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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시계는, 아직 멈춰 있다"

[손문상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ㆍ<19> 레띠시아

전원이 나갔어. 우린 메일 확인을 위해 여행객들로 가득 찬 피시방에 앉아있었고, 사람들은 각자의 언어로 특유의 감탄사를 내뱉어들 댔지. 메일 확인을 막 마친 후였던 우리는 주인장이 이용 요금을 어떻게 받아낼 수 있을 지에 관해 잠깐 우려했으나, 카운터에 홀로 빛을 밝히고 있는 모니터는 모든 이들의 기대를 불식시켰어.

사람들은 질서정연하게 줄을 섰고, 요금을 계산한 후 하나하나 빠져 나왔지. 도시는 어두웠어. 사람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비명을 질러댔고. 조금 걷기로 했지. 이런 일은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고 해. 우리가 어디쯤에 발을 디디고 있는 지, 어떤 자세한 지도보다도 더 실감나게 설명해주는 사소한 사건이었던 거야.

중앙 광장을 끼고 돌아 조금 내려가니 불빛을 찾아낼 수 있었어. 소박하지만 호화로운 호텔과 이탈리아 음식점, 그리고 요란한 간판의 카지노'들'이 다채로운 불빛을 쏘아대고 있었던 거야. 이 거리는 도시 전체가 정전이 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어.

아마존 지역이라 확실히 물자가 부족하긴 한가 봐. 카지노와 호텔 앞에 삼삼오오 서 있는 늘씬한 여자들의 치마 길이는 우리의 동정심을 자극했는데. 우린 '세상에 원단이 부족해서 저런 짧은 치마밖에 입질 못하는구나. 쯧쯧...'이라고 생각했지.

여자들이 우리를 향해 미소를 날렸어. 이런 경우는 딱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는데, 아마존을 뚫고 막 도착한 꾀죄죄한 몰골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멋진 우리에게 홀딱 반해버렸거나, 성매매를 위해 작업을 시도하는 것이거나. 첫 번째 이유일 가능성이 현저히 높았지만, 우리는 후자일 것이라고 생각해 그들의 눈을 피했어. 이 곳, 뻬루 아마존 관광의 베이스 캠프, 이키또스(Iquitos)야.

화려한 호텔과 카지노, 그리고 음식점을 뒤로하고 허름한 식당에서 꼬치구이와 맥주를 먹었어. 멋진 젊은이가 우리에게 다가와 남은 꼬치구이 하나와 삶은 감자를 집어갔는데. '남은 거죠?'라는 질문에 대답할 경황이 없었던 우린 황당해서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야. 꼬치집 아저씨가 눈을 흘겼지.

하지만 젊은 친구는 아랑곳하지 않았어. 식당을 나온 우리는 택시에게 잡혔어. 이 곳 택시기사들에게는(택시라고 하지만 삼륜 오토바이가 대부분이야.) 또 다른 직업이 있지. 지나가는 관광객들에게 '좋은 숙소가 있다.'고 호객행위를 하는 거야. 분명 숙소를 소개해 준 후, 커미션을 챙길 것이었지. 하지만 우리 역시 이곳의 법칙에 충실했고, 택시 기사가 데려다 준, 아르마스 광장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만족할만한 가격으로 숙소를 구했어. 택시비와 커미션. 일석이조.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님도 보고 뽕도 따고. 아마존 보고 국경도 넘고.

다음 날, 우리는 아마존을 뚫는 쾌속정을 타고 꼴롬비아(Colombia) 땅을 밟기로 했지. 그 전에 에르네스또가 체 게바라로 변신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 중 하나였던 산 빠블로(San Pablo) 한센인 마을을 들러야 했어. 산 빠블로엔 과거와 같진 않지만, 한센인 마을이 아직 존재한다고 하더라고.

우리는 어렵사리 그 마을의 책임 수녀님과 연락이 닿았는데, 난감한 사실은 산 빠블로에 들르게 되면 미리 예약했던 레띠시아(Leticia)발 비행기 시간을 맞출 수 없다는 사실이야. 이미 한 번 연기를 했던지라, 다시 연기하게 되면 향후 여행 일정에 중대한 차질이 빚어지게 될 거였지.

체 게바라의 족적에 깃발을 꽂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했지만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었어. 하여 숙소 주변의 여행사를 찾아 다음 날 새벽 5시에 떠나는 레띠시아 행 쾌속정을 예약했어. 산 빠블로는 잠깐 경유하는 이 티켓의 가격은 180솔(약 65 달러).

