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전국맹학교 13개 초·중·고교 시각 장애인 학생과 학부모, 교사 1500여 명은 수업도 거부한 채 청와대 인근 서울맹학교 진입로에 모여 헌재의 합헌 결정을 촉구하는 결의 집회를 열었다. 현재 헌법재판소에는 '의료법 제61조 제1항 중 '장애인복지법'에 따라 시각장애인에게만 안마사 자격을 부여하는 법 조항에 대한 위헌 소송'이 '한국수기마시지사협회'에 의해 제기되어 있다.
이날 청와대 앞에 모인 시각장애인들은 "맹인들의 생계수단, 현 정부는 보장하라", "캄캄하다 우리 미래, 합헌만이 살길이다"라며 꽹과리를 울리며 구호를 외쳤다. 이들의 꽹과리 소리에 인근 상인들도 하던 일을 멈추고, 길 가던 행인도 무슨 일인지 의아해 했다. 30도가 넘는 더위 속에서 이들의 목소리는 시간이 지나도 지치지 않았다. 청와대를 향해 계속해서 '생존권 보장'을 촉구하는 이들의 모습은 그만큼 절박해 보이기도 했다.
이들의 이런 목소리는 비단 이날만의 일이 아니다. 위헌 소송이 제기되자 시각장애인들은 지난달 26일과 지난 2일 국가인권위 옥상에서 고공 시위를 벌이고 서울 도심에서 대규모 집회를 여는 등 강하게 반발했다.
2년 만에 다시 헌법 재판소에 서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2년 전을 떠올리게 한다. 2006년 5월. 시각장애인에게만 안마사 자격이 주어지는 '안마사에 관한 규칙'이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결을 받았다. 이에 시각장애인 안마사 2명이 한강에 투신하는 등 전국의 시각장애인들이 격렬하게 반발했다.
국민 여론은 들끓었고, 그 해 8월 결국 국회가 나섰다. 국회는 관련 의료법을 개정해 안마를 시각장애인 유보 직종으로 명확히 하고, 종전의 안마사에 관한 '규칙'도 '법률'로 승격시켰다. 시각장애인들은 대체입법을 통해 그들의 권리를 쟁취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2008년 이 문제는 또다시 불거졌다. '한국수기마사지사협회'가 시각장애인이 아니면서 유사 직종에 종사하는 자신들도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게 해달라며 다시 헌법 소원을 제기한 것이다. 시각장애인들이 투쟁을 통해 얻어낸 결과는 다시 원점이 되었다.
결국 시각장애인들은 다시 거리로 나섰다. 이들은 이날 "최근 들어 쇠고기 수입 파동, 물가 상승, 지속되는 경기 불황으로 어려움이 많은데, 2년 전과 똑같은 일로 다시 여러분 앞에 서게 됐다"며 "우리는 무엇인가를 더 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수만의 직업 중에서 우리에게 단 하나 주어진 직업이라도 보장해 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강원명진학교의 정다미(17) 학생은 "지금껏 삶을 사는 데 슬픔은 있었지만, 절망은 없었다. 안마가 있었기에 절망하지 않았다. 희망이란 게 있었다"라면서 "하지만 사형선고 같은 위헌 결정으로 절망하게 됐다"고 발언했다.
이들이 절망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시각장애인들은 직업으로서 안마사 외에는 다른 길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시각장애인, 대학 나와도 결국 안마사 될 것
현재 시각장애인들의 거의 유일한 자활 수단은 안마사가 되는 것뿐이다. 서울맹학교의 박준현(17) 학생은 "그래서 우리는 고등학교에 올라오면 안마수업을 거의 종일 받는다"라며 "국어 등 필수 과목을 빼고는 대부분이 안마 교육이다. 대학에 가긴 하나 대학에 가도 취직이 힘들어 결국 안마사가 된다"라고 밝혔다.
그는 "나는 다른 꿈이 있지만, 시각 장애인이라 확대기를 대야만 글씨를 읽고, 컴퓨터도 음성 보조기가 있어야 한다. 결국, 나는 사회에서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라며 "그래서 다른 일을 하는 건 힘들 것이다. 우리는 결국 안마사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들은 하루 종일 안마를 배워 손에 진물이 나고 굳은살이 생겼다"라며 "시각장애인은 그렇게 3년을 배워야 자격증을 딴다. 하지만 스포츠마사지를 하는 사람들은 반년만 교육을 받으면 자격증이 나온다"라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서울맹학교 고등부 1학년에 다니는 아이가 있다는 학부모 이관경(40) 씨도 "우리 아이는 앞으로 사회에 나가 갖게 될 직업이 다양하지 않다. 제일 많은 것이 안마사다"라며 "일반인이 한다면 우리는 할 게 없다.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참여했다"라고 절박함을 내비쳤다.
