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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데스 산줄기마다 박힌 잉까의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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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안데스 산줄기마다 박힌 잉까의 미소"

[손문상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ㆍ<14>] 따끄나와 따라따

깔라마(Calama)를 출발한 우리는 드디어 뻬루(Peru)로 향한다는 기대감에 허파를 잔뜩 열어 제치고 버스의 푹신한 의자에 몸을 던졌다. 칠레 사막의 끝, 뻬루 사막의 시작점을 찍어주는 국경도시 아리까(Arica)의 해 돋이에 마음속으로 작별의 인사를 했다. 안녕 칠레.
▲ 칠레의 국경도시 아리까에서 맞이한 아침. 칠레에서의 마지막 풍경이다. ⓒ손문상

아리까 버스 터미널 옆엔 국제 꼴렉띠보(Internacional Colectivo, 국제 택시) 정류장이 있다. 우리는 공룡 시대에 출몰했을 법한 6인승 대형 시보레 세단을 운전하는 터프한(?) 아저씨의 차를 타기로 했다. 뻬루 사람 세 명과 함께(꼴렉띠보 출발 시간은 '승객이 다 찼을 때'다.) 간단한 출입국 서류를 작성하고 10여분을 달려 칠레 출입국 사무소에 도착했다. 로드리게스(Rodriguez)를 생각나게 하는 이 아저씨는 칠레, 뻬루 국경 사무소를 오가며 우리의 출입국 수속을 도와주었다. 1인당 4000페소(우리 돈 약 8000원).
▲ 칠레와 뻬루는 가까우면서도 먼 나라다. 칠레의 국경도시 아리까(Arica)에서 뻬루의 국경도시 따끄나(Tacna)로 넘어가며 탄 국제 택시 안에서. ⓒ손문상

알란 가르시아? 도둑!

국경 사무소를 나와 다시 20분 여를 달려 뻬루 국경도시인 따끄나(Tacna)에 도착했다. 뻬루는 칠레보다 두 시간이 더 빠르다. 아침 여덟 시에 아리까에서 출발해 아침 일곱 시에 뻬루에 도착했다. 국경을 넘는 일이란, 역시 한국 사람들에겐 신기한 체험이다.

우리의 뻬루 여행동안 두억시니처럼 따라다녔던 이미지들이 몇 가지가 있다. 현재 뻬루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꼴렉띠보 운전 기사 아저씨에게 묻자 되돌아 왔던 말, 알란 가르시아(Alan Garcia, 현 뻬루 대통령)? 라드론(Ladron, 도둑)!!!

동전을 열 번 넘게 던져서 앞면만을 본 것일 수도 있지만, 뻬루 여행동안 알란 가르시아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모두 같았다. 85년도에 좌파를 표방하고 36세의 나이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가 실패한 경력을 딛고 화려한 신자유주의자로 부활한 그보다, 오히려 알베르또 후지모리(Alberto Fujimori, 전 뻬루 대통령, 재임기간동안 의회를 해산하고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는 등 독재를 감행했으나 측근 비리로 낙마)에 대한 묘한 동정심이 정치적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알다시피 '잉까(Inca)인'의 자긍심이 빈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뻬루는 여전히 잉까의 나라"

뻬루는 아직 잉까의 나라다. 비극의 부스러기는 아직 끈질기게 남아 있으나 모두가 잉까 안에서 안녕한 것처럼 보인다. 미국 문화가 깊숙이 침투한 칠레에 비해, 유럽의 향취가 강하게 배어 나오는 아르헨띠나에 비해 뻬루에는 뻬루만의 분위기가 있다. 그것이 500여년 전에 멸망한 잉까 제국의 그것과 버무려진 것을 보면 묘한 자존심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뻬루 사람들은, 특히 칠레를 하수쯤으로 깔보는 것일 수도 있다. 뻬루에서 '칠레노(Chileno)'라는 말은 가장 심한 욕 중에 하나이기도 하니까.