새벽. 뻬루를 떠난다는 아쉽고 들뜬 마음을 달래느라 마셨던 삐스꼬(Pisco, 뻬루 전통 술)가 조금 덜 깬 상태에서, 약속된 선착장에 도착했어. 좁은 좌석이 금세 찼지. 기내식처럼 아침과 점심도 제공되었고. 시속 80킬로미터 이상으로 달리는 이 쾌속정은 안데스 산 길을 넘어가는 버스보다 훨씬 빨랐고, 불과 10 시간 만에 우릴 뻬루 국경지대까지 모셔주었어. 비슷한 거리를 3박 4일 동안 떠 가야 했던 이 전 여행이 생각나기도 했지.
▲ 확실히 열대우림지역의 분위기가 난다. 꼴롬비아의 국경도시 레띠시아(Leticia)의 풍경. ⓒ손문상

뻬루 국경 사무소에서 우린 잠시 지체해야 했어. 칠레에서 뻬루로 넘어올 때 받았던 입국 서류를 잃어버렸기 때문이지.

우린 경찰서에 가서 100솔의 벌금을 물어야 했는데, 문제는 우리가 너무나 치밀하게 예산을 운용했다는 데 있었지. 철두철미하게 솔 화를 소비하고 남은 것은 콜라 한 병을 사 먹고 꼴롬비아로 가는 모터 보트를 이용할 수 있을 정도인 10솔. 벌금 따위는 생각지도 못했지 뭐야.

사정을 한 끝에 달러로 지불해도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린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어. 레띠시아에서 하루 머물러야 했기 때문에 꼴롬비아 뻬소도 필요했던 우리는 가지고 있던 100달러짜리 지폐를 잘게 잘라서 환전하기로 했지만(경찰관이 거슬러 줄 달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당연한 사실이 문제였지.) 그 큰 돈을 바꿀 수 있는 곳이 없었지. 그 때 구세주처럼 나타난 50대 가량의 구스따보(Gustavo)라는 꼴롬비아인 아저씨.

이 아저씨는 계속해서 우리 곁을 맴돌고 있었는데, 처음엔 우리와 함께 쾌속정을 타고 온 여행객인 줄 알았지. 꼴롬비아에서 태어나 벨기에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기자생활을 했었다는 이 아저씨는 유창한 영어로 통역은 물론 환전과 환율정보, 그리고 뻬루, 꼴롬비아, 브라질이 맞대고 있는 이 아마존 국경 지대의 특성까지 설명해주며 우리를 도와주었어.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리고선, 벨기에 유학 시절 친하게 지냈던 '최'라는 한국인 친구 이야기도 해 주었지. 기자 출신답게 70, 80년대 한국의 정치사도 대략 꾀고 있더군. 너무나 친절한 이 사람에게 뭔가 보답을 하고 싶어 말을 꺼내려는데,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더라고.

'레띠시아에선 얼마나 머물거죠? 일 주일? 아니면 이 주일?' '아뇨, 우린 바로 베네수엘라로 갈 겁니다. 하루 정도 묵을 거예요.' '아 정글 투어 하려고 온 게 아니군요.' '네.' '호텔에서 머물건가요? 아니면 값 싼 곳을 찾고 있나요?' '값 싼 곳을 찾고 있어요.' '그렇다면 우리 집으로 오시죠.' '네?' 이쯤에서 구스따보의 정체를 알 수 있었어. 호스탈을 운영하는 '삐끼' 아저씨였던 거야. 하하, 이 아저씨 장사 한 번 잘 하는 아저씨군 그래, 하고 생각했어. 가격은 꼴롬비아 화폐로 일인당 16000뻬소(우리 돈 약 8500원).
▲ 우리가 머물었던 운치 만점의 호스텔. 뜰에 작은 정글이 있었다. ⓒ손문상

구스따보의 집은 의외로 깔끔하고 멋진 곳이었어. 뒤뜰에 작은 정글이 있었고, 한 가운데 있는 원두막에 해먹이 걸쳐 있었으며, 시디 플레이어와 스피커에 각종 남미 음악 시디, 그리고 여행서적부터 문학, 철학책까지 다양한 종류의 도서가 갖춰져 있었지.

