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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여덟 살의 댄싱 퀸, 엄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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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여덟 살의 댄싱 퀸, 엄정화

[나도원의 '대중음악을 보다'] 그가 진짜 스타인 이유

"댄싱 퀸 엄정화에요." 2007년 3월에 열린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 무대에 오른 엄정화가 익살스럽게 인사하자 관객들은 웃음과 박수로 맞이했다. 여타 연말시상식들과 달리 사뭇 진지한 잣대로 수상자를 결정하는 이 시상식에서 엄정화의 등장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앞으로 즐겁고 기쁘게 계속 음악 할게요"

파격 의상 논란 정도에 관심이 머물었다면 가수 엄정화는 10년 전에 전성기를 보낸 과거형의 댄스가수로만 보일 수도 있다. 그런 예는 많다. 음악인생 중 아주 짧은 기간인 데뷔시절의 모습 때문에 이상은에게 남아있는 모종의 이미지도 유사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이상은은 20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음악작가로 성장하여 일찍이 [공무도하가](1995) 등의 수작들을 남겼다. 그의 공연장에서 튀어나오는 '담다디'와 같은 말은 능청스러운 농담이 된지 오래다.

엄정화 역시 "제작자들은 대중성이 없다고 많이 울었다"는 8집 [Self Control]과 9집 [Prestige]에서 실력과 신선함을 겸한 젊은 음악인들과 작업하는 새로운 시도를 통하여 스스로를 갱신해왔다. 그리고 보는 것만이 아니라 감상이 가능한 일렉트로니카 음악으로 평단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가수에겐 컨셉도 중요하지만 음악적 고민이 핵심임을 보여준 사례였다. 그래서 엄정화는 2007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최우수 댄스&일렉트로닉 앨범'이라는 트로피를 들고 "앞으로 즐겁고 기쁘게 계속 음악 할게요"라며 말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처럼 엄정화는 나름대로 자신의 노선을 충실히 그려왔다. 비록 지난 두 장의 앨범에서 상업적인 히트곡의 수는 줄었지만 가수로서의 이미지는 업그레이드시켰다. 일시적인 대박상품이 아닌 스테디셀러가 필요한 음악산업적 관점에서도 이러한 시도는 지지받을만하다. 음악적 성과가 없으면 스테디셀러로 남지 못하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서태지와 같은 특정 스타가 시장에 바람을 일으켜주길 바라는 기대 역시 시대착오적이다. 대박상품과 특급스타 하나가 판도를 좌지우지 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이것은 전 세계적인 추세이다.

"사라지지 않는 엄정화"
▲ 엄정화의 열 번째 미니앨범 [D.I.S.C.O]

엄정화의 행보는 "사라지지 않는 엄정화"라는 소망과 닿아있다. 동시에 이 말은 또 다른 방향을 예고한 것이기도 하다. 지난 두 장의 앨범을 두고 프로듀서와 작곡가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일렉트로니카 시도의 완결성에 대해 부산을 떨기도 했지만, 이른바 다수 대중과 매체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의 볼펜은 란제리 의상논란 즈음에 밑줄을 긋고 있었다. 물론 이마저도 엄정화의 비즈니스 전술이었지만.

열 번째 미니앨범 [D.I.S.C.O]의 방점은 대중성과 '가수 엄정화'의 인지도 회복에 있고, 그 방법은 양현석의 YG 엔터테인먼트와의 합작이었다. 사실 대중성이라는 말에는 오해가 덧씌워진 함정이 존재한다. 상업성과 인지도의 다른 말로 쓰이는 것이 현실이다. 더구나 TV 음악프로그램의 영향력이 축소되고 예능프로그램들이 주류 미디어를 장악한 상황에서는 음악은 존재하기조차 힘들어졌다. "올가을에는 이런 옷이 유행합니다"와 같은 괴상한 예측을 가장한 시장의 강요는 패션산업에만 있는 일이 아니다.