뻬루의 자존심, 칠레에 팔리다

우리가 뻬루 땅에서 헤매고 있을 때, 한국에서는 남대문이 거짓말처럼 홀랑 타버렸다는 뉴스가 인구에 회자되고 있었던 것처럼, 이 곳에서도 몇 가지 이슈가 관심을 끌고 있었다. 먼저 뻬루의 자존심으로 불리던 슈퍼 체인 웡(Wong) 그룹이 칠레 기업인 센꼬수드(Cencosud)에 5억불에 매각된 사건이 있었다.

웡 그룹은 뻬루 내 전체 슈퍼마켓 매상의 60%를 차지하는 회사인데, 이를 사들임으로써 칠레 자본은 뻬루 슈퍼마켓 업계의 73%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로써 뻬루 내 칠레 자본은 60억불에 달하게 된 셈이라 한다. '졸부' 칠레의 자본 공격이 '촌구석 양반' 뻬루의 자존심을 사정없이 파헤친 것이다.

두 번째, 뻬루는 지난해 8월부터 칠레와 해안 경계선 분쟁의 '전면전'(물론 실제 상황은 아니고 말이 그렇다는 이야기다)을 선언했다. 뻬루 국방장관인 알란 바그너가 국제 사법재판소에 고소장을 제출한 것이다. 두 나라 국경선인 꼰꼬르디아(Concordia)가 시작되는 태평양 상의 지점에 양국간 일치 못 봄으로 생긴 일이다. 태평양 전쟁(1879) 이전에 아따까마 사막의 일부 지역이 뻬루 영토였다는 것이 확실하긴 하나, 현재는 엄연히 칠레가 주무르고 있는 '황금의 땅'임에 틀림없다. 남미의 모든 나라가 주장하는 영토의 넓이를 더하면 남미 전체 면적을 한참 초월한다니, 과연 이 대륙의 국경 분쟁도 하루 이틀이 아닌 듯싶다.

세 번째는 뻬루-미국 자유무역협정이고, 네 번째는 맞추피추(Machu Picchu) 관광 개발권을 칠레 자본에 넘기는 문제였는데, 이는 후에 꾸스꼬 편에서 자세히 다루게 될 것이다.

하루에 두 대씩 오가는 버스

에르네스또는 이 곳 따끄나를 거쳐 따라따(Tarata)라는 작은 시골 마을을 들른다. 이 곳에서 잉카 일족인 아이마라족(Aimara) 사람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된다. 우린 따라따로 가는 방법을 강구했다.
▲ 따라따로 가는 길은 험하다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다. 뻬루의 세 얼굴(태평양, 안데스, 그리고 아마존) 중 하나인 안데스 산맥. ⓒ손문상

옵션 1, 호스텔에서 추천해 준 여행사가 소개한 상품으로 아침과 점심 식사가 포함된 따라따, 까미노 잉까(Camino Inca, 잉까의 길), 아구아 깔리엔떼(Agua Caliente, 온천) 및 문화 유적지 "훌 코오스" 탐방. 유창한 영어의 전문 가이드 대동. 하지만 비용이 일인당 100 달러라 별 고민 없이 패스.

옵션 2, 버스를 타고 따라따 도착, 그리고 알아서 살아남기. 우리는 여행사 직원의 만류에도 당연히 옵션 2를 택했고,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상담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했다.

따끄나에 도착한 다음 날, 우리는 아침 일찍 식사를 하고 따라따행 버스가 있다는 터미널로 향했다. 하지만 낭패, 따라따 행 버스는 하루에 두 대가 있는데, 한 대는 아침 7시 경에 이미 출발했고, 나머지 한 대는 오후 4시에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는 여행 최대의 위기에 봉착한 표정을 짓고 망연자실 서 있었으나, 한 친절한 젊은이가 구세주처럼 나타나 따라따로 가는 세 번째 방법을 알려주었다.

