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훗날 '먼지'라는 곡에서 "이혼도 두 번 하고 애도 없고 야구로 말하자면 투아웃"이라며 신세한탄을 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부인과 늦둥이 딸을 곁에 두고 있다. 그리고 음악활동 40년이 되는 올해에 헌정앨범까지 선물 받았다. 신중현, 산울림, 김현식, 김민기 등에 대한 헌정앨범이 있었고, 한대수도 2004년에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 출간 20주년을 기념한 앨범에 참여한 바 있으나, 정작 음악인 한대수를 위한 헌정앨범은 이번이 처음이다. <물 좀 주소>는 '물 좀 주소' 한 곡을 열두 팀이 저마다 독특하게 해석하는 흥미로운 방식의 트리뷰트 앨범이다.
드라마틱한 가족사…그의 화두는 '자유'였다
시계바늘을 다시 돌려보면 1968년부터 '물 좀 주소'가 앨범에 실린 1974년까지의 지층에는 꽤 중요한 흔적들이 새겨졌다. 1961년부터 1964년 사이에 민간방송사들이 잇따라 개국하고, 신중현을 비롯해 미8군 무대에서 기량을 닦은 이들이 수면 위로 올라서고 있었다. 1960년대 중반, 해외에서는 지미 핸드릭스, 비틀즈, 밥 딜런 등 후대에 강한 영향을 남길 뮤지션들이 한꺼번에 등장하여 활약하고 있었다. 블루스, 락 등 대중음악의 주요 장르가 역사적 전기를 맞았고, 통념과 달리 영미권과 거의 비슷한 대중음악의 역사를 지닌 한국에도 이러한 움직임은 어떤 식으로든 전해지고 있었다. 특히 자기세계를 표현하는 음악을 스스로 만들어 노래하고 이후에도 긴 자취를 남길 음악인, 즉 싱어송라이터의 출현은 질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지점부터 한대수라는 이름이 새겨진다.
이름 있는 인사의 생애를 다룰 때 극적 과장의 유혹은 피하기 힘든 습성이다. 그러나 한대수의 가족사는 그 자체로도 충분히 드라마틱하다. 그의 조부는 신학자이자 연희전문의 초대 학장이었고, 부친은 미국에서 핵물리학을 전공한 엘리트였다. 그런데 한대수의 부친은 갓난아기를 남겨두고 종적 없이 사라졌다가 아들이 장성한 후에야 뉴욕의 유력한 인쇄업자가 되어 나타났다. 그는 여든을 넘겼지만 지금도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이 없다. 확인할 수 없는, 이를테면 한미 간의 핵개발에 관련된 CIA 공작설 등의 추측만이 있을 뿐이다. 커다란 도서관을 갖춘 엘리트 집안에서 태어나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내고 미국에서 청소년기를 맞아 포크와 록의 꿈틀대는 에너지를 직접 느낀 젊은이는 한국으로 돌아와 모던 포크의 시작점에 서게 된다.
이런 경험은 한대수에게 사적인 상흔과 정체성 혼란, 그리고 폭넓은 문화적 감수성을 동시에 주었다. 그의 고독은 역설적으로 유난히 솔직한 애정 표현과 자유분방한 기질로 표출됐다. 쾌락은 고통의 과정 끝에 얻어지며, 쾌락 뒤에는 다시 고통이 따른다. 절벽 위와 아래는 무척 멀어 보이지만 고작 두어 걸음의 차이다. 이런 역설적 결합이 한대수의 음악에서는 긍정적인 양태로 나타난다.
한편, 그는 지적 환경과 다문화 체험에서 넓은 식견을 얻었다. 낯선 시선이 더 잘 포착하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한대수는 평소 언행뿐만 아니라 음악을 통해서도 자신의 시선과 방식으로 국제질서와 사회체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내왔다. "거짓으로 진실을 말하는 자가 작가"라는 말이 있듯 다큐멘터리 사진작가이기도 한 한대수의 음악적 화두는 '자유'였다. 후배음악인 이승열의 표현대로 "진지하지만 무겁지 않고", 의식과잉과 성찰의 강요가 없으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음악은 이렇게 가능해졌다. 집에서 쫓겨나 쪽방에 들어앉아 '하루아침'을 만들어 부르는 사람이 한대수인 것이다.
때로는 서정적인 록을, 때로는 정신 나간 노인처럼
병역을 마치느라 여러 해가 지난 1974년에야 첫 앨범 <멀고 먼 길>을 발표하고 이듬해 두 번째 앨범 <고무신>을 제작하지만 세상은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신중현이 대마초파동에 휘말리고 비판적 지성과 낭만적 감성의 김민기가 그늘 속에 얼굴을 감춘 것처럼, 그 역시 눈이 가렵다고 눈을 긁어버리듯 대중음악을 옭아맨 나라를 떠나야 했다(또는 떠날 수 있었다). 이렇게 경계를 넘나든 행보는 한대수를 자유인, 심지어 외부자로까지 보는 시각의 빌미가 됐다.
