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무 수석에 합리적이고 말이 통할 것 같은 이미지를 갖추고 있는 맹형규 전 의원을 임명하고, 홍보기획관이라는 어정쩡한 직책을 신설하면서까지 홍보전문가 이미지를 갖고 있는 박형준 전 의원을 발탁했다. 대통령이 공언했던 '낙천, 낙선 정치인 6개월 공직 임명 배제' 원칙이 무너졌어도 이번만은 언론까지도 이례적이라 할 만큼 협조적 태도를 보였다. 언론이 보기에도 작금의 사태는 심각했고, 이렇게라도 해서 사태 수습이 된다면 그 정도 원칙 훼손이야 눈감아줄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하는 심정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쇠고기 촛불 정국이 수그러들 무렵 발생한 두 번의 돌출 사건은 이명박 정부에게 소통의 문제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시사한다. 그것은 능력의 문제다.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 사건의 실체적 진실이 밝혀지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은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실체적 진실이 뭐였건, 사건 발생 후의 대처 과정에서 나타난 이명박 정부의 무능함에 대해서는 다들 실체적으로 인식하게 된 것 같다.
후쿠다 일본 총리가 이명박 대통령과의 환담 자리에서 독도를 다케시마로 표기하겠다고 사실상의 통보를 했던 것은 정황상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문제는 후쿠다 일본 총리의 "망언에 가까운 통보"에 대한 이명박 대통령의 대응인데, 과연 요미우리 신문의 보도대로 "지금은 곤란하니, 기다려 달라"고 했는지, 청와대의 설명대로 강하게 유감의 뜻을 표했는지 하는 실체적 진실 또한 당분간은 밝히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정상간 환담 내용을 밝히는 것이 외교 관례상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점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만, 절대 그럴 리는 없을 거라 믿으면서도 "만에 하나의 사태 발전"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는 또 하나의 참담한 현실 때문에 그렇기도 하다.
문제는 후쿠다 총리와 이명박 대통령간 환담 내용의 실체적 진실이 뭐였건, 취임 초 너무도 순진하게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를 일방적으로 선언할 때부터 일본이 독도 문제를 치고 나올 허점을 보여준 꼴이 됐고, 특히 요미우리 보도 이후 청와대와 정부의 혼란스러운 대응 과정에서 한·일 관계가 꼬일 대로 꼬여 버렸다는 점이다. 독도 문제를 보면서 이명박 정부의 능력에 근본적인 회의를 하게 되는 이유다.
대통령과 정권의 능력이란 무엇인가. 곁가지들을 다 쳐내고 몸통만 말한다면, 정부의 능력은 두 가지다.
첫째는 국정과제 설정 능력, 이른바 '내셔널 어젠다 셋팅(National Agenda Setting)' 능력이고 둘째는 국정과제 수행 능력, 즉 '내셔널 어젠다 가버닝(National Agenda Governing)' 능력이다. 이 두 가지 능력에 모두 뛰어나면 능력 있는 정권, 훌륭한 대통령이 될 것이고 이 두 가지 능력 모두에서 뒤떨어지면 무능한 정권, 못난 대통령이 될 것이다.
이 두 가지 능력은 대체로 같은 수준으로 나타나지만, 개중에는 과제 설정 능력이 유독 뛰어나거나 과제 설정 능력은 별로인데 과제 수행 능력에서는 탁월한 대통령이나 수상도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물론 집권 기간이 긴 대통령의 경우 이 두 능력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부침을 보이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승만, 박정희 두 사람은 아마도 이 부침이 매우 심했던 경우에 해당될 것이다.
두 가지 능력 중 우선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국정과제 설정 능력이다. 국정과제를 제대로 설정해야 수행을 하든 말든 할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무능한 정권이 대체적으로 국정과제 설정에서부터 실패하고 있는 것도 어찌 보면 자연스럽다. 역으로 말해 국정과제 설정만 제대로 이뤄지면 웬만해선 실패하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 되겠다.
