했습니다. 창조 과학 옹호자들이 과학에 대해서 이중 잣대를 갖고 있다는 지적을 했지요. 예컨대 진화론을 비판할 때는 지나치게 엄격한, 그래서 그 어떤 과학적 활동도 사이비 활동처럼 만들어 버리는 기준을 택하는가 하면 창조 과학을 내세울 때는 지나치게 느슨한, 그래서 그 어떤 활동도 과학의 캠프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만드는 기준을 들이댄다는 지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어떤 기준으로 보아도 창조 과학을 진화론의 위에 놓을 수는 없다고 결론 내렸습니다(한편, "진화론은 무신론"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지면 관계상 대응을 하지 못했었는데, 지금의 제 상황에서 보면 대응하지 않은 게 잘한 일인 것 같아요. 제가 지금 무신론적 진화론자 아닙니까?)

몇 달 후에 창조 과학회의 핵심 멤버였던 모 교수가 반론을 보내왔습니다. 그 교수는 제 글의 내용보다 저의 태도를 문제 삼더군요. 자세한 것은 기억이 나질 않지만(인터넷에서 찾아볼 수는 있겠지만 별로 그러고 싶지 않네요.), 한마디로 요약하면 저더러 "젊은 것이 오만불손하다"는 거였습니다. 당시에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대응을 할지 말지를 고민했던 것 같은데요, 결국 그 논쟁에서 저는 빠지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이 논쟁을 이어 갔습니다.

날카로운 지적과 공격적인 단어들은 논쟁의 진정성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특성을 태도의 문제로 환원하려는 태도는 당시로서는 정말 이해하기 힘들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이해를 합니다. 원래 종교, 특히 기독교 내에서 토론다운 토론을 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힘든 일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핵심을 문제 삼게 되면 태도의 문제로 넘어갈 수밖에 없는 메커니즘이 종교에는 있는 것 같아요. 새파란 젊은 것이 자신들의 텃밭인 창조 과학의 정체를 까발리고 있으니 얼마나 불손해 보였겠습니까? "오만한 놈"이라는 비난을 당했어도 저는 그때 과학계의 진실을 기독교권 내로 알렸다는 사실에 당당했습니다.

갑자기 궁금해져서 방금 전에 인터넷 서핑을 하다 보니 지금도 당시의 글들이 인터넷에 떠도네요. 좋은 세상이긴 하지만 한편 무섭습니다. 무신론자인데도 인터넷의 증거상으로는 저는 아직까지 기독교와 진화론을 어떻게든 화해시켜 보려는 유신론적 진화론자입니다.
▲KAIST교회 홈페이지. ⓒ프레시안

KAIST와 과학원 교회, 그리고 창조 과학 전시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 창조 과학은 이제 그만 언급하고 싶습니다. 김 선생님께서는 국립 대학인 KAIST 내에 특정 종교에 바탕을 둔 창조 과학 전시관이 있다는 사실을 문제 삼으시면서 그것을 '종교의 자유' 문제와 연관을 시키셨는데요, 전적으로 공감하면서도 저는 더 심각한 문제를 추가로 지적하고 싶어요. 선생님도 말씀하셨지만 창조 과학 전시관은 동아리로 등록된 '과학원 교회'의 내부에 있습니다. 국립 대학 내에 교회가 버젓이 있다는 말씀이지요. 동아리로 등록되어 있으니 틀림없이 동아리 지원금도 받고 있을 터고요. KAIST의 구성원이 아닌 사람들(목회자를 포함하여)이 교회의 중요한 멤버로서 참여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일개 동아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큰 공간(100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규모의 예배당)도 차지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죠. 정부의 지원으로 운영되는 국립 서울 대학교 내부에 이런 교회가 있다고 해 보세요. 학교의 지원금도 받고, 공간도 할당받고, 외부에서 온 목사가 중심이 되어 예배를 인도한다고 해 보세요. 그것도 일요일에만 학교 건물을 빌리는 게 아니라 매일 자기 방처럼 쓴다고 한다면, 학교 구성원들의 항의가 빗발칠 것입니다. 그 중에는 이번 기회를 통해 학교에 작은 사찰을 만들자는 불자가 있을지 모릅니다. 그들의 요구를 어떻게 막겠습니까? 다시 말해, 특정 종교의 회당이 학교 내로 들어와 마치 동아리처럼 활동하는 것은 국교를 부정하는 헌법의 기본 조항에 위배되는 경우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 경험으로는 여러 종교들 중에서 유독 기독교 계통의 종교들이 특히 이런 얌체 같은 짓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혹시나 해서 포털에 "서울 대학교 교회"라고 쳐 보니 "서울 대학 교회"가 뜨네요. 홈피에 들어가 보니 정말로 서울 대학교 내에서 강당을 빌려 모임을 갖는 교회가 있습니다. 서울대 교수들이 주축인 것 같지만 외부에서 목사도 초빙한 것 같군요. 국립 대학에서 이래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저도 한때 KAIST의 과학원 교회에 발을 깊숙이 담갔던 사람으로서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관련 기사 : "이명박 되면 청와대에 교회 짓는다고요?")