옵션 3. 일인당 10솔(Soles, 우리 돈으로 약 3000원)로 아우또(Auto, 꼴렉띠보와 비슷한 택시)를 타고 따라따 도착, 그리고 알아서 살아남기.

'히치하이킹'이 자연스런 곳

따라따는 해발 3100여 미터에 위치한 곳이다. 우리를 태운 아우또는 따끄나 시를 벗어나자마자 엄청난 경사를 오르기 시작했다. 가는 길은 험로였다. 길 중간 중간에 무너져 내린 바위가 새초롬하게 앉아 있는 것은 기본이고, 120도 정도의 커브와 15도 정도의 급경사는 20년 만에 차멀미를 의식하게 해 주었다. 하지만 기사 아저씨는 베테랑이었고, 승객들은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중간에 예쁜 아가씨 한 명이 히치하이킹을 했고, 손님들의 의사를 무시한 채, 기사 아저씨는 트렁크에 아가씨를 넣어버렸다. 우리는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손님들답게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모두가 그런 식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지라 이런 과정은 매우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따라따는 따끄나 주 안에 있는 인구 3000명 가량이 사는 작은 도시다. 국경도시 따끄나가 칠레에서 이어지는 사막지대의 평지에 자리하고 있어 적당한 더위에 걸맞는 옷을 걸치고 왔던 나는 고원지대인 따라따에서 초겨울을 맛봐야 했다. 아우또에서 내린 후 제일 먼저 옷을 사서 걸쳤다.
▲ 따라따에 살고 있는 잉까인, 아이마라족 할머니. ⓒ손문상

▲ 이 할머니는 사진 찍히는 것을 유난히 좋아했다. 사진기를 든 이방인과 만나는 것이 낯설 것이다. 다른 도시지역의 유명 관광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는 분명 다른 반응들이다. 따라따에 살고 있는 잉까인, 아이마라족 할머니. ⓒ손문상

▲ 따라따에 살고 있는 잉까인, 아이마라족 할머니. ⓒ손문상

이곳 시청에서 우리는 셀레스띠노(Celestino)와 앙켈리노(Angelino)라는 가이드를 만났다. 시청 가이드 유니폼을 입고, '가이드 자격증'을 자랑스럽게 보여주던 이 친구들은 "한국인 방문이 처음"이라며 흔쾌히 따라따 근교를 안내해 주겠다고 나섰다.

스페인어를 못하니…

때로는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 더 많은 말을 해 줄 수 있는 법이다. 말이 통하지 않을 때 우리는 많은 것들에 대해 침묵할 수 있으며, 침묵은 오해를 피할 수 있게 해 준다. 말은 이해를 만들지만 오해도 만들며, 말 없음은 이해를 만들 수 없지만, 오해도 만들 수 없다. 말에 의존하는 사람들은 다른 의사소통 수단을 무시하거나, 아예 인식하지 못하기도 한다.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말을 많이 함으로써 세상의 시인들이 모두 멸종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한마디로 우리가 스페인어를 잘 못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영어 가이드가 붙는 100달러짜리 '옵션 1'을 그리워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의사소통에 도움이 될 수 있을만한 것들을 모두 동원해야 했다. 일단 스페인어와 영어 핵심단어가 주 재료가 된다. 그리고 조리하기 전에 의성어, 의태어를 넉넉히 두르고, 그림과 노래와 춤으로 간을 맞춘 다음, 간단한 흉내내기로 데코레이션을 하면, 훌륭한 퓨전 볶음이 된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간단한 '명상'과도 같은 것이다. 물론 이런 명상을 하기 위해서도 잡념은 사라져야 마땅하다.
▲ 따끄나의 시장 풍경. 그 옆에 아우또(Auto, 일종의 장거리 택시)가 즐비하게 서 있다. 따라따를 비롯해 다른 장거리 지역을 이어주는 중요한 교통수단이다. ⓒ손문상

잉까제국의 신경망…"모든 길은 꾸스코로 통한다"

우리는 따라따로 오는 길에 우릴 매료시켰던 작고 평화로운 마을인 에스띠케 빰빠(Estique Pampa)에 가고 싶다고 이야기했지만 이들은 '잉까의 길(Camino Inca)'에 우리를 데려다주고 싶어 했다.