김영삼 정권은 아마도 이 드문 사례, 즉 국정과제 설정은 제대로 했으나 국정수행에서 실패한 정권에 속하지 않을까 싶다. 민주화, 세계화라는 국정과제 설정은 제대로 했으나 그것을 정책 수준에서 구현하지 못해 결국 IMF위기를 초래했다고 할 수 밖에 없겠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는 문민정부와 같은 특수한 사례라기보다는 실패한 정권의 일반적 사례에 더 부합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다시 말해 이명박 정부도 다른 실패한 정권들과 비슷하게 국정과제 설정에 실패하고 있다는 뜻이다.
국정과제 설정은 대통령 선거 때부터 시작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통령 후보의 공약을 다듬고, TV토론과 각종 유세연설을 준비하는 과정이 곧 새 정부의 국정과제를 다듬는 과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말이다. 이렇게 1차 다듬어진 국정과제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를 거치면서 강하게 담금질된다. 선거라는 프레임에서 제시했던 공약 중 상당 부분은 국정운영이라는 프레임에 의해 재조정된다. 병렬적으로 나열됐던 다양한 정책 공약들도 당선자의 국가경영 철학에 입각해 핵심 국정과제와 중장기 추진 과제들로 재분류된다.
이 과정에서 후보 시절 공약은 새 정부의 국정과제로 재설정되는데, 이 재설정 과정의 핵심 메카니즘이 바로 소통이다. 당선자와 국민간 소통, 당선자와 당·정·청에 포진할 정권 핵심 세력간의 소통, 더 나아가 당선자 측과 전 정권과의 소통, 당선자 측과 야당 간의 소통, 당선자 측과 주요 외교 상대국 지도층 인사들간의 소통이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소통이 진정으로 의미 있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이며, 인수위 2개월이 집권 5년을 좌우한다는 말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명박 정부에게 지금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6개월 전에 제대로 하지 못했던 국정과제 설정 작업을 지금이라도 제대로 하겠다는 절박한 문제의식이다. 며칠만이라도 밀려드는 현안들은 총리에게 맡기고, 대통령 스스로 한가하듯 처절하게 "나는 왜 대통령이 됐으며 무엇을 하기 위해 대통령이 됐나"를 돌이켜보는 것이 필요하다.
평생 모은 재산까지 사회 환원하겠다고 약속한 대통령으로서 진정 국민을 섬기는 길이 어떤 길인지, 진정 국민과 소통하며 국민의 신뢰 위에서 국민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를 발전시켜 가기 위해서 지금 해야 될 일이 무엇인지를 차분하게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지금이라도 이명박 정부의 국정철학을 재정립하고 그에 입각해 이명박 정부의 핵심 국정과제를 재설정하며 이에 대한 국민적 동의와 지지를 재확인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국정과제 설정이 제대로 이루어지면, 그 다음 문제는 국정과제를 잘 수행하는 것이 될 터인데, 이때 견지해야 될 원칙이 바로 '선택과 집중'이라는 점을 동서고금의 정치는 잘 보여주고 있다.
대통령의 '선택'은 아마도 핵심 국정과제로 선별된 의제들에 대한 선택이 될 것인데, '집중'은 대통령의 전 역량을 이 의제들에 집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 외의 수많은 의제와 현안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바로 여기에서 책임총리제의 현실적 필요성이 제기된다. 쉽게 말해 대통령은 '선택'된 핵심 국정과제에 '집중'하고 그 외의 문제들은 총리 이하 국무위원들에게 폭넓게 위임하라는 것이다. 물론 그에 상응하는 권한과 책임을 부여하되, 엄격한 평가를 병행하면 된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국가경영 원칙은 만기친람형에 가까운 이명박 대통령의 리더십 스타일에 근본적 변화를 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결코 쉽지 않은 제안이다. 그러나 지금의 리더십 스타일, 현안 중심의 기능적 대응과 만기친람형 리더십이 초래한 10%대 지지율이라는 초라한 결과를 계속 외면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문제가 소통이 아니라 능력이라면, 대통령의 스타일과 마인드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해체와 재구성 과정이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 책임제에서 최종, 최후적 책임은 대통령에게 귀착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청와대, 내각의 면면을 제대로 바꾸는 문제는 그 다음에 생각할 문제가 아닐까 싶은데, 그 적기는 아마도 올 연말이 되지 않을까 싶다. 마인드와 스타일을 근본적으로 전환하고 국정과제를 재설정하는데 적어도 6개월 정도의 시간은 필요하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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