서울맹학교에서 '직업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김기철 교사도 "시각장애인들은 고등학교에 오면 자립하려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에 직업 교육을 받는다. 직업을 갖는 것이 최우선 목표다"라며 "하지만, 시각장애인들에게 직업교육은 무의미하다. 이들이 직업을 가지려면 현실적으로 안마사밖에 없기 때문이다"라고 거들었다.
"자유 경쟁 앞세워서 생존권을 빼앗지 말라"
이어 그는 "미래 어떤 시점에 가서는 개방을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개방 후 무조건 무한 경쟁을 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라며 "안마를 일반인에게 직업으로 개방한다는 것은 한미 FTA로 취약 산업이 붕괴하는 것과 같다"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 우리나라에 장애인 복지는 없다. 그런 상태에서 직업을 풀면 시각장애인만 무차별 희생양이 된다"라며 "국가에서 그런 측면을 신경 써줘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앞서 발언한 강원명진학교의 정다미(17) 학생도 "안마업이 아니면 시각장애인이 어떤 직업을 가질 수 있겠는가"라며 "우리 밥줄을 빼앗는 게 평등인가. 헌법에서 평등은 같이 경쟁 가능할 때 평등이다. 평등은 상황 따라서 중심점을 옮기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자유 경쟁 앞세워서 생존권을 빼앗지 마라"고 호소하며 "안마는 직업이 아닌 생존권이다"라고 거듭 강조했다.
헌법 제15조 '직업 선택의 자유' vs 헌법 제35조 5항 '신체장애자 보호'
광주세광학교의 김남오(17) 학생은 "불법 무자격 안마사들이 헌법 제15조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헌법 조항을 들어 다시 한 번 우리의 생존권을 박탈해 가려 한다"며 "하지만 헌법 10조에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갖는다"라고 반박했다.
그는 또 "헌법 제35조 5항에는 '신체장애인 및 질병, 노령 기타의 사유로 생활능력이 없는 국민은 법률이 정한 바에 의해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라고 명시되어 있다"라며 "개인의 능력과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형식적 평등만을 주장하는 생각은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이라며 비장애인이 안마업에 진출하는 것에 대해 비난했다.
2006년 헌재는 헌법 제15조를 근거로 시각장애인에게만 안마업을 허용하는 것을 위헌이라고 했다. 하지만, 같은 해 국회는 헌법 제35조 5항을 근거로 시각장애인들만 안마업을 할 수 있는 법안을 마련했다. 이 논쟁은 다시 2008년 헌재에서 되풀이될 것으로 보인다.
이날 학생과 학부모를 격려하려고 참석한 대한안마사협회 송근수 회장은 "안마사 제도는 사회가 준비해야 할 안전장치이다. 또다시 헌법소헌이 재개된 현 시점에서 시각장애인의 미래를 보장하고 재활과 자립의 근간인 안마업에 대해 확실하게 정부가 견해를 밝혀야 할 것이다"라고 정부를 압박했다.
송 회장은 "시각장애인의 안마업은 이 자리에 모인 우리의 함성과 굳은 의지로 지켜질 것"이라며 "시각장애인 안마업이 반석 위에 설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해 힘차게 투쟁하자"고 당부했다.
장애인 생계 위한 배려는 외국에서도 당연한 일
한편, 지난달 12일 시각장애인에게만 안마사 자격을 부여하는 법 조항에 대한 위헌 여부 공개변론이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개최됐다. 이날 보건복지가족부의 변론을 맡은 손계룡 변호사에 따르면 스페인은 시각장애인에게만 복권판매를 허용하며, 대만도 시각장애인에게만 안마를 허용하는 등의 배려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우리나라에서만 시각장애인들에게 큰 특권을 부여하는 것 마냥 이야기하는 것은 오히려 시각장애인들을 모욕하는 언사"라며 "시각장애인들이 속기사나 전화교환원, 회계원, 피아노조율사 등 새로운 직종을 지원하려고 노력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다른 직업에서도 비장애인과 경쟁하는 과정에서 도태되어 결국 안마업이 이들의 생존권이 되었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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