더구나 한대수의 어법은 동시대 한국의 음악인들과 달랐다. 간혹 여기에 자신이 왜 있는지 모를 때처럼, 한대수의 활동단절과 그의 이미지에 대한 인식은 곤혹스러움, 그리고 생경함이라는 감정과 관련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첫 앨범에 실린 '행복의 나라'와 '물 좀 주소'로 기억되기도 하는 한대수는 거기에서 멈춰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만약 그랬다면 이 글 역시 재평가라는 포장지를 덧씌운 회상이거나 역사정리에 머물렀을 것이다.
한대수에 대한 다른 기억이 가능하도록 한 것은 'One Day'와 '마지막 꿈'처럼 아름다운 곡이 수록된 세 번째 앨범이자 <멀고 먼 길>에 버금가는 수작 <무한대>(1989)이다. 이후 열두 번째 앨범 <욕망>(2006)에 이르기까지 그의 창작 활동은 계속된다. 그렇게 '에즈 포에버(As Forever)'(2002)처럼 쓸쓸한 냄새가 나고, 메틀 리프 위에 호치민의 일생을 읊어대는 '호치민'(2002)과 '먼지'(2004)처럼 자유분방한 곡이 세상에 나온다. 그는 때론 서정적인 록 음악을, 때론 정신 나간 노인처럼 주절거리기도 했다. 직관과 상상은 물론 면밀한 연구와 실험을 끊임없이 시도했고, 포크와 록을 뿌리로 하되 앨범마다 재즈와 미니멀리즘을 포용해왔다. 그는 줄 없는 기타를 안겨줘도 어떻게든 노래를 부를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은 치열한 고민과 치밀한 계산의 결과물이 아닌 앨범이 없다. 공연에서도 음향은 물론이고 마이크의 높이까지도 체크하는 음악인이다. 이것이 한대수가 과거형으로 회고되고 소비될 수 없는 이유이다.
'물 좀 주소'를 해석하는 12가지 방식
꾸준한 창작활동은 음악인들이 더 찾아듣는 작품을 남겼다. 아마추어리즘으로 오해됐던 '동물원'의 김창기는 "편하게 들리는 동물원의 음악 안에도 치밀한 음악적 장치들이 숨겨져 있다"고 강조하면서 한대수에 대한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화가는 그림을 그를 때 화가이고 시인은 시를 쓸 때 시인이듯, 음악인은 노래를 하고 연주를 하고 곡을 쓸 때 음악인이다. 그 점을 한대수는 잊지 않았다. 시대에 따라 꿈에 등장하는 사물과 상황마저 달라지는데, 그 변화를 따라온 한대수의 이야기는 최근까지 계속됐다. 화석화된 전설과 진행형의 거장을 같은 선상에서 말하는 것은 어딘지 공평치 않아 보인다. 그러나 한동안 조명의 불빛은 그의 이름을 한 방향에서만 비추곤 했다. 그렇기에 한대수의 신뢰할만한 연속성에 합당한 새로운 관점의 재발견이 요구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 맥락에서 젊은 음악인들에 의한 헌정앨범 <물 좀 주소>는 반가운 작업이다. 기실 한대수는 후배음악인들과의 작업을 즐겨왔다. 약관의 손무현과 뜻을 모았었고, 이우창, 김도균과는 오랜 음악적 동반자 관계를 유지해왔다. 근래에는 장영규, 방준석, 강기영, 이병훈으로 구성된 영화음악감독집단 복숭아프로젝트와 작업한 앨범을 발표했으며, 아일랜드 여성음악인으로 '두번째달'에서 활동하게 된 린다 컬린이 처연한 음성으로 노래한 'Black Is The Color'를 자신에 앨범에 싣기도 했다. 젊은 음악인들과의 공동작업을 통해 신선함을 잃지 않는 현명함을 발휘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 한대수가 코코어, 어어부밴드, 모베사운드 등 열 두 팀의 후배들로부터 앨범을 헌정 받게 된 것이다. 작품에 대한 예의를 지닌 음악인들이 "이런 것이 리메이크이고 샘플링이고 오마주"라며 의미 없이 소비되는 카피를 사전풀이해준 것이기도 하다.
<물 좀 주소>는 단 한 곡을 여러 음악인들이 제각각 재해석함으로써 활발한 분화가 이뤄진 인디뮤직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스타일도 다르고 작품을 대하는 태도마저 다르다. 코코어는 특유의 주술적 마력을 발하고, 불싸조는 코드진행을 토대로, 심지어 "물 좀 주소"라는 상징적인 일언도 없이 완전히 새로운 리프로 직조한, 강한 연주를 들려준다. 스트레칭져니의 곡이 그나마 일반적인 리메이크에 가까울 뿐, 대개는 해체를 통한 파괴적 창조를 지향한다.
