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0여 미터 이상의 고지를 찍고 내려오는 길에 버스가 멈추어 섰다. 안개 때문에 차 앞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한껏 눈을 찌푸려 보니 버스가 한 대 유령처럼 서 있는 게 보였다. 알고 보니 산꼭대기를 넘던 버스가 갑자기 고장 나는 바람에 모든 승객이 히치하이커가 되어 지나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였다.
이런 일은 다반사다. 차가 낡아서도 아니고, 버스 서비스 질이 나빠서도 아니라 이따위 안데스 길을 위해 특수 버스를 제조할 수 없는 일련의 유명 자동차 메이커의 사정 때문일 것이다. 이런 길은 최고급 버스라도 언제나 고장의 위험을 감안해야 한다. 참고로 우리가 탄 버스는 '산 마르틴(San Martin)'이라는 이름의, 아르헨띠나, 칠레, 그리고 뻬루 독립의 영웅이자, 따끄나에서 구할 수 있는 것 중에서도 나름 수준급 서비스를 제공하는 버스 회사 소유였다. 하지만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
우리가 타고 있는 버스 2층 칸에 사람들이 꾸역꾸역 밀려들어오기 시작한다. 마치 오십 미터 전력 질주를 한 사람 모양 모두 거친 숨을 헐떡인다. 통로에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이 가득 차자 승무원은 출발 신호를 보냈다. 잠시 후에 차는 또 다시 멈추어 섰다. 이번에는 무슨 일인가 싶어 창밖을 살펴보니, 겨우 여섯 시간 만에 휴게소에 들른 것이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여섯 시간 동안 대략 다섯 차례 정도 서긴 했다. 우리가 탄 버스는 일종의 '완행'으로, 모든 도시에 멈추어 서서 두 세 명의 승객을 태우고 다시 출발한 것이었다. 이쯤 되자 왜 우리가 생각보다 값싼 버스비에 만족했는지, 그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말이 휴게소지, 구멍가게 두 군데와 가게를 갖지 않은 수많은 '개인 사업자'들이 빵과 옥수수, 치즈, 요구르트, 봉지 주스 따위를 파는 길 한 복판이다. 사람들은 일제히 내려서 볼일을 보거나, 간식을 사먹었다. 잉카 전통 복장을 한 여자들은 길 한 복판에서 볼일을 본 후 속치마로 뒤처리를 했고, 남자들은 아무데서나 일을 해결했다. 이 흥미로운 상황을 지켜보면서 볼일을 볼 적당한 장소를 찾고 있던 중, 흥미로움 이상의 광경도 목격할 수 있었다. 남자 한 분이 버스 바퀴에 버젓이 실례를 하고 있던 거였다. 물줄기의 방향과 사람들의 시선이 중간에서 만날 수 있는 그런 포즈로 말이다. 용인 되는 수위가 어느 정도까지인지 확실하고도 명백하게 확인할 수 있었던 우리는 아직 용기가 부족해 어쩔 수 없이 바퀴는 포기하기로 한다. 다른 곳에 가서 '일반적인 방식'으로 볼일을 봤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버스 입구에 매달려 있다. 손에는 빵 대 여섯 개, 혹은 생수 서 너 병, 옥수수 여남은 개를 들고 있다. 마치 어미의 먹이를 기다리는 아기 제비들처럼 소리를 지른다. 어미는 '1솔 동전'이라는 동그랗고 하얀 먹이를 들고 언제든지 떨어뜨려줄 태세를 갖추고 있다. 재수가 좋으면 서 너 개를 팔 수 있을 테지만, 경쟁자가 너무 많아 그것도 여의치 않다. 게다가 연세가 많은 할머니들은 불리하다. 젊은 남자들과 여자들은 힘으로 버스 입구 바로 앞, 명당 자리를 차지하고 필사적으로 팔려고 하는 상품 이름을 외친다. 엘라도(helado, 아이스크림), 후고(jugo 주스), 초클로 꼰 께소(choclo con queso, 치즈를 곁들인 씨 굵은 옥수수)...그 틈바구니에 밀려 할머니 하나가 '빵(pan, 빵)'을 외치며 뒤로 밀려난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인다. 결국 중심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으로 밀려나지만, 자신의 몸뚱이가 밀려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짧고 주름진 팔을 최대한 앞으로 뻗치며 결사적으로 흔들어댄다. '빵, 빵...' 이방인은 이들의 삶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팔고 우리는 산다. 그리고 상품 하나는 대개는 1솔 안에서 해결된다.
