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근과 회식 거부하면 "사회 생활 할 줄 모른다"라고?
그런데 물고기에 대해 적용되는 당연한 이치가, 사람에게는 잘 적용되지 않는다. 순진하게만 살아가려는 사람은 사회에서 종종 손해를 입는다. 신입사원이 학교에서 배운 대로 고지식하게만 행동하면 '개념 없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듣곤 한다. 신입사원이 일을 배우는 것과 직장의 불합리한 관행에 적응하는 것 사이의 경계가 모호한 경우도 많다.
불필요한 야근, 권위적인 회식 문화를 거부하는 사람에게 '사회 생활 할 줄 모르는 녀석'이라는 꼬리표를 다는 게 옳은 일일까. 아니면 이런 거부의 표현을 계기로 기존의 관행을 반성하고, 개선할 점을 찾는 게 옳은 일일까. 물고기의 경우에는 후자를 지지하던 이들이 사람에 대해서는 전자를 적용하는 것을 자주 본다.
부산교통공사 시설사업소 토목건축보수팀에서 일하는 김욱 씨는 이런 현실이 몹시 안타깝다. 그가 보기에 한국의 직장 가운데 상당수는 학교를 갓 졸업한 순진한 청년들에게 상처를 주는 곳이다. "원칙과 다른 현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곳"이어서다. 하지만 그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원칙과 다른 현실은 원칙에 가깝게 바뀌어야 할 현실일 뿐이다.
그런데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누구나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 그리고 그 상처는 학교에서 배운 원칙을 소중히 여기는 순진한 이들에게 더 크다.
그가 말하는 원칙은 거창한 게 아니다. 사람이 일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일이 사람을 위해 이뤄져야 한다는 것. 그래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방식으로 일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이런 원칙에 비춰볼 때, 한국 일터에 만연한 지나친 야근 문화는 잘못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IT맨의 사직서'…누리꾼들의 폭발적 반응
이런 생각으로 그는 온라인 공간에 '야근NO'라는 커뮤니티(http://cafe.daum.net/yageunno)를 운영하고 있다. 야근에 시달리는 직장인들을 위한 공간이다. '야근NO' 커뮤니티의 목적은 피로에 지친 이들을 위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외국과 비교해도, 유독 잦은 야근의 원인을 분석하고, 대안을 찾는 곳이다. 더불어 야근을 없애기 위한 캠페인을 전개하는 곳이기도 하다.
김 씨는 지하철 관련 시설을 점검하는 일을 한다. 일상에서 그는 조용한 사람이다. 하지만 컴퓨터를 켜면 그는 화제를 주도하는 사람이 된다. '커서'라는 아이디가 온라인 공간에서 통하는 그의 이름이다. '미디어다음'에 있는 '블로거 뉴스'란에 '커서'가 올린 글은 여러 차례 화제가 됐다. 대표적인 게 'IT맨, 내가 사직서를 쓴 이유'라는 글(☞내용 보기)이다. 역시 '야근'에 관한 내용이다.
정보통신 관련 개발자들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다룬 이 글이 포털 사이트에 실리자, 순식간에 1000개에 가까운 댓글이 달렸다. 독자 수도 10만 명을 훌쩍 넘었다. 독자들은 그의 글을 읽고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자신의 블로그에 옮기고, 자신이 속한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 복사했다. 이렇게 '퍼간' 글은 다시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관련 댓글 모음 보기)
그가 쓴 글에 대한 누리꾼들의 반응은 '공감'이라는 표현으로 요약된다. 정보통신 관련 개발자들의 현실을 생생하게 담아냈다는 것. 슬쩍 머리를 스치고 간 생각을 옮긴 글은 이런 반응을 끌어낼 수 없다. 그는 사람을 만나고, 자료를 뒤져서 글을 쓴다. 온라인 공간에서 알게 된 이들에게 '인터뷰 신청'도 한다. 어느새 취재와 인터뷰의 요령도 제법 쌓였다. 그렇다. 그는 '기자'다. 본업은 따로 있지만, 취재 열정은 월급 받는 기자에 뒤지지 않는 블로거 기자.
'기자'로서 그의 최근 관심사는 '야근을 당연시하는 기업 문화를 바꾸는 것'다. 13년 전, 한 제약회사 영업직으로 취업했을 때부터 품었던 생각이기도 하다.