"립싱크도 예술"이라며 기염을 토할 수 있었던 황당한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강조된 것이 가창력이다. 오로지 그것만 강조되면서 가요계는 소위 소몰이창법이라 불리는 소울음 소리로 가득한 목장이 되었다. 그런데 음악프로그램들이 변방으로 밀려나고 거의 모든 분야를 예능프로그램이 빨아들이면서 이마저도 힘을 잃었다. "솔비가 가수였어?"라는 유행어는 그래서 생겨났다. MC몽, 크라운J, 서인영 등은 예능프로그램을 통해 인지도를 강화함으로써 TV방송의 가요차트까지 장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는 노래하고 춤을 추는 스타다
▲ <결혼은 미친 짓이다> 중. ⓒ싸이더스

이처럼 길이 좁아져가는 상황에서 엄정화는 본능적일 정도로 선택을 해왔다. 돌아보면 귀신같다고 해도 될 정도이다. 그가 영화배우로서 어느 정도 신뢰를 받는 이유는 <결혼은 미친 짓이다> <싱글즈>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등 괜찮은 작품들에 출연해왔기 때문이다. 좋은 영화를 고르는 안목은 배우에게 중요한 덕목이고, 인연 역시도 배우가 가진 재능의 하나이다. 이 문장에 영화 대신 곡을, 배우 대신 가수를 써넣어도 된다. 엄정화가 바로 눈앞의 이득을 위해 스스로를 연소시켜버리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엄정화가 음악작가를 지향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히 해둬야 한다. 그의 정체성은 대중스타이다. 있으나마나한 에어컨이 한켠에 서있는 좁은 클럽에서 음 하나하나에 정신을 쏟아 붓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작동하는 고성능 에어컨이 위력을 발휘하는 공간에서 그는 노래하고 춤을 춘다. 이번 미니앨범 발표 후에는 아예 시원한 호텔 수영장에서 유명 가수들과 함께 근사한 콘서트를 열며 활동을 시작했다. 또한 엄정화는 몇 가지 롤 모델을 제시하는 아이콘이기도 하다. 롱런하는 댄스가수이고, 영화배우이자 대중음악가수로 성공한 커리어우먼이며, 의상과 뮤직비디오 등을 통하여 트렌드를 수입하고 금기를 파괴하여 논란과 통쾌함을 제공하는 스타이다.

기실 대개의 아이콘들이 그렇듯이 그들을 상징으로 만드는 건 그들이 아니라 우리다. 욕망에 의한 이미지다. 모 방송국 여성앵커의 정치성향에 대한 실망 역시 일방적인 기대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단지 성공한 커리어우먼이었을 뿐, '정치적 올바름'이란 이미지는 '팬'들의 환상이었다. 그럼에도 캐릭터 설정은 성공을 위한 중요한 방법이다. 마돈나가 장수하면서 존경까지 받을 수 있었던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일반적인 미국인의 외모적 특성을 지닌 슈렉은 편안한 캐릭터가 되었고, 브루스 윌리스는 한 때 잘나갔지만 퇴물이 된 중년남성이 뭔가를 다시 해내는 대리충족의 역할로 맡아준다. 물론 우리에겐 공주를 구하거나 악당을 해치우고 영웅이 될 기회는 오지 않는다.