지적 설계론, 그저 사이비 과학일 뿐!

이제 화제를 좀 바꿔 볼게요. 영 아닌 것에 대해 계속 이야기기하려니 점점 재미가 없어집니다. 김 선생님은 주로 창조 과학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요, 최근 영미권에서 유행처럼 번진 '지적 설계 운동(intelligent design movement)'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논의를 해 보는 게 좋을 듯해요.

두 분 혹시 누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는지 아십니까? "진화론과 지적 설계론을 함께 가르쳐 학생들에게 논쟁이 무엇인지를 이해시키는 것이 타당하다" 어느 목사의 주장이 아니랍니다. 2005년 8월 1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텍사스 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거든요. 도대체 지적 설계론이 무엇이기에 대통령까지 나서서 가르치라 마라 하는 것일까요?

<종의 기원>이 출간되고 150년이 지나는 동안 진화론의 수용과 관련하여 가장 흥미로운 반응을 보인 국가는 아마도 미국일 것입니다. 김 선생님도 요약해 주셨듯이, '원숭이 재판'이라 불리기도 하는 스코프스 재판(1925년 테네시 주)에서 반진화론법이 통과된 사건부터 1981년에 알칸소 주에서 창조론자들이 요구했던 '동등시간법'(진화론을 가르치는 시간만큼 창조론도 동등한 시간 동안 가르치도록 요구한 법)의 등장까지, 과학계에서는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진화론에 대해 미국의 보수주의 기독교 층은 계속해서 딴죽을 걸어 왔지요. 이런 맥락에서 1990년대 등장한 지적 설계론(intelligent design, 이하 ID)은 진공 속에서 새롭게 탄생한 것이라기보다는 이런 일련의 흐름 속에서 창조론이 좀 더 세련되어진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CBS 방송사가 2004년 말에 실시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중 65%가 창조론을 진화론과 함께 가르치길 원하고, 심지어 37%는 진화론 대신에 창조론을 가르쳐야 한다고 답했습니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부시 후보를 찍은 유권자 중 45% 창조론을 학교에서 가르쳐야 한다고 답한 반면, 존 케리 후보(당시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지지자 중에는 24%정도만이 이에 찬성했지요. 또한 2004년 성탄절 직전에 한 뉴스위크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중 62% 공립 학교에서 진화론과 함께 창조론도 가르쳐야 한다고 응답했습니다. 게다가, 신이 우리 인간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창조했다고 믿는 미국인은 55% 됩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통령의 ID 옹호 발언을 이해 못 할 것은 아닌 것 같아요. 게다가 부시 대통령의 보수적 신앙심은 역대 미국 대통령들 중에서도 가장 특출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ID와 진화론 간의 논쟁을 가르치라.'는 미 대통령의 발언에는 ID 운동의 집요한 전략이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논쟁을 가르치라(Teach the controversy)"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전략은 지난 10여 년 동안 ID 운동의 산파역을 담당했던 디스커버리 연구소(Discovery Institute, 이하 DI)의 작품입니다. 미국의 ID 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DI와 그 주변의 인물들, 그리고 그들의 활동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DI는 미국 워싱턴 주의 시애틀에 본부를 두고 있는 보수 기독교계의 싱크 탱크로서 공화당 정치인 출신의 부르스 채프먼(Bruce Chapman)과 정보 기술의 석학인 조지 길더(George Gilder)가 1990년에 의기투합하여 만든 공공 정책 연구 기관이었습니다. 이렇게 출발한 DI는 1996년에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과학 철학으로 박사를 갓 받은 스티븐 메이어(Stephen C. Meyer)의 합류로 '과학과 문화 갱신 센터(Center for the Renewal of Science and Culture)'라는 부설 연구소를 설립하게 되었지요.
▲필립 존슨. ⓒ프레시안

이 연구소는 캘리포니아 주립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의 법학 교수 필립 존슨(Phillip E. Johnson, 1940년~ )의 주도로 1998년부터 이른바 '쐐기 문건(Wedge document)'을 작성하게 됩니다. 이 문건에는 미국에 ID를 퍼뜨리기 위한 향후 5개년 전략이 담겨져 있었는데, 내부용으로 회람되던 것이 1999년에 인터넷을 통해 그 내용이 새어 나왔습니다. (필립 존슨 사진)

'쐐기 전략(Wedge strategy)'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전략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다음의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과학적 유물론(scientific materialism)과 그것의 파괴적인 도덕적·문화적·정치적 유산을 물리치는 일이고, 둘째는 유물론적 설명을 인간과 자연이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유신론적 이해로 대체하는 일입니다"

이 문건이 공개되자 많은 사람들은 DI가 ID를 내세워 전국적이고 국제적인 운동을 전개하는 궁극적 이유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과학적 성취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유신론적 세계관의 확산을 위한 것이었죠. DI는 유신론의 확산을 가로막는 원흉으로서 진화론을 지목했고 그것의 지위를 흔들기 위한 방법으로서 ID를 들고 나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진화론은 지금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ID는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이론이다. 사람들에게 이 둘 간의 논쟁을 가르쳐야 한다. 열린 마음을 갖은 사람들이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이라고요.