이런 그의 관심사, 그리고 활동은 "사람이 소중한 일터를 만들자"라는 <프레시안>의 기획의도와도 겹친다. 그래서 지난주 추석 연휴가 시작되기 직전인 지난 20일, 그를 만났다.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진 두 기자가 서울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나눈 대화를 글로 옮겼다.
학교에서 배운 원칙을 말하면, "개념 없다"는 꾸중
<프레시안> : 'IT맨, 내가 사직서를 쓴 이유'라는 글을 한 포털 사이트에서 읽었다. 업무 강도가 센 민간 기업에 다니는 사람이 쓴 글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명함을 보니 공기업 직원이라서 좀 놀랐다.
김욱 : 현 직장은 출퇴근 시간을 정확히 지키는 곳이다. 내가 쓴 기사에 등장한 사례들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하지만 불필요한 야근을 당연시하는 문화는 이미 체험했다.
대학을 졸업한 직후인 13년 전, 한 제약업체 영업직으로 입사했다. 8개월 간 일한 그곳에서 참 많은 상처를 입었다.
영업 업무라는 게, 교과서적인 원칙대로 일이 진행되지만은 않으리라는 것쯤은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겪어보니 불합리한 관행이 너무 많았다.
거래처와의 관계뿐 아니라 직장 내에서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실적을 위해서라면, 모든 게 용인되는 분위기였다. 동시에 이런 분위기는 실적에 대한 강한 압박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원칙을 이야기하면 '개념 없다'는 꾸중이 돌아왔다. 학교에서는 인권에 부합하는 가치, 공정하고 합리적인 원칙을 가르친다. 그런데 직장에서는 그것을 부정하도록 강요한다.
학교에서 배운 원칙과 가치를 빨리 잊어버려야 '사회 생활에 적응을 잘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런 현실이 참 싫었다. 그래서 미련 없이 회사를 그만뒀다.
"퇴근 시간은 왜 정했나"…"10년 뒤 자화상 떠올리니, 아찔했다"
두 번째 직장은 제조업체였다. 그곳에서 영업관리 업무를 맡았다. 첫 직장보다는 업무 관행이 조금 더 합리적이었지만, 불필요한 야근을 강요하는 것은 여전했다. 밀린 수금을 하는 시기가 되면 돈이 들어올 때까지 퇴근하지 말라며 붙잡아두곤 했다.
또 일이 마무리돼도 상사가 퇴근하기 전에는 자리를 뜨기 힘든 분위기였다. 회사의 공식적인 업무 시간은 오후 6시까지였다. 하지만 이런 공식적인 지침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공식적인 지침 따로, 현실 따로'인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문화가 참 싫었다. 그럴 거면, 업무 개시 시간과 종료 시간을 왜 정하는가.
이런 문화 속에서 원칙을 지키려는 사람은 종종 바보 취급당한다. 당장은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10년 뒤에도 이렇게 살아야 하나'라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순간,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10년 뒤에 그리게 될 미래는 더욱 암울하리라는 생각만 들었다. 10년 뒤 겪을 현실은 더 괴로울 게 분명해 보였다. 결국 두 번째 직장에도 사표를 냈다.
회사 문을 나서면서, 아무래도 공공 부문은 민간기업보다는 상대적으로 원칙이 존중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대학 전공과도 좀 동떨어진 분야지만, 현재의 직장에 지원했다. 적어도 내가 하는 일만 놓고 보면, 현 직장에서는 원칙이 존중받는 편이다. 노동조합이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어서, 문제가 생기면 기댈 곳도 있는 셈이다. 현 직장에 10년째 다니고 있는데, 대체로 만족스럽다.
하지만 다른 직장에 다니는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직도 많은 기업들은 10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문화를 갖고 있는 듯하다. 외국에서는 야근을 자주하면 무능한 사람으로 찍힌다는데, 한국에서는 야전침대 놓고 일하면 영웅 취급한다. 또 부하직원이 퇴근 후에 어떤 계획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야근하도록 지시하는 상사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런 상황이 변할 때까지, '야근NO' 커뮤니티의 활동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융통성'이 최고의 능력으로 통하는 사회
<프레시안> : 이야기를 듣다보니, 한국은 고지식한 사람이 살기에 참 힘든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은 소위 '정치력'과 수완이 뛰어나고, 인맥이 넓은 사람에게는 참 살기 좋은 곳인 듯하다. 반면 사소한 원칙을 엄격히 지키는, 그래서 좀 고지식해보이는 이들은 '융통성이 없다'며 평가절하 하는 분위기다.