뿌노 도착. 해발 3800여 미터. 춥다. 그리고 숨차다. 10시간이 걸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지만, 실제로는 12시간 이상 걸렸다. 물론 이런 상황에 충분히 적응해 있는 우리는 심드렁하게 불평을 내뱉은 후 뿌노 시내로 향했다. 3륜 오토바이로 둘이 2솔 50센띠모를 내고 아르마스 광장에 도착했다.
웬걸, 우리는 운이 좋았는지, 마침 부활절을 앞둔 사육제 축제 마지막 날이라 사람들이 잔뜩 모여 음악과 춤을 즐기고 있다. 길을 걷는데, 사람들이 스노우 스프레이를 하나씩 들고 있다. 거리에는 스프레이 박스를 들고 다니는 상인들도 많다. 뭔가 하고 봤더니, 지나가는 아무에게나 뿌려대며 킬킬거린다. 우리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깨끗한(우리 몰골이 깨끗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스프레이를 한 번도 뒤집어쓰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사람들을 두고 볼 수 없는 이들은 심미안을 가진 게 분명했다. 독심술이나, 뭐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숙소에 들어가면 샤워부터 할 작정이었던 사실을 어떻게 알아냈는지 스프레이를 조준해 뿌려대기 시작했다. 분명 우리는 누구에게도 우리가 샤워를 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말 한 적이 없었다. 아냐, 혹시 어디에선가 '우린 오늘 샤워를 할 거예요'라는 비밀스러운 말을 흘리고 다녔는지 모른다. 하지만 어쩌나, 웃어야 한다. 축제를 망치기에 우리의 샤워와 빨래 문제는 사소한 것이다. 밤새도록 사람들은 비누 스프레이를 서로에게 뿌려대며 웃는다. 오늘까지다. 내일 스프레이를 들고 나와 사람들에게 뿌리고 난 후, 죽상을 한 상대방의 얼굴에 대고 커다랗게 웃는다면 뺨을 맞을지 모를 일이다. 왕이 거지가 되고 거지가 왕이 되는 게 축제 아니던가?
숙소를 잡은 우리는 몸에 약간의 이상이 생긴 것을 느꼈다. 고산병임을 직감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적응 기간이라 생각하고 호스텔 로비에 마련된 코카 잎을 뜨거운 물에 타서 마셨다. 그러자 고산병 증세가 씻은 듯이 나았다.
물론 거짓말이고 그럴 일은 있을 리 없다. 여하튼 우리는 플라시보 효과를 바라면서 잠을 청했다.
가위에 눌렸다. 숨 쉬기가 힘겨워 눈을 떴더니 앞에 빵을 파는 할머니가 두 명의 저승사자와 함께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손에는 독을 품은 선인장 가시가 들려 있었고, 나를 찌르려 필사적으로 몸뚱이를 흔들었다. 아따까마 사막에서 알파카 털을 짜고 있던 할머니가 가진 선인장 가시로 만든 바늘과, 따라따에서 셀레스띠노가 기겁을 하고 만지려는 것을 말리던 선인장 가시와, 뿌노로 넘어오는 도중 만났던 빵 파는 할머니가 내 머릿속에서 포개졌다. 진저리를 치며 나는 몸을 일으켰고, 옆에 놓아 둔 코카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다시 잠을 청했다. 춥다.
