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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식 '교육자율화', 부메랑은 시간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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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이명박식 '교육자율화', 부메랑은 시간문제

[기자의 눈]'사교육비 절감' 위한 구체적 계획은 뭔가?

어떤 이들은 이명박 당선인 측의 교육정책을 '재앙'으로 여긴다.

'5·31교육개혁안' 주역들, 전면에 나서다

'대입 자율화', '자립형 사립고 100곳 설립' 등의 공약이 낳을 부작용에 대한 걱정이 일차적인 이유다. 하지만 그 배경에는 김영삼 정부가 지난 1995년 5·31교육개혁안을 내놓으면서 확산된 교육시장화 흐름이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지속돼 왔고, 이번 대선 결과를 통해 보다 견고하게 굳어지게 됐다는 인식이 놓여있다.
▲ 이주호 한나라당 의원(사진 위)과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 (사진 아래). 이들 두 사람은 1995년 5·31교육개혁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공교롭게도 모두 미국 코넬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연합뉴스

13년 전, 5·31교육개혁안을 마련한 실무 주역이었던 이주호 한나라당 의원이 이 당선인의 교육정책을 사실상 기획했다는 점, 차기 정부의 정책 방향에 상당한 영향을 줄 인물로 꼽히는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이 1995년 당시 청와대 정책기획 수석을 맡아 5·31교육개혁안의 밑그림을 그렸다는 점 등이 이런 인식을 뒷받침한다.

이명박 당선인 측은 교육 공약에서 '자율'의 원리를 거듭 강조했다. 얼핏 새롭게 보이지만 그 내용은 사실상 5·31교육개혁안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5·31교육개혁안 전체를 흐르는 원리가 자율성 확대, 수요자 중심 교육, 아래로의 권한 이양 등이다. 학교운영위원회 도입부터 7차교육과정 마련, 최근 논란이 된 교원평가까지 모두 5·31교육개혁안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당선인의 교육 공약은 과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속도를 조절하면서 추진해 왔던 5·31교육개혁안의 내용을 보다 전면화한 것에 가깝다.

따라서 어떤 이들에게는 '재앙'으로 다가오는 이명박 당선인의 교육 공약은 또 다른 이들에게는 1995년 이후 진행돼 온 일련의 '교육개혁의 완결판'으로 받아들여진다.

"자율과 규제가 부딪히면, 승부는 뻔하다"

그래서 지난 13년 동안, 5·31교육개혁안에 대한 입장은 교육계 안팎에서 꾸준히 논란이 돼 왔다. 일각에서는 "표면적으로 자율을 내세웠으나, 사실상 시장원리를 전면화한 신자유주의적 개혁에 불과하다"라는 주장이 나왔다. 또 다른 일각에서는 "교육 양극화 등의 부작용을 경계하되, 경직된 교육현장에 자율성을 불어넣을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이런 논란은 대중의 참여를 유도하는 폭넓은 논쟁이 될 수 없었다. 이유가 뭘까? 물론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그런데 지난 11일, 교육개혁시민운동연대가 서울 영등포구에 있는 전교조 사무실에서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 분석'이라는 주제로 마련한 토론회에 참가한 장수명 한국교원대 교수가 이런 질문에 대한 힌트가 될 수 있는 말을 했다. 이날 토론을 마친 뒤, 이어진 정리 발언 순서에서 장 교수는 "자율과 규제가 부딪히면 (자율을 비판하는 측이) 무조건 진다"라고 말했다.

사실상 시장원리를 전면화하는 것에 다름 아닌 정책을 '자율'이라는 명분으로 추진할 경우, 이를 비판하는 측의 주장은 마치 권위적인 규제를 옹호하는 것처럼 비치는 탓에 대중적인 지지를 받을 수 없다는 뜻이다. 요컨대 한쪽이 일방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는 구도가 이미 짜여 졌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토론이 이뤄질 수 없는 게 당연하다.