잉까의 길은 과거 잉까제국 시절 꾸스꼬(Cuzco)를 잇는 통신망과 같은 것이었다. 로마의 도로망 부럽지 않게 연결된 이 길을 통해 따라따에서 꾸스꼬까지 일 주일만에 주파할 수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지만 비밀은 의외로 간단하다. 일종의 파발제였던 것이다. 알다시피 남미에는 말이라는 동물이 없었고, 말 대신에 모든 통신은 인간의 발걸음이 대신했던 것이다.

우리에겐 꾸스꼬의 관광 상품 이름으로 유명한 '잉까의 길'은 뻬루뿐 아니라 볼리비아, 꼴롬비아, 에콰도르, 아르헨띠나 등지에 걸쳐 고루 분포하고 있다. 모든 길은 꾸스꼬로 통한다.
▲ 잉까인들은 이 길을 통해 꾸스꼬를 왕래했다. 따라따, 잉까의 길(Camino Inca). ⓒ손문상

▲ 잉까의 길을 걷던 이 아이는 난생 처음 보는 한국인들을 신기해하며 활짝 웃었다. 잉까의 길에서 만난 꼬마 아이. ⓒ손문상

▲ 자그마한 몸집에 헤진 신발을 신고 얼마 안 되는 나무 짐을 진 채 오늘도 잉까의 길을 걷는다. 잉까의 길에서 만난 꼬마 아이. ⓒ손문상



"잉까인은 야만적이었다"라고?

체 게바라의 얼굴이 새겨진 모자를 쓰고 있던 방년 19세의 앙켈리노는 체 게바라도 이 길을 지나갔다고 우리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에르네스또는 이 길을 지나면서 따라따의 잉까 후예들을 보고 탄식을 한다. "한때 영광을 누렸던 전사들의 얼굴은 사라졌고, 가난과 굴종에 찌들어 있"던 이들에게서 그는 절망감을 느낀다.

하지만 이 모든 평가는 부당한 것이다. 역사를 만들었던 에르네스또이지만, 누구나 역사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잉까인의 시간과 체 게바라의 시간이 같을 수는 없는 일이다. 잉까인들이 언제 전사였던 적이 있던가?

잉까인의 야만을 기록한 모든 문건은 스페인군의 그것들이다. 이들은 종족 간 혈투를 생활로 알며 얼마간의 식인 풍습을 가지고 있고, 신에게 자신의 심장을 바치는 자결을 미덕으로 알며, 한 번 씹으면 이틀 동안 먹지 않고 자지 않고 걸을 수 있다는 신비의 묘약(코카)을 복용하는 '비이성적'인 종족이었다.

까막눈에 무식쟁이 프란시스꼬 삐사로(Francisco Pizarro)의 뻬루 정복 과정에서 있었던, 잉까 제국 몰락의 근본원인이라 하는 권력의 암투 따위는 이미 모든 뻬루 사람들이 알고 있는 상식에 속하는 것이지만, 정치 권력의 투쟁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일어나는 일이다. 모든 정복자들은 '내부 분열'을 손쉽게 야만적 정복의 알리바이로 사용할 뿐이다.
▲ 흔쾌히 가이드를 맡아 주었던 방년 19세의 앙켈리노(Angelino). ⓒ손문상

그렇다면 우리가 내릴 수 있는 판단은 한 가지뿐이다. 역사를 믿지 말자. 전사? 사실 전사는 피로 얼룩진 유럽 전쟁사에서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는 유럽인들의 속성이기도 한 것이 아닌가? 위대한 전사의 민족, 유럽인들이 언제부터 저렇게 신사인 척 하고 있는가? 궁금해지기도 한다.

