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내내, 이제 6월로 접어든 촛불집회는 좀 거리가 멀 것 같은 이주노동자 지원단체들의 생활사이클에도 지대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처음에는 3, 4일에 한 번씩 잠깐잠깐 들르곤 했는데, 고시가 된 5월 29일부터는 만사 제치고 날마다 참여해서 5, 6시간씩 밤거리를 쏘다니고 있다. 그러니 일이 제대로 될 리가 있겠는가.
일이 제대로 안 되는 건 그렇다 치고, 이번 한국의 사태에 대해 이주노동자들은 어떻게 바라볼까? 직업상, 자연히 그렇게 관심을 뒀어야 할 터인데, 이번에는 우리 일에 온정신을 쏟노라 그럴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촛불집회장에서 아주 드물게 보이는 외국인들은 영어를 구사하는 백인들이었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5월 말이나 되어서 든 생각이었다.
집회 가면 안 돼요, 몽골로 쫓겨나요!
사무실에 찾아오거나 아는 이주노동자들에게 촛불집회에 한번 참여해보자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이런저런 일들과 일정에 밀려서 적당한 기회를 찾기 어려웠다. 그러다가 일요일마다 여는 한국어교실에서 드디어 우리 단체의 스태프가 몽골인들에게 촛불집회 정국에 대해 말을 붙였다.
그날은 72시간 릴레이 집회의 마지막 날이었는데, 스태프가 쇠고기와 촛불집회에 대해 설명하고 '한번 가보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다. 온 나라가 쇠고기와 촛불집회로 시끄러우니 한국어를 잘 몰라도 상황파악정도는 하고 있을 거라 짐작했고 고기를 주식으로 하는 몽골인들인지라 광우병 쇠고기에 대해서 반응이 남다르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의외의 반응이 나왔다.
"몽골에서 올 때요, 계약서 쓰고 왔어요. 그래서 그런 데 가면 안 돼요."
"계약서? 무슨 계약서?"
"그런 데 가지 않겠다는 내용의 계약서...한국에 가면 집회 같은 것에 참석하면 안 된다, 그런 데 참석하면 잡혀가서 몽골로 쫓겨난다고 했어요."
어떤 종류의 계약서를 누구와 주고받고 오는지는 모르겠지만 노사간에 체결하는 표준 근로계약서 외에 또 다른, 각서 비슷한 것을 쓰고 오는 모양이다.
그래서인가? 함께 일하는 한국인들이 쇠고기에 대해 뭐라고 하는가를 물어보면, 주저하면서 '들여와서는 안된다고들 말해요'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지금의 이슈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다고 보여지는데 의외로 촛불집회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던 이유가?
고용허가제로 온 사람들은 그렇다 치고 미등록으로 취업한 사람들은 어떤가? 축제 같은 시위, 아름다운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고 있는 한편에서, 미등록노동자들에 대한 정부기관의 단속은 끊임이 없다. 촛불집회장에서 만난 다른 이주노동자 지원단체 활동가는 하도 단속이 심해서 자기네 단체는 그날 하루를 쉬기로 했다고 했다. 하루 쉬고 활동가 모두 촛불집회에 참석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쉬기로 한 그날'은 이주노동자 지원단체가 가장 바쁜 일요일이었다. 한국인들이 그토록 감격하고 미래의 희망이라고 예찬하는 촛불의 감동이, 이 땅에 함께 사는 이주노동자들에게까지 밀려들기에는 아직 이른가 보다.
이럴 때, 한국 멋있고 부러워요!
72시간 릴레이 집회가 정점에 다다랐던 6월 7일 토요일 촛불집회. 6.10항쟁 때보다도, 효순이미선이 사망 규탄 때보다도, 노무현 대통령 탄핵규탄때보다도 더 많은, 사상 최대의 인파가 참여했다는 날이다.
그날, 나는 온종일 이주노동자 산업안전보건 강사양성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그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주민 중에 중국교포 아가씨인 C씨와 나란히 앉아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C씨는 평소에도 주관이 뚜렷하고 당당하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아가씨였는데, 조용히 밥을 먹는 나에게 C씨가 갑자기 말을 걸었다.
"이럴 때, 한국, 참 멋있어요. 무엇보다 그렇게 나이 든 사람들 어린 사람들 다 같이 참여하는 거 부러워요. 중국은 그렇지 못해요."
그 말에 반사적으로 천안문사태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에서 대규모 항쟁이 있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없었다. 그 이후 중국인들은 자기네 정부에 만족하고 있는 것인가? C씨의 말로도 적어도 그건 아닌가 보다.
"지금 촛불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중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은 내 세대와 다음 세대의 자식들이에요. 그 아이들이 나서니까 부모인 우리 세대가 나서게 되죠. 중국도 그렇게 될 거예요."
C씨의 말에 딱히 할 말이 없어 위로랍시고 한 말이다. 그러면서도 C씨의 첫 마디, '이럴 때'라는 말이 은근히 여운을 남겼다.
집회장에서 만난 네팔과 미얀마청년, 그들은 재미있었을까?
그날 촛불집회장소에 도착한 시간은 7시가 다 되어서였다. 8시쯤 되었을까? 촛불을 들고 광화문거리에 있는데 저만큼 떨어진 곳에서 반가운 웃음을 띠면서 웬 남자가 다가왔다. 어두워서 누군지 알아보기 힘들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아는 네팔인이었다.
일 때문에 네팔에 갔다가 어제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한국인 여성과 결혼해서 몇 달 전 딸을 얻었다고 문자메시지를 보냈었는데, 여행의 피로를 풀기도 전에, 처자식과 회포도 풀기 전에 촛불집회장으로 온 것이다. 무척이나 궁금했던 것 같다.
그는 얼마 전 중국의 티베트 독립운동 탄압에 항의하는 한국 내 운동에 앞장섰었는데, 그의 얼굴을 보니, 그동안 잊고 있었던 중국의 티베트독립운동 탄압이 떠오르고, 중국 규탄운동도 떠올랐다. 버마 9월 민중항쟁과 관련하여 여러 달 동안 힘을 쏟고 나서 기진맥진해 있던 차에 티베트 유혈사태가 발생해서 '이번에는 좀 쉬자'는 마음에 함께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다른 곳도 아닌 촛불집회장에서 그를 만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여기저기 돌아보겠노라는 그와 헤어지고, 난장이 벌어진 집회장 여기저기를 다니다가 시계가 12시를 막 넘길 즈음에 집으로 가려고 나섰는데, 이번에는 버마민주화운동 관련해서 가끔 보는 버마인을 만났다.
"잠깐 들렀다가 집에 가려고 했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구경하고 있어요"라는 그를 촛불집회장에서 보니, 잊고 있었던 버마 사이클론 피해자 지원 캠페인이 떠올랐다. 그동안 함께 버마민주화운동을 지원해왔던 한국운동단체들이 사이클론 피해자 지원 모금캠페인을 한다고 했는데, 이번에는 촛불집회에 정신이 팔려서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 다 웃음을 띠면서 '촛불집회가 정말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과연 '재미있기만 했을까?' 물론 두 사람을 만나고 난 뒤부터는 나도 촛불집회가 전처럼 재미있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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