큰 단위의 보편적 공감을 불러온 '물 좀 주소'가 역으로 단절감의 소통도구로 이용되기도 한다. 물론 이들의 어법은 대개 해외 음악과의 교류를 통해 얻은 것들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장르는 밖으로부터 왔고, 어차피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인식되지도 않을 것이다. 또한 새로움도 흔해지면 사라지기 마련. 중요한 것은 내면화 과정이다. 물론 여기에서 참여한 음악인들 간의 편차가 발생한다.
정신은 모습을 바꿔 이어지고
전반적으로 한대수처럼 대중성을 획득하며 장르적 긴장을 유지한 예는 찾기가 쉽지 않다. 대중예술은 대개 자아성찰을 거쳐 관계와 소통으로, 그리고 교류와 연대로 나아가는 단계를 밟아왔다. 그런데 여전히 개성을 확인하는데 주력하거나 실험적으로 보일 뿐 전혀 새롭지 않은 곡들이 있다. 기발하지만 쓸모없는 것이라도 일단 고안해내면 써먹고 싶어지는 습관은 단지 실험 같은 무엇을 만들고 만다. 그래서 다만 한 부분을 담아냈을 뿐인 이 앨범으로 한국 인디음악의 현황을 조망하려는 시도는 성공하기 힘들다.
하지만 10여 년 전에 이전 세대와 단절된 집단으로 오해받았던, 또는 매체들이 그렇게 오인하도록 조장한 인디음악인들이 선배음악인에게 존경을 표하고 있으며 정신은 모습을 바꿔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음악적 계승의 실제는 잠복과 돌출에 의한 불규칙한 연속이며, 혁신의 가능성이 꾸준히 모색돼 왔음을 보여주는 한 조각이다. 같음의 확인이 '공감'이고 다름의 인정이 '존중'이다. 맘에 안 드는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해야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독선에서 인정할 줄 아는 성숙으로 건너갈 수 있다. 이것이 <물 좀 주소>를 수용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아쉬운 것은 의도와 달리 한대수에 대한 일면적 이미지, 즉 '물 좀 주소'와 '행복의 나라'의 한대수만 재차 상기시키는 건 아닌가 하는 부분이다. 참여한 음악인들 중 몇몇은 한대수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지 궁금하기까지 하다. 한대수를 '물 좀 주소'와 '행복의 나라'로 직결시키는 등식에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다면 "헌정앨범마저?" 그리고 "당신들마저?"하는 섭섭함과 만날 수밖에 없다. 세밀화를 의도하지 않은 <물 좀 주소>가 의미 있는 기획음반임은 인정하지만, 숨겨진 명곡들을 찾아내는 작업이었다면 더 의미가 있었을 테고, 여건이 되었다면 기꺼이 참여했을 무게감 있는 인디음악인들이 빠진 것도 아쉽다. 미안하지만 언급하지 않은 몇몇 팀들의 작업들 중에는 재미마저 없는 것도 있다. 그래서 한대수의 음악세계를 입체적으로 재해석한 또 다른 헌정앨범에 대한 희망은 여전히 남겨두게 된다.
'할아버지 로커가 된 젊은이'…'그들'이 계속 그 길에 있길
작품과 작가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를 경험하는 일이 잦다. 결례되는 농담이지만, 시인의 프로필 사진을 넘겨보는 것만큼 심심한 일도 드물다. 작품은 인간의 부풀어 오른 어느 부분이고, 그 주위는 위험한 순간에 슬쩍 몸을 피하곤 멋쩍게 웃고 마는 똑같은 사람이 둘러싸고 있다. 누구든 하찮은 일을 대단한 뭐라도 되는 양 떠들며 산다.
그런데 한대수는 보기 드물게도 양자가 일치하는 경우다. 또한 자신을 낮춰 노래를 높인 서정가요의 장인 조동진과 달리 한대수는 자신의 캐릭터를 강하게 드러내왔다. 케이블 방송의 채널을 돌리다 얼굴만으로도 어떤 영화인지 알 수 있게 하는 배우들처럼, 그의 이름만으로도 많은 악기소리와 어떤 목소리를 받아들일 공간을 비워두도록 한다. 이렇게 닳지 않는 음악적 욕심으로 많은 창작앨범을 발표해오며 '할아버지 로커가 된 젊은이'를 강조하는 이유는 이와 같은 창작풍토가 자연스러워지길 바라기 때문이다.
<멀고 먼 길>(1974)로부터 꼭 40년간 멀고 먼 길을 걸어온 한대수, 또는 또 다른 한대수'들'이 계속 그 길을 걷기를 바란다. 그래야 비로소 자신에 승리한 작가가 되고, 작품과 유사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물론 지금도 그런 이들이 있으며, 앞으로는 더욱 많아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근거 있는 믿음이다. 이 봄, 아무도 모르게 지는 꽃이 있음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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