"'프레임'을 선점하면, 무조건 이긴다"

낯선 주장은 아니다. 정책을 관통하는 원리를 대표하는 단어의 어감이 정책에 대한 대중의 선호도를 결정하는 사례는 흔하다. 이를테면 세금을 줄이는 정책은 복지의 축소로 이어져 가난한 사람들에게 불리하지만, 미국 공화당이 같은 정책을 '세금 구제(tax relief)'라는 용어로 포장하자 오히려 빈민들이 지지하고 나섰다.
▲ 조지 레이코프의 책.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프레시안

이런 역설적인 상황이 가능한 이유로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의 저자 조지 레이코프는 '프레임'을 꼽는다. 프레임은 '생각의 틀' 정도의 뜻으로 옮길 수 있는데, 사람들은 진실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기보다 자신의 프레임에 따라 왜곡해서 수용한다는 설명이다. 따라서 여론을 주도하려면 우선 대중의 프레임을 장악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고도로 전략적인 어휘 선택이 필수적이다. 스스로에게 불리한 정책도 친근한 프레임을 통해 수용하면 반감이 생기지 않는다. 미국 공화당은 '구제(relief)'처럼 긍정적인 어감의 단어를 사용해 사회적 약자에게 불리한 정책을 그들에게 친근한 프레임으로 전달할 수 있었다.

11일 토론회에서 나온 장 교수의 설명도 이와 유사한 맥락이다. 사실상 시장화 정책에 해당하는 내용이라도, 그것을 '자율'이라는 단어로 포장하는 순간 반대하기 힘들어진다는 뜻이다. '자율'이라는 단어를 선점한 측이 반대편에게 낡고 권위적인 이미지를 덧씌우는 것은 쉽다. '자율'을 먼저 내건 측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프레임을 확보하는 셈이다.

5·31교육개혁안에 대한 입장 역시 마찬가지다. 교육의 지나친 시장화에 반대하느라 5·31교육개혁안에 비판적이었던 이들은 아예 설 자리가 없었다. 5·31교육개혁안의 긍정적인 측면을 조심스레 검토했던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은 국가기구의 권위적인 규제에는 반대하지만, 맹목적인 시장화를 찬성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이들은 '자율'과 '규제'의 이분 구도에서는 설 자리가 없었다. (☞ 관련 기사 : "획일적인 교육통제 반대가 꼭 평준화 해체론은 아니다")

'프레임의 우위'가 '정책의 질'까지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지난 13년 동안 교육정책의 주요 방향타 역할을 해 왔던 5·31교육개혁안에 대한 차분한 토론이 이뤄지기 힘들었던 것은 그래서였다. 5·31교육개혁안의 주역들이 마련한 이명박 교육정책에 대한 토론 역시 마찬가지다. 5·31교육개혁안의 주역들이 일방적으로 유리한 프레임을 확보했고, 이와 다른 입장은 아예 들어설 자리가 없었던 것.

그리고 이명박 당선인 측은 이런 유리한 구도를 잘 알고 있다. 새 정부의 교육정책이 낳을 위험을 지적하는 이들을 향해 "자율에 역행하는 규제 옹호론"이라고 못박는 것만으로도 당선인 측은 논쟁을 제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프레임의 우위가 정책의 질까지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세금 구제'라는 달콤한 표현으로 복지 축소의 위험을 감추는 데는 한계가 있다. 마찬가지로 '학교의 다양화', '대학의 자율적 학생 선발권 확대'라는 좋은 어감의 표현으로 '학교의 서열화', '중등 교육의 왜곡 심화' 등의 위험을 덮어두는 것은 한시적일 수밖에 없다.

입시 경쟁이 여전한 상태에서 '학교의 다양화'라는 명분으로 자율형 사립고를 대폭 증설할 경우, 학교들이 입시 점수에 따라 서열화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처럼 '수평적 다양화'가 아닌 '수직적 서열화'가 이뤄진다면, '학교의 다양성'은 별 의미가 없게 된다. 오히려 입시 성과라는 획일적인 척도에 따른 평가만 강화되는 결과만 낳을 뿐이다. 이미 많은 이들이 이런 예상을 하고 있다. 대선 이후 들썩이는 사교육업체 관련 주식 가격이 그 증거다.

최근 수능 물리 문제의 오답 사태로 큰 혼란을 겪었던 학생과 학부모들이 '대학의 자율적 학생 선발권'이라는 표현 뒤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을 깨닫는 것 역시 시간문제다. "국가가 엄정한 절차를 거쳐 치르는 시험에서도 말썽이 생기는데, 입시를 개별 대학에 맡긴다면…"하는 생각을 누구나 할 수 밖에 없다. 더구나 최근 불거진 연세대 편입 비리 등은 이런 위험을 보다 생생하게 일깨워 준다.