김 선생님도 지적하셨듯이, "ID"라는 용어 자체는 1989년에 '사상과 윤리 재단(Foundation of Thought and Ethics)'이 출간한 <판다와 사람에 관하여(Of Pandas and People)>에서부터 공식적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이 책은 고등학교 과학 교과서용으로 씌어졌는데, 창세기의 구절들을 직접적으로 인용하는 창조 과학의 방식과는 달리, 성서를 참조하지 않으면서 "창조"나 "창조론" 등의 용어들을 "지적 설계(ID)"라는 탈기독교적 용어로 대체하는 전략을 취했습니다. 현명한 선택이었죠. 이 책의 저자들은 ID가 "생명의 다양한 형태들이 본래의 특성을 가진 상태에서 갑자기 지적인 행위자(intelligent agent)에 의해 시작되었다"라는 것을 뜻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그 지적인 행위자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는 전략을 취함으로써 공립 학교 교과서의 최소 요건 중 하나-"특정 종교의 확립에 기여해서는 안 된다"라는-를 만족시키려 했습니다. 이때부터 출판사는 여러 자원들을 동원하여 교육 위원회들이 이 책을 교과서로 택할 수 있도록 홍보와 로비를 펼치기 시작합니다.
▲<심판대의 다윈(Darwin on Trial)>. ⓒ프레시안

ID가 <판다와 사람에 관하여>에서 시작된 용어이긴 하지만, 1990년대 전반부에 ID의 확산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책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것은 저명한 법 논리학 교수인 필립 존슨이 1991년에 출간한 <심판대의 다윈(Darwin on Trial)>(이승엽 외 옮김, 까치 펴냄)입니다. 존슨은 생물학 교육을 공식적으로 받은 적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이 책에서 법의 논리로 현대 진화론의 난점들을 고발하려고 했습니다. 이 책은 곧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ID는 새로운 유형의 창조론으로 미국 대중들의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는 후속작들을 통해 단순히 진화론 비판에 머물지 않고 과학계의 '방법론적 자연주의(methodological naturalism)' 자체를 문제 삼고 있습니다. 그가 대안으로 제시한 방법론은 "유신론적 실재론(theistic realism)"입니다. 이런 그의 입장은 DI의 쐐기 문건에서 적시된 두 가지 목표와 정확히 일치하지요. 그는 1999년에 공화당 텃밭인 캔자스 주의 교육 위원회가 공립 학교에서 생명의 기원을 어떤 이론으로 가르쳐야 할지를 놓고 벌인 일련의 회의에 깊숙이 관여하기도 했는데, 그 과정에서 '논쟁을 가르치라.'라는 캠페인을 시작한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DI는 이 모든 전략과 캠페인을 공식화하는 막강한 후원 기관이고 존슨은 DI 산하의 '과학과 문화 센터'에서 고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일류 대학의 석학이 든 깃발은 기존의 창조 과학에 식상해 있던 (교육 수준이 높은) 보수주의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젊은 지구 창조론(young earth creationism)'을 주장하는 창조 과학자들이 주로 신자들을 교육하는 데 많은 힘을 기울였다면, ID학자들은 그 일 외에도 열린 공간에서 주류 학자들과 공개적으로 논쟁하는 것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논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 했다고 해야 더 옳을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DI의 '쐐기 전략'과 '논쟁을 가르치라' 캠페인은 지적 열등감을 떨쳐 버리려는 보수주의 기독교계의 몸부림으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 ID 운동은 '지적 설계자'를 특정화하지 않음으로써 개신교의 많은 분파들과 가톨릭을 포함한 유신론 진영을 모두 품는 데 적잖이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관용(?) 때문에 창조 과학에 익숙한 한국 주류 개신교 내부에서는 ID를 아직 경계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지난 15년간의 ID 운동의 역사가 녹아 있는 DI 홈페이지(☞바로 가기)에는 ID가 다음과 같이 정의되어 있습니다. "ID는, 세계와 생명의 어떤 특성들은 자연 선택과 같은 방향성 없는 과정보다는 어떤 지적인 원인(intelligent cause)에 의해서 더 잘 설명된다는 주장이다."