수백 년 동안 유지된 잉까의 계단식 밭

이 복잡한 사고과정 속에서 셀레스띠노와 앙켈리노의 표정은 너무나 순박한 그것이었다. 나는 잉카인들이 전사였느냐고 물었다. 이들의 대답은 '물론!' 이었다. 용맹하고 비장한 표정을 지어보이기도 했다.
▲ 수백 년에 걸쳐 일구어온 안데스의 경작지에서 오늘도 잉까의 후예들은 노동을 이어간다. 따라따 근교의 계단식 밭. ⓒ손문상

하지만 셀레스띠노는 잉까인들이 얼마나 용맹스러웠느냐는 것 보다는 잉까인들의 경작지였고, 현재 경작지이기도 한 안데네리아(Andeneria)의 평화롭고 경이로운 재배 풍경을 설명해주는데 몰두했다. 허리를 숙이고 밭일을 하는 사람들의 뒷모습에는 '전 평화를 사랑해요'라고 써 붙어 있었다.

쌀이나 옥수수, 감자 혹은 오레가노같은 향신료를 수백 년에 걸쳐 재배하고 있는 이 멋진 계단식 밭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군 복무 시절, 뻬루 농민 혁명단체에 총을 겨눴던 청년

앙켈리노는 순박한 청년이었다. 나름 17세에 2년간의 군 복무를 마치고 나온 당당한 친구였지만, 여자 친구 이야기에는 귓불까지 발개지는 천상 시골 총각이었다. 셀레스띠노는 이런 앙켈리노를 놀려주기에 바빴다.

'전사'와 '농민' 사이에서 헷갈려하고 있는 나에게 셀레스띠노는 자신의 일화 하나를 들려주었다. 서른 세 살의 셀레스띠노는 90년대 초반에 군 복무를 하며 마오주의자 농민 게릴라 단체인 '센데로 루미노소(Sendero Luminoso, 빛나는 길이라는 뜻.

뻬루의 현실을 서구 사회주의 혁명의 그것과는 다른, 즉 전(前) 공업화 단계로 분석하고, 농민 혁명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마오주의를 신봉하는 뻬루 안데스 지역의 게릴라 단체)'와 교전을 벌인 적이 있었다고 했다. (사실 뻬루에서 만난 30대의 '군 복무 유경험자'들에게 센데로 루미노소와 뚜빡 아마루 혁명운동(MRTA, Tupac Amaru Revolutionary Movement)과의 교전 경험은 일반적이었다. 우리가 아마존 지역에서 만났던 '에르네스또(Ernesto)'라는 친구 역시 자신의 뚜빡 아마루 혁명운동과의 교전 경험을 들려주었다.)
▲ 내가 그려준 자신의 얼굴을 무척 마음에 들어하던 또 한 명의 가이드 셀레스띠 노(Celestino). 그는 과거 무장 게릴라 단체인 센데로 루미노소(Sendero Luminoso)와 교전을 벌인 끝에 포로로 잡혔던 적이 있다고 말했다. ⓒ손문상

'테러리스트'의 포로가 돼 보니…"생각보다 잔인하지 않았다"

90년대 초반에는 현 대통령인 알란 가르시아의 실정에 대한 반작용으로 파쇼 성향이 다분한 '알베르또 후지모리(Alberto Fujimori)'에게 자리를 내 주었던 시기였고, 알란 가르시아 시절 제 세상을 만난 듯 악명의 피치를 올리며 선전하던 게릴라들은 후지모리의 무식한 군사 작전에 의해 결국 리더였던 아비마엘 구스만(Abimael Guzman)이 체포되며 화려했던(?) 시절의 막을 내려야하는 역사가 있었다. 이 작전에 참여한 바 있었던 셀레스띠노는 센데로 루미노스의 포로가 된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정말? 우리는 반문하듯 물었고, 셀레스띠노는 무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남았담? 셀레스띠노의 답변은 간단했다. "생각보다 그들은 잔인하지 않았다"는 것. 바로 우리가 '악명 높은 남미 테러리스트'로 알고 있는 센데로 루미노스에 대한 셀레스띠노의 답변이었다.