그의 앨범은 능동적인 결과물이다
▲ ⓒYG 엔터테인먼트

이처럼 현대의 문화소비 패턴에서 캐릭터와 트랜드는 분리되지 않는다. 전엔 주성치를 좋아하면 독특한 취향이었으나 이제는 주성치를 좋아하지 않으면 이상한 사람이 되는 모양이다. 이것이 브랜드와 트렌드의 힘이다. 이른바 '칫릭' 등을 비롯하여 유행하는 '즐겁게 속물 되기' 역시 하나의 트랜드이다. 적당한 수위의 탈선이나 "알고 보니 이성이었네"류의 동성애 드라마는 '위험하지 않은 소비'의 사례들이다. 이것을 적절히 이용하는 도발은 매력적인 상품이 된다. 대중음악과 영화를 통하여 쌓아온 엄정화의 이미지는 이를 소비하는 세대와 겹쳐지며, "잊혀지지 않는 엄정화"라는 스타의 욕망과도 만나고 있다. 미(美)에는 인정받고 보호받고 싶어 하는 욕망이 내재되어 있어서 인정받지 못할 때 상처를 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엄정화의 새 음악은 어떠할까. 바둑 못 두는 사람이 장고하고 당구 못 치는 사람이 한참 길을 본다는 우스갯소리가 늘 사실은 아니다. YG 패밀리의 프로듀서와 가수들이 참여한 [D.I.S.C.O]에는 트렌디한 음악들이 담겨있다. 물론 최신의 트렌드가 늘 세련된 첨단은 아니다. 음악의 흐름은 일직선이 아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미래에는 사람들이 비닐 옷을 입고 오묘한 음악을 듣는 21세기를 상상하곤 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그래서 이 세련된 노래들과 [D.I.S.C.O]가 그의 디스코그래피에서 어떤 자리에 남게 될지는 예단할 수 없다. 하지만 가벼우면서도 꼼꼼한 팝송들이 엄정화라는 브랜드와 만나 현시점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하리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2008년에 들어 오버그라운드에서도 김진표의 [Galanty Show]와 에픽하이의 [Pieces, Part One]처럼 비교적 괜찮은 앨범들이 나오고 있다. 물론 곡마다 편차가 있기는 하다. 곡들 내부가 아닌 다분히 의도적인 곡들이 섞여 들어가 있는 경우들이 있다. 그래도 이런 앨범들 덕분에 언급하기에도 민망한 퇴행적인 가요들이 가려져서 다행이다. 엄정화의 [D.I.S.C.O] 역시 오로지 외적인 컨셉에만 의지하려는 관성적인 몇몇 아이돌(그룹 출신 아이돌)들의 솔로앨범들과는 구별된다.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인 결과물이다.

'한국의 마돈나'를 넘어서

며칠 전, 함께 연탄불에 고기를 굽던 지인이 엄정화 얘기를 꺼냈다. "대단한 사람 같다. 이제는 적지 않은 나이다. 그럼에도 열심히 활동하며 여전히 카리스마를 보여준다. 영리한 사람 같다." 이 말에 동의한다. 나아가 이제 '한국의 마돈나'는 넘어설 때가 되었다. 자기보다 유명한 누구를 안다거나 하는 자랑은 자신이 그보다 못함을 인정하는 것이듯 한국의 누구, 제2의 누구와 같은 수사는 칭찬이 아니다. 엄밀히 보면 규모면에서는 작을지라도 엄정화는 이미 고유의 브랜드를 가지고 있으며, 계속 키워나갈 수 있다. 매번 매사에 성실한 태도로 정성을 들이는 엄정화가 결국 중요한 것은 음악 자체임을 잊지 않는다면 말이다.

하나 더. 짧게는 10여 년 전, 길게는 20년 전 한국에 영화 매니아 세대가 형성되던 시기는 알 파치노와 로버트 드 니로의 시대이기도 했다. 젊은이들에게 사랑받는 할리우드 여배우들의 나이 역시 대개는 중년이었다. 이제 한국에도 주연을 맡는 중년 배우들이 크게 많아졌고, 인디음악을 중심으로 30대 중반 무렵의 음악인들이 젊은 음악을 쏟아내고 있다. 그들은 나이를 먹어가며 성장했고, 조연이 아니라 주연이 되었다. 엄정화 역시 1993년에 데뷔하여 어느덧 15년을 꽉 채우며 30대 후반의 댄스가수가 되었다. 그리고 여러 해가 흐른 후에도 이런 인사를 듣고 싶다. "댄싱 퀸 엄정화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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