누군가 깃발을 꽂으면 그 주변으로 사람이 몰리는 법입니다. "다윈주의: 과학인가 철학인가?"라는 주제로 1992년에 남부 감리교 대학교(Southern Methodist University)에서 열린 한 학회에서 존슨은 향후 ID 운동을 함께 짊어질 동지들을 만나게 되는데요, 그중에서 마이클 비히(Michael Behe)와 윌리엄 뎀스키(William Dembski)는 존슨과 더불어 지난 10년간의 ID운동을 이끈 핵심 논자들입니다.
▲마이클 비히. ⓒ프레시안

미국 리하이 대학교(Lehigh University)의 생화학 교수인 마이클 비히(Michael Behe, 1952년~)는 1996년에 <다윈의 블랙박스(Darwin's Black Box)>(김창환 외 옮김, 풀빛)라는 책을 통해 현대 진화론이 세포의 진화조차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컨대, 그는 하나의 편모에도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irreducible complexity)'이 존재하는데 그런 복잡성은 다윈의 진화론으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으며 오히려 '지적 설계자'의 존재와 개입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결론 내리지요. '진화론이 위기이며 그 대안이 ID다.'라는 식의 이런 주장은 ID 운동의 기본 노선에 충실한 경우이긴 하지만, 생물학자로서 그는 법학자인 존슨이 할 수 없는 방식으로 ID 운동에 기여했습니다. 어쨌든 이 책은 당시 미국 출판계를 강타해 단숨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지난 10여 년 동안에는 스테디셀러의 자리를 지키고 있지요. 이렇게 폭발적인 반응이 생겨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90년대 초반부터 ID 운동이 대중적 관심을 끌기 시작했고, 전문 생물학자가 메이저급 출판사를 통해 주류 진화론을 반박하는 도발적인 책을 내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책에 대한 반응이 뜨거워지자 각종 매체들은 앞 다투어 서평과 인터뷰를 실었는데, 그중 몇몇 저명한 서평 저널에서는 이 책을 바라보는 진화론자와 창조론자들 간의 뜨거운 논쟁을 싣기도 했습니다. "다윈에 도전하는 엄청난 책"이라는 찬사로부터 "변장한 창조론에 불과한 쓰레기 같은 책"이라는 혹평에 이르기까지 반응들도 다양했지요. 존슨이 탁월한 법 논리를 전개하는 법학자이긴 하지만 과학의 논리를 잘 아는 과학자는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ID가 번번이 과학자 공동체에서 문전박대부터 당했던 것에 비하면, 비히에 대한 대접은 ID 운동이 한 단계 격상되고 있음을 드러내는 증거였죠. 좋든 싫든 생물학자 비히의 주장에 대해서는 과학자 공동체가 어떤 식으로든 대응을 해 줘야 했습니다.

<다윈의 블랙박스>의 핵심 개념인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은 어떤 체계를 이루는 여러 부분들 중 하나라도 없어지면 그 체계가 기능을 하지 못하는 그런 복잡성을 뜻합니다. 비히에 따르면, 마치 쥐덫을 이루는 다섯 개의 핵심 부분(해머, 스프링, 걸쇠, 나무판자, 금속막대) 중 하나라도 고장 나면 쥐덫으로서의 기능이 정지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포 수준의 복잡성도 이런 것이어서 다윈의 점진적인 자연 선택론으로는 세포 하나의 존재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합니다. 마치 생화학자가 된 윌리엄 페일리를 보는 듯합니다.
▲편모를 모형화한 것. ⓒ프레시안

▲쥐덫 장치 중 하나만 작동을 못해도 쥐덫 기능 자체가 정지됨. ⓒ프레시안


하지만 생물학자들은 세포 수준의 복잡성과 그것의 진화에 대해 그동안 많은 연구들을 해 왔으며 그에 대한 진화론적 설명들을 계속 발전시켜 왔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왜 비히가 엄연히 존재하는 진화론적 설명들을 진지하게 고려하지도 않았는지, 또 더 나은 진화론적 설명을 찾기 위해 왜 노력하지 않았는지 잘 모르겠다고 불평합니다. 실제로 비히는 <다윈의 블랙박스>를 출간하기 전에 자신의 분야에 종사하는 동료 연구자들로부터 그 어떤 피드백도 받지 않았습니다. 매우 비정상적인 경우이지요.

한편, 신학계도 비히의 손을 들어 주지 않은 것 같았는데요, 그것은 비히가 환원불가능한 복잡성을 통해 신학적 변증을 이끌어내는 데 있어서도 너무 성급했다는 비판입니다. 만일 그의 주장처럼, 기존의 과학으로 설명하기 곤란한 부분이 있고 지적 설계에 의해 그 부분이 잘 설명된다고 해보지요. 그런데 어느 날 그 부분에 대한 더 나은 진화론적 설명이 제시되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그의 신(神)은 설명의 간격을 메우는 대상으로 전락하게 될 터이고,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그 간격은 점점 더 축소될 것입니다. 특히 과학적 성과들을 존중하는 신학자와 종교학자에게 이런 결론은 받아들이기 힘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세포 진화에 대해 비히도 흔쾌히 받아들일 만한 진화론적 설명이 조만간 누군가에 의해서 제시된다면 틀림없이 그 간격은 줄어들 것이고 따라서 신의 활동 범위는 점점 줄어들 것입니다(이 대목에서 다음 번 편지에서 신 선생님이 ID의 신학적 쟁점들을 좀 정리해 주시면 더 좋을 것 같아요). 어쨌든 이런 곤경에서 ID를 구제할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일까요?
▲윌리엄 뎀스키. ⓒ프레시안