구스따보의 꾐(?)에 넘어온 프랑스인 한 명, 영국인 두 명, 그리고 미국인 한 명이 장기 체류하고 있었고. 도심에서 벗어난 지역에 자리하고 있어서 그런지, 그런 식으로 호객행위를 하지 않으면 손님 받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하지만 아기자기하고 예쁘게 꾸며놓아서, 그가 데려온 여행객들은 대개 만족했을 거야. 주로 남미 밖에서 온 외국인들을 상대로 수려한 '말발'을 구사해 손님들을 꼬여왔겠지.
▲ 우리에게 친절을 베푼 구스따보와 함께 뻬루에서 꼴롬비아로 넘어간다. ⓒ손문상

이곳, 레띠시아에서는 이웃 나라인 브라질의 국경도시 따바띵가(Tabatinga)를 자유자재로 왕래할 수 있어. 레띠시아 외곽에 나 있는 '국제 도로'를 이용해서 걸어서도, 택시를 타고도 갈 수 있대. 물론 국경을 넘는 순간 분위기는 거짓말처럼 달라지지.

환율과 화폐, 언어는 물론이거니와 음식, 문화, 건축양식, 그리고 피부색까지 이 모든 게 보이지 않는 선을 사이에 두고 동시에 존재한다는 거지.

치안 상태까지도 완전히 달라서, 따바띵가에 가면 위험하지만, 이 곳 레띠시아는 '완전히' 안전하다는 거야. 육지로 이어진 국경이라도 택시나,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고, 걸어서, 그것도 특별한 절차 없이 들어 갈 수 있다는 사실은 신기해.

국경지대의 특성을 감안해 입국 신고는 24시간 안에만 하면 그만이라는 정보도 들을 수 있었지. 우린 내일 입국신고와 동시에 출국신고를 하기로 하고 짐을 부렸어.

▲ 뻬루에서 브라질로 넘어가는 배도 보인다. 그렇다. 이 곳은 3국의 국경지대. ⓒ손문상

▲ 지겨울만도 하지만 아마존의 해질 무렵은 정말 아름답다. ⓒ손문상

▲ 먼 발치에서 본 브라질의 국경도시 따바띵가(Tabatinga). ⓒ손문상

▲ 먼 발치에서 본 꼴롬비아의 국경도시 레띠시아(Leticia). ⓒ손문상

▲ 레띠시아 항구. ⓒ손문상

▲ 이곳에서 역시 사람들은 아마존과 동화되어 살아간다. ⓒ손문상

▲ 이곳에서 역시 사람들은 아마존과 동화되어 살아간다. 레띠시아 풍경. ⓒ손문상

우린 구스따보가 일러준 대로 레띠시아의 몇 군데를 돌아다녔어. 해 지는 풍경을 볼 수 있지만, 새 우는 소리가 매우 시끄럽다고 한 산딴데르 공원(Parque Santander)에 나갔어.

'새가 시끄러우면 얼마나 시끄럽겠어', 라고 생각한 우리가 바보였지. 커다란 나무들 속엔 적어도 수만 마리 새가 살고 있나봐. 대화 소리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시끄럽더군.

그나저나 왜 꼴롬비아의 치안이 남미 최고 수준이라고 하는지도 알 것 같았어. 꼴롬비아는 여전히 통제국가야. 마약 밀매의 천국이라는 오명과 함께, 정부 전복을 통한 혁명을 강령으로 삼는 무장혁명단체인 FARC(Fuerzas Armadas Revolucionarias de Colombia)가 활동하는 곳이기 때문이지.

물론 FARC가 마약 밀매로 전비를 마련한다는 소문이 자자한 곳이기도 하고. 이런 것을 못 봐주는 미국은 꼴롬비아 정부가 무능하게만 보이고, 자국 마약 문제의 근원지 중 하나로 꼴롬비아를 지목해 압력을 가하고 있지. 무조건 남 탓이래.

여하튼 대표적인 친미주의자 우리베(Uribe) 꼴롬비아 대통령은 그런 저런 문제들로 주변국들과 잦은 마찰을 일으키고 있지.

우리가 꾸스꼬를 헤집고 있을 때인, 지난 3월 1일, 콜롬비아 정부군이 에콰도르 국경지대를 넘어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내 서열 2위인 라울 레예스(Raul Leyes)를 비롯한 FARC 요원 17명을 사살한 사건은 대표적인 사례야.

여기에 한창 반미로 주가를 올리고 있는, 오지랖의 기수,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가세를 했고, 결국 철회할 수 밖에 없었지만, 베네수엘라 군을 꼴롬비아 국경지대로 전진배치하겠다고 엄포를 놓아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고 해.

