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호숫가, 바릴로체
원래 에르네스또 체 게바라는 꼬르도바에서 대서양 해안을 따라 산 카를로스 데 바릴로체로 향하는 길을 밟았지만, 우리의 여정은, 그러기엔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그래서 과감히 '대서양'을 포기하기로 한다.
하지만 나머지 일정은 '돌아가는 길'이 아니기 때문에, 예정대로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에 나오는 길을 차례차례 밟게 될 것이다.
바릴로체는 나우엘 우아삐(Nauel Huapi)라는 커다란 호수 가장자리에 자리잡은 그다지 크지 않은 도시다. 성수기를 맞은 관광도시로 각지에서 온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많았다.
얽히고 설킨 혼잡한 도시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운 우리에게 이 곳 바릴로체는 한결 평화로워 보였다.
호숫가에는 수영하는 사람, 낚시하는 사람, 선탠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었고, 모두 여유로워보였다.
당국에서도 호수에 빠져 죽는다든지, 햇볕에 삶아져서 죽는다든지 하는 일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듯 했다.
'일곱 호수의 길'을 따라서
에르네스또는 이곳을 지나 호수와 산을 건너 칠레로 넘어갔다. 우리는 경로를 확인했다.
칠레로 넘어가기 전에 에르네스또는 산 마르틴 데 로스 안데스(San Martin De Los Andes)라는 작은 도시에서부터 바릴로체에 이르는 이른바 '일곱 호수의 길'을 통과했다. 따라서 우리 역시 이 길을 목표로 잡았다.
바릴로체에서 약 4시간 정도 거리의 산 마르틴 데 로스 안데스는 정식 버스가 다니지 않는다. 우리는 작은 여행사를 찾아 이곳을 지나가는 버스를 예약했다. 산길은 비포장이며, 현재 포장공사가 한창이어서 자동차가 지나갈 때마다, 먼지가 반갑게 일어나 인사한다. 지구 행성의 피부 분비물이다.
가이드에게 물으니 "일곱 호수의 길은 매우 오래전부터 있었던 길이며, 현재는 포장공사 중"이라 했다. 본격적인 관광코스를 만들기 위한 국가적인 이벤트였다. 아르헨티나가 관광에 눈 뜬 지 얼마 되지 않아 개발 붐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바릴로체에서 만난 친절한 한인 교포에게 들었다.
에르네스또가 지나간 먼지 날리는 도로
호수 길 위로 에르네스또는 괴롭게 달렸으리라. 눈 호강은 실컷 했을 터이나, 천식환자처럼 탈탈거리는 포데로사 위에 걸터앉은 것을 불안해 하며 힘겹게 먼지를 들이켰으리라. 이런 저런 상념에 빠져서 덜컹거리는 버스 속에 앉아 눈 앞의 먼지 알을 세고 있었다.
흉측하게 뒤집어 놓은 길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화장실 같은 곳에서 아랫배에 힘을 주면서도 동시에 할 수 있는, 상상을 가장한 잡념 뿐이었다.
간혹 멋진 풍경들이 지나갔지만, 버스는 결코 멈추어 서는 법이 없었고, 따라서 우리의 소박한 욕구를 만족시켜주지 않았다. 버스가 멈춘 곳이라고 해도 그 좋은 풍광들 다 보내고 난 자투리 같은 것뿐이었다.
그럴 때 마다 우리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쭈그리고 앉아 호수 위를 떠다니는 오리 따위에 멍청하게 렌즈를 들이대는 것으로 지불한 교통비를 계상해야만 했다.
길 위에선 누구나 평등하다
길은 하나다. 산길이야 다 그렇겠지만, 이 넒은 땅 위에서 대한민국 인구보다 적은 사람들이 사는 나라니, 많은 길이 그다지 필요치 않을 것이다.
길은 저항하지 않는다. 가는 이들의 발길을 잡지도 않고, 방해하지도 않는다. 길을 통제하는 것은 언제나 사람이다. 혹은 길을 가려는 사람 그 자신이다. 누구나 지나갈 수 있는 길. 그래서 여행자는 모두가 평등하다.
이런 이론으로 무장한 우리는 보다 좋은 경치를 볼 수 있는 곳에 내려 주도록 가이드를 설득했지만, 가이드는 우리에게 무언으로써 완강히 저항했다.
심지어 우리를 통제하려 들었다. 우리의 철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가이드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스페인어를 못한다는 사실 또한 함께 인정해야 했기에 우리는 기존의 철학을 일정 부분 수정해야만 했다.
산 마르틴 데 로스 안데스…에르네스또가 묵었던 마굿간
산 마르틴 데 로스 안데스는 매우 작은 도시였다. 버스에서 내려 맛없는 점심을 해치운 후 우리는 에르네스또가 약 일주일 간 묵었다는 라닌 국립공원 사무소를 찾아가기로 했다.
라닌 화산에 올라 땅을 파 내려가면 후지산 정상에 올라설 수 있다는 설명을 들으며 콧방귀를 뀌었던 우리의 목표는 따로 있었던 거였다. 국립공원 사무실은 깔끔한 현대식 건물이었고, 뒤편에는 자동차 정비소, 고물상, 그리고 용도를 알 수 없는 창고 등이 구획 별로 어지러운 듯 질서있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친절한 직원을 하나 만날 수 있었다. 솔레다드 안띠베로(Soledad Antivero)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녀는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을 정확히 집어 주었다.