윌리엄 뎀스키(William A. Dembski, 1960년~)는 바로 이 취약점들을 정면 돌파하며 ID 이론의 지위를 한 단계 높이려 시도한 사람입니다. 그는 시카고 대학교에서 수학 박사를 받았고(1988년), 일리노이 대학교 시카고 캠퍼스에서 철학 박사를 받았으며(1996년), 그것도 모자라 같은 해애 프린스턴 신학 대학에서 신학 석사까지 받은 공부 욕심이 많은 소장 학자인데요, 그가 여타 ID 옹호자들보다 두드러진 면은 학위의 수만이 아닙니다. 그는 이른바 ID 삼인방-존슨, 비히, 뎀스키-중에서 가장 왕성한 집필 활동을 하고 있고,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에서 자신의 철학 박사 학위 논문을 출판할 만큼 학문적 잠재력을 갖추었으며, 다른 이들과 달리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온라인에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신세대 논객이거든요.

그는 1999년~2005년 동안 기독교 계열의 학교인 베일러 대학교(Baylor Univeristy)의 마이클 폴라니 센터(Michael Polanyi Center)에서 연구했으며, 현재는 남서부 침례 신학 대학의 연구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물론 그는 1996년부터 현재까지 DI의 '과학과 문화 센터'의 특별 연구원인데요, 그의 저서들 중에는 <설계 추론>(1998년) 외에 <설계 혁명>(2004년), <공짜 점심은 없다>(2002년) 등 6권의 단독 저서가 포함되어 있고, 저명한 생물 철학자 루즈(Michael Ruse)와 함께 편집한 <설계에 대해 논쟁하기>(2004년)를 비롯한 총 6권의 편저가 있습니다.

그중에서 그의 <설계 추론>은 이런 왕성한 활동을 할 수 있게 만든 지적 원천입니다. 그에 따르면, 자연적으로 생긴 복잡성을 능가하는 또 다른 종류의 복잡성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데, 그런 현상들은 "설계 추론(design inference)"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습니다. 그는 그런 종류의 복잡성에 "특정화된 복잡성(specified complexity)"이라는 용어를 붙이면서 그것으로 우연성이나 복잡성과 구분하려 했지요. 쉽게 말하면, 자연적 과정으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특정한 복잡성은 지적 설계자의 개입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이런 발상은 진화론을 비판하고 유신론적 과학 방법론을 제시하려는 ID 운동의 기본 노선에 정확히 일치합니다.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뎀스키는 확률 이론과 정보 이론을 통해 비히와 똑같은 결론에 도달했다는 사실이지요.

그러나 과학 철학자들은 그의 현란한 확률 테크닉 뒤에 작동 불가능한 끼워 맞추기식 과학 방법론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고 지적하고 우연성, 복잡성, 특정성을 구분하는 그의 '설명 필터(explanatory filter)' 이론 또한 작위적이라고 비판해 왔습니다.

주류 학계의 이런 비판들에도 불구하고 ID 운동의 삼인방이 펼친 지난 활동들은 미국의 진화 vs 창조 논쟁에 새 국면을 가져다줬다고 봅니다. 그것은 크게 다음의 다섯 가지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첫째, 음지의 창조론을 대중들의 관심 속으로 끌고 왔습니다. 둘째, 성서를 직접적으로 인용하지 않음으로써 진화 vs 창조 논쟁의 구도를 무신론 vs 유신론의 구도로 확장시켰지요. 셋째, 적어도 외양적으로는 학문적 능력을 갖춘 논자들이 전면에 나섬으로써 보수 엘리트 세력의 지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넷째 ID 옹호자들은 싱크탱크인 DI를 통해 각종 전략과 캠페인을 세우고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다섯째, ID 옹호자들은 ID 교과서 채택과 ID의 공교육 침투를 위해 법적인 투쟁을 꾸준히 전개해 왔습니다.

김 선생님도 언급하셨던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의 도버 지역에서 벌어진 최근의 법정 싸움은 ID 운동의 이 모든 특성들이 집약된 재판이었습니다. 저도 조금 부연할게요.

2005년 도버 카운티의 교육 위원회는 학교에서 진화론과 함께 ID을 가르치라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에 11명의 학부모와 미국 시민 자유 연맹(ACLU)의 교육 위원회는 1987년 연방 법원의 "공립 학교에서는 창조론을 과학 이론으로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판결을 이번 결정이 심각하게 훼손했다면서 소송을 제기했지요. 학부모인 키츠밀러 등(Kitzmiller et al.)이 미국 연방 법원에 제기한 소송은 2005년 9월 26일에 시작되어 같은 해 12월 20일에 막을 내렸습니다.