"입시 자율화로 사교육비 줄인다"…그게 가능한가?
▲ 이명박 당선인은 14일 기자회견에서 "대학에 자율을 줘도 본고사는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이런 상황은 5·31교육개혁안의 주역들이 마련한 이명박 당선인의 교육정책이 언제라도 여론의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하지만 당선인에게서 역풍을 불안해하는 기색은 찾기 힘들다. 이명박 당선인은 14일 기자회견에서 사교육비를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기존 공약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밝혔다. 당시 이 당선인은 "입시 자율화, 자율형 사립고 100개 건설 등 사교육비 증가에 대한 우려가 있다"는 지적에 대해 "새로운 정부의 교육 정책에 대해 학부모들이 '사교육비 든다'고 걱정하는데 전국에 계신 초중고 1년~2년생 학부모는 과거보다는 수월한 제도가 된다"라고 대답했다. "대학에 자율화를 주면 학생의 부담이 준다"라고도 했다.

하지만 대답 내용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입시 자율화'가 학생과 학부모의 부담을 덜어주는 더 '수월한 제도'인 이유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은 찾기 힘들다.

게다가 당선인은 이날 "대학에 자율을 줘도 본고사는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지만, 이보다 앞선 지난 11일 치러진 서울대 자연계 통합 논술 문제는 사실상 본고사와 다름없었다. 그리고 당선인은 물론 인수위 역시 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스스로의 발언을 부정하는 모순된 태도다.

11일 치러진 서울대 논술 문제를 접한 수험생들은 대개 "학교에서 접하지 못했던 유형이라 몹시 낯설었고, 당황스러웠다"라고 대답했다. 올해 입시에서 이처럼 본고사를 연상케하는 논술 문제가 출제된 것은 서울대만이 아니다. 고려대, 서강대 등 사립대학들도 이와 비슷했다.

대학 신입생을 뽑는 시험 문제의 바람직한 수준과 유형에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수험생들이 "학교 수업만으로는 대학입시를 준비하기에 부족하다"라는 느낌을 받았다면, 그리고 이런 느낌이 확산된다면 사교육에 기대는 경향이 더 심화되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렇게 될 경우, 사교육비 부담이 더 늘어나리라는 점 역시 분명하다.

'자율화'가 만능인가?

하지만 당선인 측은 '대입 자율화'만을 되뇔 뿐이다. 대학들이 교육당국의 논술 가이드 라인을 무시하고, 사실상 본고사를 실시해도 아무런 말이 없다. 그러면서 "대학에 자율을 줘도 본고사는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런 말을 들으면 누구나 헷갈릴 수 밖에 없다. 명쾌한 논리를 중시하는 기업인 출신 답지 않다.

당선인은 인수위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국장급 공무원이 한두 시간이면 작성할 수 있는 보고서"를 제출했다며 꾸짖었다. 인수위 보고 내용에 구체적인 자료와 치밀한 논리, 폭넓은 시야가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아마도 타당한 지적이겠지만, 14일 회견 내용을 보면 당선인이 이런 발언을 할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13년 전, 5·31교육개혁안을 마련했던 주역들이 모인 인수위는 이제라도 당선인에게 보다 치밀한 논리와 자료를 제공해야 한다. 그래서 "대학 입시가 자율화되는데, 왜 본고사가 부활하지 않으리라고 보는지", "대입 자율화와 사교육비를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공약이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지"에 대해 논리적인 설명을 해야 한다. 대선 이후 오름세를 띠고 있는 사교육업체의 주가에서 드러나듯 시장은 차기 정부가 사교육을 부추기는 정책을 취하리라고 믿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사교육비를 절반으로 줄이는 게 가능하다고 믿는다면 그 방법을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너무 쉬운 승리', 국민이 언제까지 용인할까

여기에 실패할 경우, '프레임'의 우위를 통해 거둔 '너무 쉬운 승리'는 금세 허물어질 수 밖에 없다. 비록 '묻지마 지지'를 한 유권자들이지만, 그들은 정치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더 똑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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