에르네스또가 머물렀던 마굿간이 현재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열쇠가 없어요"
왜? 그녀는 체 게바라의 포스터가 걸려 있는 그 작은 박물관을 일반에 공개하는 것이 당국에 의해 엄중하게 통제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작은 도시에서 축제나, 특별한 이벤트를 마련할 경우에만, 그것도 일 년에 몇 차례밖에 공개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를 한국의 매우 유명하고 권위있는 저널리스트라 과장해 설명하고, 이곳에 오기 위해 세상 끝에서 달려왔다며 간곡히 부탁했다. 딱 한 번만 들어가게 해 달라며 우리가 무슨 짓을 하며 여기까지 왔는지를 대강 설명해주었다.
그녀는 우리의 공격적인 간절함에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자신에게 열쇠가 없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분주하게 여기저기 알아보기 시작한다.
일단 그녀가 국립공원 사무소 윗선의 허락을 전화로 받아냈을 때 우리는 졸이던 마음에 육수를 살짝 끼얹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더한 문제는 단 하나밖에 없다는(맙소사!) 열쇠였다.
공원 사무소와 시청 양 쪽에서 필요할 때마다 번갈아 가져가서 서로 주지 않고 있는 게 관례처럼 되어버렸다는 것이고, 마침 그 열쇠는 시청에 가 있다는 것이다. 지구 끝에서 왔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잘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믿으라는 것인지 의심스러웠으나, 직원의 지나칠 정도로 안타까운 표정, 그리고 설명 때문에 일단 믿어보기로 했다.
하지만 우리가 평범한 사람들 이었다면 "네 알겠습니다"라는 간단한 회화체 말투를 끝으로 발길을 돌렸을 터였지만, 손문상 화백은 기어코 "한 번만 월담하면 안됩니까?"라는, 전에 설명했던 '유명한 저널리스트'의 품위에 걸맞지 않는 말을 꺼내고 말았다. 직원이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은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손문상 화백의 말은 우리가 얼마나 끈기 있게 이 곳을 취재하려 하는지에 관한 의사를 충분히 전달해 주고도 남았다. 결국 우리는 박물관에 전시된 사진과 포스터, 그리고 체가 남긴 기록을 시디로 구워주겠다는 약속을 받을 수 있었다. 따끈따끈한 시디는 우리의 품안에 안전하게 보관되었다.
"나 여기 있는데, 너는 어디로 가니"
체 게바라가 잠시 머물렀던 곳이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퍽 고무적이었다. 누군가의 흔적을 좇아 본 자는 알 것이다. 사소한 흔적이라도 누군가에게는 다음 여정을 꾸리는데 자신감을 안겨준다.
손문상 화백은 마치 "나 여기 있는데, 너는 어디로 가니"라고 하는 듯한 느낌. 일종의 '계시'라고 할까. 그런 종류의 전기가 찌릿 왔다고 했다.
신화는 우연히 만들어지는 것이다. 에르네스또는 자신의 발자취를 누군가 따라가리라 생각했을까? 영악한 녀석같으니라고.
여행을 시작하며 첫 기록을 남기는 순간 젊은 에르네스또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자신감을 가졌을 것이다. 자기는 이를테면 쿠바 같은 나라를 해방시킬 것이라고, 따라서 자신의 여정을 따라오는 사람도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여행 길에 나서는 순간, 미래의 삶을 앞당겨 결정한다
많은 경우 우리는 무엇인가를 결정하는 순간, 우리가 모르는 더 많은 것을 결정하는 셈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우리가 라틴아메리카 행을 결정하는 순간, 우리는 여행 후의 우리의 삶을 결정지을 수 있는 '바람'을 허파에 집어넣고 있는 셈이 되는 것이다.
혹은 이명박을 대통령으로써 선택하고자 사람인자 도장을 꾹꾹 눌러대는 결정은, 사교육비의 지출 정도나, 아파트 청약 부금 납입이나, 심지어 지구와 우주의 평화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미리 결정한 셈이 되는 것일 수도 있다.
돌아오는 길에 즐거운 표정으로 버스에 앉아 있는 우리를 '아무 생각 없는 멍청한 동양인 여행객' 정도로 불쌍히 여기고 있던 가이드는 (이 가이드는 우리가 일곱 호수의 길 여정에 많은 불만을 품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는 가이드가 열심히 설명하는 스페인어를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사자 모양과 코끼리 모양으로 생겨먹은 바위를 대단한 인심을 쓰듯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영어로 의사소통을 시도해 주는 선의를 베풀었다.
우리는 우리만의 만족감을 안고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멍청하게 사자바위와 코끼리 바위에 렌즈를 들이대는 시늉을 기꺼이 해 주었다. '오~', '아~', '우와~' 라는 감탄사를 곁들여주었을 때, 가이드는 작은 죄책감을 벗어버린 표정으로 우리에게 엄지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우리는 칠레로 넘어가는 호수길 여정에 대한 기대감을 품고 기분 좋은 피곤함을 즐기며 바릴로체의 숙소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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