사실 센데로 루미노스는 도시민들과 언론, 그리고 정부가 합작해 만들어낸 괴물이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현재 센데로 루미노스의 잔당들은 아직까지 안데스 산지에 분포하며 무장 강도를 일삼는 좀도둑 정도로 변했다고 한다. 어디에나 도둑은 있는 일 아닌가? 라고 하기엔 뻬루의 현 상황을 보여주는 씁쓸한 증거 같았다.

안데스 산맥에서 뿜어져 나오는 온천

스페인 정복자들이 잉까의 신인 파차마마(Pachamama, 어머니 대지라는 뜻)에 성모 마리아를 포개어 정복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만들었다던 따라따의 유적지인 산따 마리아(Santa Maria) 교회로 가는 길에 앞서가던 앙켈리노가 나무 잎사귀를 한 움큼 따더니 손바닥에 놓고 비비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코를 박고 냄새를 맡는다. '에우칼립투스(Eucaliptus)'라는 나무였다. 잉까인들이 집을 지을 때 목재로 쓰기도 했고, 잎사귀는 약용으로 사용했다고 하는데, 앙켈리노가 했던 방식과 똑같이 하고 코를 박은 후 숨을 들이 마시니 코가 뻥 뚫리는 기분 좋은 느낌이 들었다.
▲ 발굴이 한창이라는 잉까의 제례장 터. ⓒ손문상

▲ 이들은 어떤 표정으로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았을까? 고고학적 가치로 승화해 이제는 낡아버린 옛 잉까인의 얼굴. ⓒ손문상

고산지대라 그런지 숨이 금방 차 올랐다. 우리는 발굴이 한창이라던 잉까인들의 제례장을 보았다. 꾸스꼬에도 꾸엔코(Q'enqo)라는 제례장이 있다고 하지만, 제례장은 잉까인들이 살던 어느 곳에나 있는 것이다. 물론 따라따라 하는 이 시골 마을의 제례장은 훨씬 소박한 규모였다. 이 쯤에서 너무 멀리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마침 앙켈리노가 "온천욕 한번 하실라우?"라고 조심스레 우리의 의사를 물어왔다.

온천, 즉 '뜨거운 물(Agua Caliente)'는 띠까꼬(Ticaco)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 위치해 있었다. 꾸스꼬에서 수 백 달러씩 들여 온천 관광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의외의 곳에서 온천을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고무적이기도 했다. 물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따라따 지역에는 온천이 널려 있었다. 한참을 걷고, 또 중간에 버스를 잡아 타서 온천에 도착했다. 늙은 아이마라족 할아버지 한 분이 쓸쓸히 온천을 관리하고 있었다. 한 번 목욕에 2솔(우리 돈 약 600원). 안데스의 뜨거운 정기를 받았다고 믿으며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개운한 마음가짐으로 띠까꼬로 들어섰을 땐 날이 이미 저물고 있었다.
▲ 한 폭 동양화같다. 띠까꼬(Ticaco)로 가는 길. ⓒ손문상

▲ 유적처럼 서 있는 당나귀. 띠까꼬(Ticaco)로 가는 길. ⓒ손문상

같은 음식이 장소에 따라 3만 원 혹은 만 원

우리는 두 가이드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기 위해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그 곳의 물가는 불과 8시간 전에 머물고 있었던 따끄나 시와 전혀 달랐다. 기념품 가게 겸 철물점 겸 식료품 가게 겸 옷 가게 겸 문방구 겸 식당 겸 선술집인 곳에 들어가 음식과 맥주를 배불리 먹었다.