다음 날, 거리로 나왔다. 전 날의 난장은 대충 정리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띠띠까까 호수의 유명한 관광지인 우로스 섬(Isla Uros)으로 가는 배 편을 알아보았다. 출발 시간은 오전 9시, 그리고 오후 3시로 두 번을 운행한다고 했다. 대부분의 여행사가 비슷한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을 확인한 우리는 석양을 볼 목적으로 오후 배편을 택했다.
그리고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중심가 식당을 피했다. 페루에서 겪은 지혜 중 하나다. 만약 당신이 웬만한 음식은 가리지 않는다고 장담한다면 특별한 맛을 싼 값에 배불리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중심가에서 파는 고기, 생선 음식들은 대개 6솔에서 15솔 정도(1900원~4700원 정도) 한다. 물론 비싼 것은 25~30솔(7800원~9500원 정도)도 한다. 하지만 조금만 눈을 돌리면 한 끼에 2솔(650원) 정도로 만족감을 가지고 나올 수 있다. 이런 식당은 주로 원주민들이 이용한다. 외국인 관광객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메뉴도 하나, 혹은 두 가지인 곳이 대부분이다.
자리에 앉자마자 닭 날개 하나, 감자 한 덩이가 들어간 진한 수프가 나왔다. 영락없는 닭곰탕이다. 깨끗이 비우고 나자, 쌀밥 위에 정체불명의 덩어리들이 섞인 소스가 끼얹어진 덮밥이 나왔다. 뭔가 하고 봤더니 양곱창과 처녑이다. 우리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게걸스레 먹어댔다. 페루에서 내장 덮밥을 다 먹어보다니. 종로 1가에 유명한 모 해장국 집을 떠올릴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둘이 합쳐 4솔. 자, 이제 오후 3시까지 기다리면 된다.
변종 오리엔탈리즘이라 비난할지 모르는 일이지만 뻬루에는 확실히 주술적인 분위기가 있다. 뭐랄까,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다고 말 할 수도 있고. 아르헨띠나가 '원주민 학살'을 통해 과거와의 단절을 꾀하고, 칠레가 마뿌체족을 박물관에 보냄으로써 시치미를 뚝 떼고 있는 반면에 뻬루는 역시 이주민이 아닌 원주민의 나라다. 믿을만한 경제 지표와 뻬루인들의 생활수준, 혹은 산업과 교육, 역사나 고유문화 등을 가지고 설명할 수 없는 내 가위눌림의 진실은 사실 그런 '변종 오리엔탈리즘' 어디쯤에 존재할 것이다.
나름의 법칙을 토대로 잘 살아가고 있는 빵 파는 할머니 같은 풍경(그렇다. 이방인인 내게는 모든 게 풍경이다. 경험이나, 삶 따위가 아니다.) 앞에서 나는 그녀의 보이지 않는 삶 따위를 생각해선 안 되는 것이다. 자식을 위해, 손자를 위해, 혹은 남편이나, 그녀 자신을 위해 1 솔짜리 백동전 앞에서 빵을 구워 팔아야 하는 그 남루하거나 혹은 억새 같은 삶에 대해 나는 명상을 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내 뇌리에 박힌 버스 휴게소의 모든 이미지들은 분명 내 안 어딘가에서 나를 압박하고 있음에 분명하다. 그런 것들이 독이 있는 선인장 따위나 물을 먹을 때 대지의 여신 파차마마에게 한 모금 흘리는 것 따위의 유명한 관습 앞에서 과장된 표정을 짓고 있던 내 모습과 결합한 것이리라. 주술적인 분위기 같은 느낌들은 분명 내가 만들어 낸 환상일 것이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한다. 커다란 호수를 끼고 있는 이 뿌노 시에 그렇게 비가 자주 내리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린 뿌노 시내를 한 눈에 볼 수 있다는 뿌마 우타(Puma Uta)라는, 일종의 전망대를 찾기로 했다.