이 재판에 전문가 증언으로 참여한 학자들은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데요, ID의 옹호자로는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이라는 개념으로 ID계의 슈퍼스타가 된 마이클 비히 교수와 저명한 과학 사회학자 스티븐 풀러(Steven Fuller) 교수(영국 워릭 대학) 등이 참여했고, 반대자로는 브라운 대학교의 케네스 밀러(Kenneth Miller) 교수(생화학)와 미국 미시건 주립 대학교의 과학 철학자 로버트 페녹(Robert Pennock) 교수 등이 참여했습니다. 담당 판사인 존 존즈 3세(John E. Jones III)는 무려 139쪽에 달하는 판결문을 통해 "ID은 창조론의 한 형태이며 과학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학교에서 진화론과 함께 가르치라는 도버 카운티 교육 위원회 측의 결정은 미국 수정 헌법의 제 1조인 국교 금지 조항을 어긴 위법"이라고 판결했습니다. 이 판결로 ID를 학교에서 가르치려는 운동은 일단 법적인 제재를 받게 되었습니다만, 반창조론 운동에 앞장서온 미국 과학 교육 센터의 스콧 소장은 "과거에도 보수 기독교인들의 반발이 있었지만 최근만큼 심한 적은 없었다"라고 평가합니다. 미국 51개 주 가운데 진화론 수업을 줄여야 한다든지 창조론도 같이 가르쳐야 된다는 요구를 하는 주가 무려 31개 주에 이를 정도입니다.

물론 이런 현상이 기독교 국가라 할 수 있는 미국의 독특한 현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다윈이 미국이 아닌 영국의 과학자라 그런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다윈의 나라 영국에서도 최근에 "창조론도 끼워 줄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2006년 1월 영국의 BBC 방송국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2000명의 응답자 중 40% 이상이 창조론이나 ID를 학교 과학 수업에서 가르쳐야 한다고 답했습니다. 구체적인 질문과 응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질문1> 생명의 기원과 발생을 가장 잘 기술해 주는 이론은?

1)창조론(창조 과학 포함) - 22%, 2)ID - 17%, 3)진화론 - 48%, 4)모르겠음 -13%
<질문2> 어떤 과목(들)이 학교 수업에서 가르쳐져야 한다고 보는가?

1)창조론 - 44% 2)ID - 41% 3)진화론 - 69%

이런 결과를 놓고 영국 왕립 학회의 회장은 "다윈이 이미 150년 전에 제창하여 오늘날 방대한 증거들로 지지받고 있는 진화론이 일반인들에게 여전히 의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 놀라운 일"이지만, "영국은 미국과는 달리 주요 종교 분파 중에서 진화론을 과학 수업에서 빼자고 주장하는 집단이 없다는 사실이 다행스럽다"라고 자위하고 있습니다. 개탄스러운 일이지요.

물론 진화론을 여전히 현대 생물학의 중요한 근간으로 여기고 있는 대다수의 미국 과학자들은 이런 일련의 흐름을 매우 걱정스럽게 보고 있습니다. 가령 최근 <뉴욕타임스>는 저명한 과학자의 입을 빌어 "ID는 과학 이론이 아니다"라고 선언했고 전 세계의 가장 큰 과학자 집단인 미국 과학 진흥 협회의 회장은 "ID에는 과학이 없으며 과학적으로 대답될 수 있는 질문조차 없다"라고 일축했습니다.

"어이가 없다.", 주류 과학계의 지적 설계론 대응

영화 산업에 비유하자면, 어쨌든 ID는 흥행 몰이에는 성공한 운동인 것 같아요. 하지만 그들에게는 냉혹한 평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ID의 질주에 대해 주류 생물학계와 지성계의 반응은 과연 어땠을까요?

흥미롭게도 이들의 반응은 한마디로 "어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같이 "진화론에 무슨 위기가 있고 진화론과 ID 간에 무슨 논쟁이 있느냐"는 반응이지요. 즉, ID 옹호자들의 주요 주장과 전략, 그리고 캠페인 등이 과학 공동체가 받아들이는 입증된 이론과 사실들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고, 유신론적 세계관을 선전하려는 종교·정치적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미국 과학자 사회는 ID운동이 미국에서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흐름이 되었다는 판단을 내리고, 그동안 펼쳤던 '무시 전략'을 재고하기에 이릅니다. (지적 사고 표지)
▲<지적 사고(Intelligent Thought)>. ⓒ프레시안

<지적 사고(Intelligent Thought)>(1996년)는 주류 과학자 사회의 대(對) ID 전략이 변화했음을 알리는 중요한 책입니다. 이 책은 세계 지성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출판 편집자로 불리는 미국의 존 브록만(John Brockman)이 편집하고 16명의 세계적 석학들이 ID에 대한 자신의 비판적 입장을 전개한 대표적인 ID 비판서입니다. 혹시 두 분 선생님께서는 읽어 보셨는지요. 필진에는 저명한 생물학자, 철학자, 심리학자, 인류학자, 역사학자, 물리학자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예를 들어 시카고 대학교의 진화 생물학자 제리 코인(Jerry A. Coyne), 터프츠 대학교의 인지 철학자 데니얼 데닛(Deniel C. Dennett),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의 진화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 하버드 대학교의 진화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대가급의 학자들이 함께 참여했습니다. 이런 필진들이 ID 하나만을 다루기 위해 함께 모였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뉴스거리죠.