따끄나 시에서 먹었다면 적어도 100솔(약 3만 원) 이상 나왔을 터인데, 이곳에서는 불과 33솔(약 만원). 아무리 시골이라지만 지나친 차이였다. 이러한 이중 경제는 뻬루 국민들의 균형 발전을 가로막을 것이기도 했다. 나중에 뿌노(Puno) 시에서 느낀 것이기도 하지만, 관광객들 상대의 즐비한 고급 식당가를 조금만 벗어나면 일인당 2솔에 닭고기 스프와 고기 덮밥을 먹을 수 있다. 물론 그런 식당에는 외국인들이 거의 드나들지 않는다.

띠까꼬에서 우리는 역시 관광 가이드를 한다는 셀레스띠노의 아내와 친구들, 그리고 지역 기자를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따라따 지역 신문에 '한국인 최초 방문'과 관련된 기사를 싣고 싶다며 우리의 사진을 찍어갔다. 셀레스띠노와 앙켈리노는 친구를 불러내어 우릴 따라따 시까지 태워주었다. 자동차를 끌고 나온 그 친구는 '한국어로 아미고(Amigo, 친구)가 뭐냐고 물었고, 우리가 '친구'라고 답해주자 차 안에서 내내 '친구'를 부르며 살갑게 대했다. 급기야 작별인사와 함께 감자와 사과 한 보따리를 선물로 주었다. 우리는 고마움의 표시로 돈을 조금 주려 했으나 극구 사양하는 그 앞에서 머쓱하게 손을 거둬야 했다.
▲ 따라따(Tarata) 시는 인구 3000명이 채 안 되는 작고 조용한 도시다. 평화로운 시내 풍경. ⓒ손문상

밤 늦게 따라따 시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따라따 시장님이었다. 그는 우리와 기념사진을 찍고 따라따 시 방문 기념품을 잔뜩 쥐어주었다. 따라따 시의 관광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의욕적으로 활동한다는 젊은 시장이었다. 그런저런 사이 우리는 결국 막차를 놓치고 말았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우리 둘은 마주보며 '당했다'고 외쳤다. 시장님과 두 가이드, 그리고 마을 주민들 10여명이 나와 우리에게 지역 호텔에 머물 것을 권했다. 물론 지역 발전을 위한 외국인 관광객 유치의 일환이었으리라. 하지만 우리는 이미 따끄나에 있는 숙소에 미리 돈을 지불해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지상으로 귀환해야 했다.

국경 도시 따끄나로 물건을 팔러가는 따라따 마을 노인

시간은 밤 10시 반. 마침 따끄나 시로 나간다는 닷지 트럭(닷지, DODGE는 미국 크라이슬러 자동차가 생산한 트럭 브랜드 명. 2차 대전 당시, 군수물자 운반용 트럭으로 널리 쓰였다.) 하나를 잡았다. 아쉬워 하던 따라따 시민들이었지만, 차편이 생기자 적극적으로 우리의 귀환을 도와주었다. 몇몇 아주머니는 집에 들어가 이불을 잔뜩 가지고 나왔다. 셀레스띠노와 앙켈리노와는 감동의 작별 포옹을 나누었다. 이별을 준비하는 진지한 표정의 그들 앞에서 우리는 잠시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우리는 다음에 다시 오겠다는 말을 유언처럼 남기고 트럭 짐칸에 이불을 뒤집어 쓰고 앉았다. 그렇게 헤어졌다.
▲ 지독한 안데스의 밤 추위를 뚫고 삶을 위해 청년은 따끄나로 간다. 빛을 한껏 빨아들인 렌즈 속으로 들어온 청년이 얼굴만 내 놓은 채 담요를 뒤집어 쓰고 있 다. 한 밤중에 닷지 트럭 짐칸에 함께 탔던 아이마라족 청년. ⓒ손문상