남미 해방의 영웅, 시몬 볼리바르(Simon Bolivar)가 초대 대통령을 지냈던 '그란 꼴롬비아'를 출생성분으로 삼는 세 나라 관계의 현주소지. '무덤 속의 장군', 시몬 볼리바르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만한 일이야.

이런 저런 상념에 젖어 있는데 어느 덧 오후 6시가 되었군. 광장에서 동네 아저씨 축구단과 풋살을 즐기고 있는 군인들을 보고 있었는데, 국가가 울려퍼지더니 광장 앞의 군부대에서 국기 하강식을 '거행' 하기 시작했어. 그러자 축구공을 들고 군인 뿐 아니라, 시민들, 오토바이, 택시, 할 것 없이 모든 도시가 그 자리에 멈추어 선 거야. 우린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다 했지.

우리가 떠나온 바로 그 나라. K로 시작하는 그 익숙한 나라. 자네가 쓴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에 보면 축구 경기가 끝나고 시상식을 하던 도중 국가가 울렸는데, 자네가 다리에 흐르는 피를 닦느라 경례를 하지 않아 대령에게 혼나는 장면이 나오지. 시계는, 그래 아직 멈춰 있다.
▲ 국기하강식에 맞춰 군가가 나오자 축구를 즐기던 군인과 민간인들이 그 자리에 서서 국기를 바라보고 있다. 70년대 한국의 풍경이 저러했으리라. ⓒ손문상

▲ 국기하강식. ⓒ손문상

▲ 국기하강식이 거행되면 도시는 정지된다. ⓒ손문상

그리고 수면 위에 지은 인상적인 전통가옥들을 보고 시내 구경도 했지. 거리엔 군인들, 경찰들, 틈으로 유영하는 관광객들. 이곳 사람들은 꽤나 여유로워 보였어. 관광지라 나름 부유한 곳인지 모르겠으나, 우리가 본 레띠시아는 딱 그 정도.

숙소에 모인 다국적 사람들은 저녁에 파티를 즐길 요양으로 뭔가를 잔뜩 준비하고 있었고, 우린 그 친구들이 만들어 준, 칵테일을 마시며 여행을 하며 겪은 서로의 이야기들을 나눴지. 내 선입견인지 모르겠으나, 미국인은 왠지 왕따당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고.

구스따보는 우리가 베네수엘라(Venezuela)로 간다고 하니까 잔뜩 호기심어린 표정을 지으며 '왜 그런 곳엘 가요?'라고 물었어. 글쎄... 왜?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의 대장정을 마치며 깃발을 꽂으려는 이유 이상으로 우린 까라까스(Caracas)에 가고 싶었던 것인데, 생각 이상으로 과민반응을 보이는 구스따보가 이상해 보이기도 했지. 온갖 '괴담'이 난무하는 그곳, 베네수엘라의 심장에 가서 직접 뭔가를 보고 듣고 느끼고 싶다고 했더니 손을 절레절레 흔드는 거야.

구스따보의 말에 의하면 그곳은 눈 감으면 코를 베어가는 곳이 아니라 코만 남겨두고 몸을 베어가는, 뭐 그런 곳이래. 그러더니 몇 가지 팁을 주겠다고 진지한 표정으로 우릴 앞에 앉혔어. 다음은 구스따보와 나눈 대화 내용.

어디로 가세요?
까라까스로 갑니다.
오, 이런. 조심하세요. 남미에서 가장 무서운 나랍니다.
왜요?
최악의 범죄 도시죠.
아...
그리고 팁을 하나 드리죠. 명심하세요. 까라까스에서는 환율이 이중입니다. 은행에서 바꾸면 1달러에 2150볼리바르인데, 암시장에서 바꾸면 무려 두 배를 줘요. 달러가 귀하기 때문이죠.
네?
명심하세요.
왜 그런거죠?
차베스가 달러를 통제하고 있어요.
그런 이야기, 들어 본 적이 없는데요.
제 말 믿으세요. 그리고 꼭 암시장을 이용하세요.


블랙 마켓이라니, 말 그대로 암시장. 그런 것은 위험한 것 아닌가? 범죄 영화 속에 나오는 여러 장면들이 생각나기도 했어. 그래도 우린 위험하게 암시장 같은 거 이용 안하기로 했지. 맨몸으로 부에노스 아이레스와 산띠아고, 그리고 리마를 통과해오면서 나름대로 도시의 괴담에 익숙해 있던 터라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거야. 하지만 그것이 다가오는 황당 종합 선물 세트의 전주곡이었다니...