이들은 모두 ID가 과학계의 사실들을 왜곡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비판의 요지를 제 방식대로 재구성해 볼게요.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점령하지 않았다고 기술돼 있는 역사 교과서가 있다고 해 보죠. 그리고 그 저자들이 지금 교육부를 방문하여 연일 시위를 하고 있다고 해봐요. 또 일부 인사들은 그 교과서의 채택을 목표로 고위층 로비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한쪽 입장만 가르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양쪽 입장을 모두 가르쳐라" 이 얼마나 근사해 보이는 논리입니까!

몇 년 전에 일본에서 이와 유사한 움직임이 있어서 크게 뉴스화 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국민과 다수의 일본 지식인들은 그런 '운동'에 주저 없이 '역사 왜곡', '사실 왜곡'이라는 꼬리표를 달아 줬습니다. 왜냐하면 강제 점령의 증인들이 지금도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증거들을 보았을 때 적어도 일제의 조선 강점에 대해 '논란의 여지'는 없어야 합니다. 이 역사적 사실 앞에 '양쪽 입장'은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지적 사고>의 필진들은 과학 영역에서 이와 비슷한 사건들이 지금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개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ID를 믿는 창조론자들이 생명이 자연 선택을 통해 진화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각 주의 교육 위원회를 압박하고 있고, 급기야 보수주의 기독교 인사들의 로비에 편승한 부시 대통령은 최근에 "국민들이 상충하는 견해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진화론과 지적 설계 가설 간의 논쟁을 함께 가르치는 게 좋지 않겠나." 라며 한 수 거들기까지 하지 않습니까?.

대표적인 과학적 무신론자인 데닛은 "이 둘 사이에 '논쟁'이란 게 실제로 있는가?"라고 반문합니다. ID 운동의 이 공정해 보이는 듯한 태도 뒤에는 과학적 사실에 대한 외면과 왜곡이 숨어 있다는 지적이지요. 그에 따르면, ID의 기본 전략은 공개적으로 진화론을 오해하거나 오용해 놓고는 생물학자들이 그에 대해 마지못해 몇 마디 대꾸하면 "거봐라 여기에 논쟁이 있지 않느냐"라는 식이라는 거죠. 또, '성의 진화', '인간 마음의 진화', '자연선택의 힘' 등과 같은 진화론 내부의 진짜 논쟁들을 부풀려 마치 진화론이 좌초 직전에 있는 양 떠벌립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딱 한마디만 덧붙이지요. '그러니 ID이 옳을 수밖에.' 하지만 <지적 사고>의 필진들은 이런 전략은 정상적인 과학자의 관점에서는 마치 일본 보수 우익들의 '망언'과 비견될 만큼 과학의 진실을 왜곡하는 저질스러운 행동이라고 규탄합니다.

진화론을 훌륭한 과학으로 받아들이는 절대 다수의 학자들은 이렇게 ID 운동에는 진짜 과학이 없다고 단언합니다. 그들에 따르면 거기에는 과학자라면 누구나 참여해야 할 논문 심사 시스템이 없고, 혹시 학회와 학술지가 있을라치면 그것은 늘 '그들만의 리그'일 뿐입니다. 그러니 연구 프로그램과 그 성과물이 있을 리 없습니다. 반면 어떻게든 교과서는 만들었습니다. 또한 대중 강좌 프로그램은 바쁘게 돌아갑니다. 왜냐하면 과학의 내용과 논리에 익숙하지 않은 대중들이 그들의 고객이기 때문입니다. 불행히도 이것은 바로 사이비 과학의 전형적인 징표이지요.

예컨대 데닛은 ID 운동과 진화론을 다음과 같이 비교합니다. "진화 생물학은 생물학자들을 당황스럽게 만드는 모든 것들에 대해 확실한 설명을 제공하진 못해 왔다. 하지만 ID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설명하려는 시도조차 아직 하지 않았다." 이런 의미에서 ID를 과학 수업 시간에는 얼씬거리지도 못하도록 해야겠지만, 현안이나 정치, 사회 현상 등을 다루는 사회과 수업에는 오히려 좋은 소재로 다룰 수 있을 것입니다. 소위 '혈액형 심리학', 'UFO학', '심령술', '토정비결'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아, 우리에겐 황우석의 인간 줄기 세포 스캔들도 있었군요! 이건 이제 과학의 주제가 아니라 인문 사회학의 소재잖아요.

