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와 개혁을 위한 의제 27'은 지난해 가을 제17대 대통령선거가 우리 사회에서 보수 세력과 진보 세력 사이의 생산적인 정책 경쟁의 장(場)이 되기를 바라고, 그 장에서 진보와 개혁 세력을 위한 정책들을 제안하기 위해 모인 연구자들의 모임입니다.
이번 대선의 결과 보수 세력이 앞으로 5년 동안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에 우리는 새롭게 정부를 담당할 보수 세력이 이 나라를 잘 이끌어가기를 마음 속으로 바라마지 않아 왔습니다. 민주주의의 기본은 선거라는 경쟁에 기반한 절차에 있으며, 이 절차는 우선적으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 우리들의 생각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최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활동에 대해 우리의 의견을 표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인수위가 마련한 정부조직 개편안이 우리 민주주의를 후퇴시킬 수도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다름 아닌 국가인권위원회의 위상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판단하건대 현재 인수위가 제시한 정부조직 개편안은 이명박 당선인이 대선 공약으로 내건 '작은 정부, 큰 시장'을 지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정부와 시장에 대해서는 보수와 진보가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보수도 나름대로의 논리와 철학을 갖고 있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권은 보수와 진보의 영역을 넘어서는 자리에 위치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느 나라이건 선거를 통해 어떤 세력이 정부를 담당하게 되더라도 인권은 민주주의의 소중한 가치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헌법에 규정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를 내걸어 인권위를 대통령 직속에 두려는 것은 결코 옳은 방향이 아닙니다. 인권위는 지난 2001년 당시 여당과 야당, 그리고 시민사회의 다양한 의견들을 모아서 행정·입법·사법부의 밖에 세워두기로 한 것입니다. 인권위가 어느 하나에 귀속될 경우 불가피하게 그 조직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그럴 경우 인권위의 활동이 작지 않게 위축될 것은 너무나도 명확합니다.
우리에게 더욱 우려를 갖게 하는 것은 인권위에 대한 한나라당의 태도입니다. 며칠 전 한나라당은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나치게 권력층의 코드에 맞추느라 보편적인 인류의 인권 개념을 실천하는 역할보다 정권의 시녀 노릇을 충실하게 해'왔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였습니다. 그 동안 인권위는 비정규직 법안 반대, 이라크전 파병 반대에서 볼 수 있듯이 정부 정책에 맞서서 사회적 약자들의 인권을 보호하고 국제 평화를 증진하기 위해 헌신해 왔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도 지난 7년 동안 인권위의 활동이 전적으로 옳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인권위의 소극적인 태도에 대해서 아쉬움이 없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한 두 가지 사례로 인권위의 활동 전체를 평가하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가 갖는 우려는 인권위의 활동이 혹시 정부 정책에 발목을 잡을지도 모른다는 정치논리로 인수위가 인권위의 위상에 접근하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인권위를 대통령 직속으로 두려는 것이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인권위의 태도에 있다기보다 비정규직 법안 반대나 이라크전 파병 반대와 같은 인권위의 활동을 제한하려는 의도에 있다고 우리는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정치논리로 인권을 접근하게 될 때 인권위의 활동은 자연 제한받을 수밖에 없으며, 이는 결국 우리 민주주의를 후퇴시킬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목표는 무엇보다 인권을 보호하고 신장하는 데 있습니다. 인권위는 사회적 약자들의 인권을 보호하고 증진하기 위한 조직이며, 바로 이 점에서 우리 민주화 과정의 소중한 성취이자 최후의 거점이기도 합니다. 인권위가 자유롭게 활동하기 위해서는 어떤 권력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기본 조건입니다. 따라서 인권위의 독립성은 당연히 유지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곧 출범할 이명박 정부가 국민의 선택에 의해 선출된 민주정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민주정부라면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최우선의 자리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점에서 인권위를 대통령 직속으로 두려는 안을 인수위는 가능한 빨리 거두어 들여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명박 당선인과 인수위는 우리의 목소리에 잠시라도 귀를 기울여주시길 바랍니다.
2008년 1월 29일
진보와 개혁을 위한 의제 27
고원(서울대, 정치학), 김근식(경남대, 정치학), 김연철(고려대, 정치학), 김영범(한림대, 사회학), 김윤태(명지대, 사회학), 김정훈(성공회대, 사회학), 김종걸(한양대, 경제학), 김태일(영남대, 정치학), 김하수(연세대, 국어국문학), 김호균(명지대, 경제학), 김호기(연세대, 사회학), 문진영(서강대, 사회복지학), 박용수(서강대, 정치학), 박은홍(성공회대, 정치학), 박준식(한림대, 사회학), 서동만(상지대, 정치학), 서보혁(이화여대, 정치학), 손혁재(경기대, 정치학), 안병진(경희사이버대, 정치학), 오현철(전북대, 정치학), 이상이(제주대, 예방의학), 이태수(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 사회복지학), 조현옥(이화여대, 정치학), 정상호(한양대, 정치학), 정해구(성공회대, 정치학), 최태욱(한림대, 정치학) 홍종학(경원대,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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