김욱 : 우리처럼 '융통성'을 강조하는 사회가 또 있을까 싶다. 사소한 규칙이나 원칙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은 물론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융통성' 자체가 중요한 능력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뛰어난 기술력을 가진 인재가 단지 조금 고지식하다는 이유로 아예 무능력자 취급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아무런 전문성도 없으면서, 단지 둥글둥글한 '융통성'만을 가진 사람은 뛰어난 인재로 대우받는다.
이런 사회에서 누가 열심히 공부하고, 실력을 쌓겠는가. 경쟁력이 떨어지는 게 당연하다. 그리고 이렇게 떨어진 경쟁력을 만회하기 위해, 회사는 다시 직원들을 쥐어짠다.
일을 찾아서 하라고?…합리적 시스템 마련이 우선
미국에 있는 지인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있다. 뉴욕의 한 공원에 갔는데, 바닥 곳곳에 휴지가 떨어져 있는 게 눈에 띄었다. 마침 청소부가 지나가기에, 휴지를 가리키며 좀 치워달라고 부탁했다. 그랬더니 정말 손으로 가리킨 그 휴지만 짚어서 버리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들려준 지인은 "미국 사람들은 융통성이 없어서 답답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좀 다른 생각을 했다. 그 청소부의 답답한 태도를 옹호하겠다는 게 아니다. 융통성 없는 사회란 뒤집어 말하면 시스템과 매뉴얼이 잘 갖춰진 사회를 뜻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그리고 시스템과 매뉴얼을 마련하는 것은 어느 사회, 어느 조직에서건 윗사람의 몫이다. 그런데 한국처럼 아랫사람에게까지 융통성을 강조하는 사회는 윗사람들이 제 역할을 하지 않는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회사에서 신입사원이 흔히 듣는 이야기 중 하나가 "일을 찾아서 하라"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왜 곧이곧대로 시키는 일만 하느냐. 알아서 일을 찾으라"며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질책하기도 한다. 나는 사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랫사람이 어떤 일을 해야 할지조차 모르게끔 방치한 윗사람이 오히려 야단을 맞아야 하는 것 아닌가.
자신도 야근이 싫을텐데, 왜 남에겐 야근 강요하나
<프레시안> : 일터의 불합리한 관행에 대해 오래 전부터 고민해 온 듯하다. 이런 고민을 갑자기 글로 담아내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김욱 : 올해 상반기에 금융노조가 은행창구 업무를 오후 3시 30분에 마감하도록 요구할 방침이라는 보도가 나온 적이 있다. 그때 여론의 반발이 엄청났다.
하지만 나는 이런 반발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은행창구 업무 마감시간을 조금 앞당겨서 은행원들의 야근 횟수가 줄면 좋은 일 아닌가. 은행창구 업무 시간을 앞당기지 말라는 요구는 사실 은행원들이 지금처럼 계속 야근을 하라는 주장과 마찬가지다.
아마 은행창구 업무 마감 시간을 늦추도록 요구했던 이들도 자신이 야근을 하기를 원하지는 않았을 게다. 그런데 왜 왜 다른 사람들에게 비인간적인 야근을 강요할까. 이런 생각을 하니까, 마음이 답답해졌다.
그래서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비판하는 글을 써서 블로그(blog.daum.net/moveon21)에 실었다. 그리고 "당신은 야근을 얼마나 합니까"라는 질문을 글의 말미에 달았다.
이 글이 실리자, 다양한 이들에게서 메일이 쏟아졌다. 내용을 보고 나도 놀랐다. 거의 매일 야근에 시달리는 이들이 이렇게 많은 줄은 미처 몰랐었다.
특히 건설업과 정보통신 분야 종사자들이 메일을 많이 보냈다. 이들의 메일을 보고 야근에 관한 글을 썼다.(☞정보통신 분야 개발자 인터뷰 보기) 그리고 이 글이 포털 사이트에 소개되면서 폭발적인 호응이 일었다. 독자들의 댓글들은 한결같이 잦은 야근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일회성 지적으로 끝낼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온라인 공간에 '야근NO'라는 커뮤니티를 개설했다.
"삼성의 야근 문화가 궁금하다"
<프레시안> : <프레시안> 역시 비슷한 기획을 진행하고 있다. 사람을 일회용 소모품 취급하는 일터를 바꾸기 위한 기획이다. 일하는 사람의 건강과 사생활에 대한 배려 없이 무리한 야근을 강요하는 문화 역시 사람을 소모품 취급하는 태도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소모적인 야근 문화를 없애기 위해 앞으로 벌일 계획에 대해 듣고 싶다.