ID를 과학계에서 추방하고자 하는 <지적 사고> 필진의 한 목소리를 저는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9·11 테러와 더불어 ID 운동이 미국 사회에서 새로운 지성 운동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신론자들은 원래 개인 플레이에 능한 사람들이잖아요. 상대적으로 자존심도 좀 강하고 잘 뭉치지 않는 사람들인데요, 이들이 '반 ID'를 목표로 한목소리를 내기 위해 뭉쳤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예컨대 진화론의 쟁점들에 대해서는 서로 앙숙처럼 싸웠던 이들도(가령, 도킨스와 코인), ID 운동의 '어이없음'을 고발하기 위해서 한 배를 탔거든요. 이런 맥락에서 <지적 사고>는 어쩌면 한권의 편저서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꼭 한번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국내에도 창조 과학에 식상한 젊은 기독교들을 중심으로 해서 전 세계의 ID 운동에 동참하는 집단들이 생겨났습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서울 대학교의 동아리로 등록하여 활동 중인 '서울 대학교 지적 설계 연구회'입니다. 이 모임은 1998년 11월, 창조론과 기독교적 학문 연구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대학원생들을 중심으로 서울 대학교 '창조 과학 연구회'라는 이름으로 모임이 시작되었습니다. 회원들은 기독교적 학문 연구의 가능성, 다양한 창조론에 대한 조망, 그리고 최근에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지적 설계 운동 등을 중심으로 함께 공부 및 연구하며 여러 가지 관련된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바로 가기).

또한 몇몇 현직 교수들과 서울 대학교 지적 설계 연구회의 젊은 멤버들이 주축이 되어 '지적 설계 연구회(KRAID)'라는 연구 단체가 2004년 8월 21일에 발족했더군요. KRAID의 구성원들은 스스로 미국 ID 운동의 기본 전략을 그대로 따라가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사실 몇 년 전에 모 일간지의 한 면에서 지적 설계 운동에 관한 논쟁이 있었어요. 두 분은 보셨는지 모르겠어요. 기자가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ID 운동을 소개하고 지적 설계 연구회의 회장인 모 대학 공대 교수가 찬성 입장을, 그리고 어쩌다 제가 반대 입장을 개진하는 식이었죠. 저는 갑작스러운 부탁에 전체 기획이 무엇인지도 잘 모른 상태에서 주어진 원고를 보냈었는데요, 나중에 나온 기사를 보고 불쾌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ID를 옹호하는 쪽의 지면이 전체의 3분의 2 정도였고 제 글은 구석으로 밀려 있더군요. 사태 파악이 제대로 안 된 사람의 입장으로는, 진화론이 마치 ID에 대드는 형국처럼 보일 것 같았습니다. 좋게 해석해 본다면, 진화론이 ID의 거센 도전에 주저앉기 직전 상태에 있다는 식으로 비쳐졌을 것입니다.

국내 주류 기독교의 지지를 받고 있는 창조 과학이나 젊은 엘리트 기독교인 층의 관심을 받고 있는 ID는 세부적인 측면에서는 서로 다르지만 모두가 유신론을 과학에 억지로 입히려는 시도라는 측면에서 유사해 보입니다. 또한, 한국의 창조론 진영은 미국의 창조 과학을 그대로 수용했던 1980년대와 마찬가지로, 1990년대에는 미국의 ID를 국내에 소개하는 일에 주력해 왔습니다. 즉 내용과 전략 면에서 철저히 미국 기독교 진영을 그대로 따라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직수입 대리점인 셈이지요. 단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아직 국내에서는 ID를 과학 수업에 가르치기 위한 법정 투쟁 같은 게 없다는 점이지요. 김 선생님께서 지적하셨듯이, 우리 같은 다종교 국가에서는 전면전은 힘들겠지만, 기독교 재단의 사립 학교에서는 시도될 가능성이 낮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교사 직무 연수 같은 형태로 창조 과학이 슬그머니 과학 수업의 문지방을 넘어 들어오고 있습니다.

저는 창조 과학이나 ID 옹호자들이 좀 정직하게 논쟁을 걸어 왔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의 위치가 어딘지를 좀 정확히 인정한 상태에서 출발을 하면 그나마 논의가 될 것 같은데요, 그들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는 것 같아요. 자신들 앞에, 150년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과학자들이 검증하고 활용해 온 진화론이라는 커다란 산이 우뚝 서 있다는 사실을 먼저 좀 직시해야 합니다. 그래야 차근차근 산을 올라 다른 산으로 가기도 하고 그럴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창조론자들을 보면 뒷산에 몇 번 올라 보고는 에베레스트를 정복할 수 있다고 떠벌리는 사람들 같아요.

창조론 이야기를 하다 보니 너무 길어졌네요. 국내의 진화 vs 창조 논쟁사에서 참여자로 살아온 탓이겠지요. 김 선생님도 아주 개인적인 '나의 창조 과학 탈출기'를 보내 주셨고, 저도 이번에 '나의 진화 vs 창조 논쟁사' 같은 경험담을 보내드렸으니, 이제 신 선생님의 답장이 기다려집니다. 목사이시고 신학자이시니 저희 둘과는 또 다른 독특한 경험들이 있으실 것 같아요. 한번 풀어놓아 주시죠. 기대하겠습니다.

저희는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가능한 한 많이 미국 여행을 하고 싶은데요, 경비가 문제네요. 다음번 편지는 나이아가라 폭포 같은 곳에서 쓰면 멋질 것 같은데, 될지 모르겠습니다. 건강하십시오.

2007년 5월 9일

보스턴에서
장대익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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