일인당 10솔(약 3000원)을 지불하고 탄 트럭 짐칸에는 우리 말고도 승객이 두 사람 더 있었다. 나이 지긋하진 할아버지 한 분과 많아야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앳된 아이마라족 청년이었다. 우리는 잠시 인사를 나누었다. 이 시간에 따라따 시로 가는 그들의 사연이 궁금하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점잖게 자신의 짐을 가리키며 물건을 팔러 간다고 했다. 따끄나 시에서는 분명 따라따 보다 더 많은 돈을 받고 물건을 팔 수 있을 것이다.
▲ 느릿한 걸음으로 따라따로 향하던 그가 우리를 돌아본다. 아구아 깔리엔떼(Agua Caliente, 온천)로 가는 길목에서 만난 할아버지. ⓒ손문상

▲ 느릿한 걸음 도중 멈추어 서서 무엇을 잃어버리기라도 한 듯, 주위를 두리번 거 린다. 무엇을 잃어버렸을까? 찾을 수 있을까? 아구아 깔리엔떼(Agua Caliente, 온천)로 가는 길목에서 만난 할아버지. ⓒ손문상

이 작은 트럭이 화려한 국경 도시 따끄나와 가난한 시골 마을 따라따를 연결 짓는 끈 같은 것이리라. 그리고 안개와 바람이 뒤섞인 위험천만한 도로는 그들이 아슬아슬한 삶을 살아내는 외줄과도 같은 것이리라.

도박과 마약과 환전상이 거리에 넘쳐나는 따끄나 시에서 할아버지는 국가 경제의 엑스트라로 한 몫을 겨우 해낼 수 있을 것이리라.

일자리를 찾아 따끄나로 향하는 청년

젊은 청년은 따끄나에 나가 일자리를 구할 것이라 했다. 따끄나 행이 처음은 아니라고 했지만, 그의 얼굴 속 장난기 가득한 표정에는 어떤 그늘 같은 게 있었다. 안개를 헤치고, 추위를 뚫고 밤중에 그곳에 가야만 하는 어떤 비장한 각오 같은 것도 얼핏 설핏 보였다. 이 친구, 언젠가 낙향을 꿈꾸지 않을까? 가난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며, 도시가 가난을 발명해낸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태평양 건너 '부자 나라' 한국인이 보는 오만한 시각 속에서 나는 자괴감 같은 것도 발견할 수 있었지만, 이 밤, 아이마라족 청년과 노인의 덤덤한 표정 속에서 나는 뻬루의 심장 같은 것을 언뜻 볼 수 있었다.

그것이 설마 오해에서 비롯된 것일지라도. 여행은 보는 것이 아니라 사색하는 것이라는 한 철학자의 오래된 말 앞에서 정직하게 옷을 벗고 짐칸 위에 앉아 있는 내가 잠깐 보이기도 했다.
▲ 증거처럼 찍은 우리 사진. 밤, 따끄나로 내려오는 지독한 어둠과 추위 틈에서. ⓒ손문상

▲ 거짓말처럼 화려한 불빛과 함께 따끄나는 나타났다. 따끄나로 내려오는 트럭 안에서. ⓒ손문상

▲ 사막 한 가운데 자리잡은 따끄나는 관광객이 거쳐야 하는 뻬루의 관문이다. 뻬루의 국경도시 따끄나의 석양. ⓒ손문상

▲ 사막 한 가운데 자리잡은 따끄나는 관광객이 거쳐야 하는 뻬루의 관문이다. 뻬루의 국경도시 따끄나의 석양. ⓒ손문상

기압의 상승을 끈질기게 느끼던 고막을 진정시키기 위해 침을 삼키며 2시간여를 달려 내려왔다. 마지막 언덕을 넘어서자 거짓말처럼 화려한 불빛의 따끄나 시가 눈앞에 펼쳐졌다. 천상에서 꿈 같은 경험을 하고 지상으로 내려온 동화 속 어린 주인공들처럼 우리는 맥주 생각이 간절했다. 피곤한 하루였다.

('뻬루' 대신 '페루', '잉까' 대신 '잉카' 등으로 적는 게 바른 표기법이지만, 여행기라는 특성을 감안해 현지 발음에 최대한 가깝게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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