■ 기획 연재 <사람이 소중한 일터> ○"소주 한 병 들고, 찾아 오세요" ① 학교 급식 조리원 "지옥이죠. 그래도 이 일이 꼭 마약 같은 걸요" ②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노가다, CG 작업자 ③ 방송사 VJ들 "우리는 언제까지 '걔네들'인가요?" ④ 4대보험도 적용 못 받는 '자랑스러운 얼굴'? ○ 독자의 목소리 - "우리 아들은 노예가 아니다" - 외국인 동료가 한국 회사에서 놀란 이유 |
김욱 : <프레시안>에 실린 기사를 보고 무척 공감했다.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많이 만들고 싶다. 한국의 대표적인 재벌기업 중 하나를 골라서 야근 실태를 조사할 계획이다. 그리고 그 결과를 블로그를 통해 알리고 싶다. 야근을 얼마나 자주 하는지, 야근 수당을 제대로 지급하는지 등에 대해 조사하려고 한다.
삼성전자를 상대로 조사할 계획을 세웠는데, 솔직히 부담스럽다. 우리 사회에서 평범한 개인이 삼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 겁이 안 난다면 아마 거짓말일 게다. 그래서 좀 망설여지기도 하고, 또 조사가 쉽지 않을 것 같아서 막막하기도 하다.
왜 우리는 고통을 파는 산업만 키울까
야근 문화를 자꾸 문제 삼는 이유는 내가 과거에 겪었던 것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물려주고 싶어서다. 스페인 사람들은 오후 네 시쯤 퇴근해서 축구를 본다고 들었다. 그리고 이처럼 많은 여가 시간이 스포츠 등 문화 산업을 키우는 밑거름이 됐다.
지금 서울이나 부산 거리에 나가 보라. 학원 간판이 눈에 안 띄는 곳을 찾기 힘들다. 스페인의 풍부한 여가 시간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산업을 키웠다. 불합리한 업무 관행과 무리한 야근 문화에 길들여진 우리는 학원 산업만 키웠다. 입시 문제 풀이 요령을 가르치는 학원이 과연 누구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나. 아이들을 괴롭히기만 할 뿐이다. 그리고 불행을 가속화시키는 경쟁으로 내몰 뿐이다. 아이와 부모들에게 고통만 안겨주는 대가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없다. 입시 문제 풀이 요령을 수출할 수도 없지 않나.
왜 어떤 사회는 즐거움을 파는 산업을 키우고, 또 어떤 사회는 사람을 쥐어짜는 산업을 살찌우게 됐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불합리한 직장 문화를 묵인하도록 강요당한 것도 한 원인이라고 본다. 원칙이 무시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스스로를 쥐어짜는 게 버릇이 되니까 남을 괴롭히면서도 별 가책을 못 느낀다. 그래서 더 많은 고통을 낳기 위한 경쟁으로만 내몰리게 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실력 경쟁 대신 눈치 경쟁만 팽배한 곳
물론 어느 사회건 경쟁은 있다. 그리고 경쟁이 있는 이상, 일하는 게 마냥 즐거울 수만은 없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는 원칙이 없는 경쟁이다. 원칙이 제대로 서 있는 사회에서는 더 좋은 물건을 만들기 위한 경쟁, 더 뛰어난 실력을 쌓기 위한 경쟁이 생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경쟁은 이런 게 아니다. '줄'을 잘 서기 위한 경쟁이 제일 치열하다. 원칙이 바로 선 사회에서라면 실력이 있고, 그래서 자신의 일을 제대로 처리한 직원은 윗사람이 아직 퇴근하지 않았어도 눈치 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다.
하지만 '줄'을 잘 서기 위한 경쟁이 다른 경쟁을 압도하는 사회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윗사람의 눈치를 봐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눈치 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서 마음의 여유가 생길 리 없다. 항상 불안하다. 그래서 자신을 괴롭히고, 남도 못살게 군다. 할 일이 없어도 책상을 떠나지 못하고, 자식에게 나가서 놀라는 말도 마음 편히 못 한다.
"'순진하면 손해 본다'고 가르치는 사회, 과연 정상인가?"
야근을 없애려는 노력은 이런 사회 구조를 바꾸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물론 이렇게 이야기하면 흔히 돌아오는 대답이 '순진한 소리'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순진하게 살면 손해 보는 곳이다"라고 충고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되묻고 싶다. "'순진하면 손해 본다'고 가르치는 사회가 과연 정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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