다음 날 아침, 여유롭게 모든 준비를 마친 우리는 레띠시아 공항으로 갔어. 삼엄한 경비, 그리고 과도한 통제. 하지만 경찰과 군인들은 대개 친절하게 대해주는데, 그런 것들이 육체적으로 겪는 사소한 인권 유린들을 희석시켜버리는 것 같아. 꼴롬비아인들에게도 여행객들과 똑같은 대우를 할 리는 없을 거라고 일반적인 이론을 마음속으로 들먹이면서 공항에 들어섰지.

우리 비행기 표가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입국신고와 출국신고를 마치자, 출입국 사무소 앞에 붙어 있는 FARC 수배 전단이 눈에 들어오더군. 라울 레예스(Raul Leyes) 얼굴 위엔 커다란 가위 표가 쳐 있었고, 불과 며칠 전에 있었던 (차베스 대통령의 주장에 의하면) 불법 사살 작전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지. 현상금은 무려 50억 뻬소. 얼추 어림잡아도 한국돈으로 30억 원이야.
▲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내 서열 2위인 라울 레예스(Raul Leyes)를 비롯한 FARC 요원 17명이 사살된 증거. 레띠시아 공항, 출입국사무소 앞에서. ⓒ손문상

뉴스를 통해 들은 사실을 일상생활에서 확인 하는 일은 이상한 느낌을 불러일으키지. 뭔가를 '발견'한 기분이 들어. 이미 뉴스를 통해 접한 사실을 '발견했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생각해봐. 세상엔 공급자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없이 소비할 수 없는 상품이 두 가지 있지. 식품과 뉴스. 뭔가를 사려고 하는데, 그 물건이 어떤 공정을 거쳤는지 전혀 알 수 없는 거야. 복잡한 생산기술이나, 극비의 생산기술을 위해 비밀로 부치는 것이 아닌데도 말이야.

1. 우리가 사려고 하는 상품에 어떤 해로운 물질이 첨가되었는지도 모른 채 소비하고 있을 수도 있다.
2. 상품을 소비자의 입맛에 맞추려는 사람이 있고, 자기 입맛에 소비자를 맞추려는 사람이 있다.
3. 항상 믿으라, 고 말한다.


미디어의 이런 특성에 비추어서 생각해 보자. 스페인어에는 꼬노세르(Conocer), 라는 단어가 있어. '경험적으로 알다' 라는 의미지, 즉 'Conoces Corea?(한국에 관해 알아?)'라고 물어보면 'No' 라는 답이 돌아와. 한국이라는 나라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Conoces, 라는 단어를 쓰면 한국에 관해 (경험적으로)알아? 라는 의미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당연히 가보지 않은 사람은 '노' 라고 할 수 밖에 없지. 뉴스를 통해 본 사실을 우리는 알지만 사실은 '모르는 것'일 수 있어. 누군가 만들어 낸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일 뿐이지. FARC 내 서열 2위, 라울 레예스가 사살되었다는 뉴스를 접했기 때문에 '알고 있'으면서도 사실 '알고 있지 않(No Conozco)'았던 것이지. 그래서 제복 입은 군인들이 깔린 레띠시아 공항에 붙어 있는 현상수배 전단을 발견하면 알고 있었으면서 몰랐던 것을 처음 발견한 것처럼 작은 충격을 경험하는 것이야.

우리는 온갖 소문으로 점철된 '차베스' 라는, '우리가 모르는' 인물이 대통령으로 앉아 있는 베네수엘라로 가려고 해. 거기에서 우리가 '아는 사실'들을 얼마나 '발견'하게 될까? 까라까스는 이런 우리의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확실히 해 주었지. 추억이 기대를 압도하는 경우가 있는데, 까라까스에서의 4박 5일이 바로 그러했어. 이런 경우 많은 사람들이 여행의 의지를 상실하고 말아. 삶에서도 마찬가지지. 기대가 추억보다 조금 많음으로써 삶은 겨우 유지되는 것이 아니겠어?

('뻬루' 대신 '페루', '잉까' 대신 '잉카' 등으로 적는 게 바른 표기법이지만, 여행기라는 특성을 고려해 현지 발음에 최대한 가깝게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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