칠레의 발빠라이소처럼 호수가와 산등성이에 퍼져 있는 도시를 보는데 제격인 곳이다. 택시를 타고 커다란 푸마상이 있는 산꼭대기에 올라 시내를 바라보다가, 젊은 연인들의 애정 행각을 바라보다가, 시계를 바라보다가 걸어서 내려왔다. 산 등성이의 집들은 우리네 시골 풍경의 그것과 흡사했다. 내려오는 길에 "후지모리에게 자유를(Fujimori libertad)"이라는 문구를 본척만척 하고 내려왔다.
사실 우리는 띠띠까까 호수를 살짝 맛보는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우리가 가려하는 우로스 섬은 뿌노시가 있는, 띠띠까까 호수의 작은 만 한 가운데 있는데, 만을 벗어나 볼리비아쪽으로 배를 타고 가야 호수의 진정한 크기에 압도될 수 있다고 한다. 우로스 섬은 또또라(Totora)라는, 속에 스펀지를 품고 있는 갈대로 만들어졌다. 수백년 전부터 적과 맹수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이런 인공 섬을 만들어 거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적과 맹수의 침입이 없어진 지금, 이들은 여전히 육지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 물론 삶의 방식은 완전히 바뀌었다. 뻬루 정부는 이들을 특별하게 관리한다. 일주일에 한 번씩 의사가 파견되는 등, 보건과 교육과 생활과 관련된 모든 것은 뻬루 정부가 보조한다. 이들은 이 섬에 앉아 갈대를 엮어 섬을 키우고, 집을 짓고, 간혹 기념품을 팔아 생계를 이어나가면 되는 것이다.
물론 우로스 사람들 중에도 대도시로 나가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이주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남아있는 이들은 한국인들을 상대로 '둥글게 둥글게'라는 '서양 동요'를 불러주는 등의 여러 이벤트를 개발해 여전히 관광업으로 생계를 이어갈 것이다. 이방인들에겐 구경꺼리지만, 이들에겐 삶의 한 방식이다. 이쯤에서 나는 또 다시 꿈틀거리는 편견들과 싸워야 했지만 기분 좋은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날씨가 좋지 않아 바람대로 띠띠까까 호수 위에서 보는 석양은 포기해야 했지만, 처음으로 '한국인' 여행자를 그 것도 이 작고 습한 갈대 섬 위에서 만났다는 사실은 기분 좋은 추억으로 남았다. 스페인어를 배우기 위해 뻬루에 5개월간 살았다는 그녀는 (우리가 보기엔) 엄청나게 유창한 스페인어로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기도 했다.
태초에 빛이 띠띠까까를 비추었고, 태양의 아들 망꼬 까빡(Manco Capac)이 아버지 태양의 지팡이를 들고 호수로 내려왔다. 후에 망꼬 까빡은 지팡이가 꽂히는 곳에 정착해 잉카 제국을 만들었다.
지팡이가 꽂힌 곳은 세계의 배꼽이라는 꾸스꼬다. 어디서 본 듯한 내용인가 하니, 마르께스의 <100년동안의 고독>에 나오는 마꼰도 마을 전설과도 비슷하다. 비극의 기원은 그렇게 꾸스꼬에서 시작되었다. 내가 봤을 때 꾸스꼬는 배꼽보다는 천공의 성 라퓨타가 지상으로 추락해 생긴 오래된 유적지 쯤 되는 것 같다. 그 곳 사람들은 라퓨타 사람들처럼 수학과 기하학에 능했고, 언제 지구가 멸망할 지를 두려워하며 살았다고 한다. 3400미터에서 생활하면 공중 섬을 타고 떠다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여하튼 말도 많고, 탈도 많고, 무수한 시인과 소설가, 그리고 정치인들에게 상상의 마법을 심어주었다는, 정말 하늘 위의 도시인 맞추피추(Machu Picchu)로 간다. 띠띠까까는 전설의 기원지이자, 우리의 고산병 적응을 위한 전초기지였다.
('뻬루' 대신 '페루', '잉까' 대신 '잉카' 등으로 적는 게 바른 표기법이지만, 여행기라는 특성을 감안해 현지 발음에 최대한 가깝게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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