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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달 따니까, '원숭이'로 만들어 '사업화'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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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달 따니까, '원숭이'로 만들어 '사업화'했어요"

[인권오름]시설에서 나와 자립을 꿈꾸는 명훈, 희진 씨

풍성한 음식이 있는 추석은 한해 농사의 결실을 즐기는 자리다. 하지만 지금은 흩어진 가족이 한데 모이는 자리로서의 의미가 더 강하다. 농경문화의 유산인 추석을 도시문화에 익숙한 우리가 챙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이처럼 흩어진 가족들의 만남이 강조될 수록 마음이 허전해지는 이들이 있다. 여러 이유로 가족과 떨어져 지낼 수 밖에 없는 이들이다. 하지만 군 입대, 유학, 등의 이유로 떨어져 지내는 이들은 대개 일정 기간이 지나면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이들이 있다. 장애인 시설에서 지내는 이들이다. 한 번 들어가면, 나오기 쉽지 않다. 처음 들어갈 때부터 아예 가족과의 생이별을 각오하는 경우도 많다. 이처럼 가족과 떨어져 있다는 점을 시설 측이 악용하는 경우도 많다. 특히 정부가 장애인에게 지원하는 장애 수당을 시설 측이 횡령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지난 6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시설비리 척결과 탈시설권리 쟁취를 위한 결의대회'에 참가한 장애인들의 증언은 그래서 절규에 가까웠다. 장애인 시설에서 20년을 지냈다는 한 참가자는 당시 집회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본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도대체 인터넷이라는 게 무엇인지 구경이라도 한 번 하게 해달라"는 요구가 시설 측에 무참하게 거절당했던 사연도 이야기했다. 시설 수용자들에게 바깥 소식은 알 필요도 없고, 알아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장애수당'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는 시설 수용 장애인들의 사연은 이런 상황에서 당연한 것이었다. 이처럼 외부와 철저하게 격리된 공간이었던 장애인 시설은 그래서 오랫동안 인권의 사각지대로 방치돼 왔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거치며 군대, 교도소 등의 인권 상황은 다소 개선됐지만, 장애인 시설의 인권 상황은 변한 게 거의 없다. 장애인을 시설에 맡긴 가족들도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아예 포기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저 문제만 일으키지 않았으면"하고 넘어가는 것이다.

가족의 포기, 장애인 당사자의 좌절, 시설 측의 태만과 탐욕이 맞물린 결과가 지금처럼 열악한 시설 인권 상황이다. 이 가운데 한 가지만 바뀌어도, 장애인 시설의 열악한 인권 상황은 나아질 수 있다. 인권운동사랑방 자원활동가 장윤미 씨가 좌절감에서 벗어나 시설 밖에서의 삶을 적극적으로 개척하고 있는 이들을 만났다. "장애인은 자립 생활을 할 수 없다"는 편견, "그래서 인격을 침해하는 장애인 시설에서 참고 지내야 한다"는 자포자기의 정서를 모두 극복한 경우다.

다음은 시설에서 나와 자립에 성공한 안명훈 씨와 길희진 씨를 만난 장윤미 씨가 "꿈을 펼치기 시작하는 곳"이라는 제목으로 쓴 글이다. 명훈 씨와 희진 씨의 자립에는 민들레 장애인 야학의 도움도 큰 역할을 했다. <편집자>

"횡단보도로 가세요, 위험해요."
"인도로 갈 낮은 문턱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어요, 괜찮아요."


인천의 민들레 장애인야학을 찾아가는 길, 마중 나온 장애인 분을 뒤따라가던 나는 불안한 마음에 말을 건넸다. 사람이 다니는 '인도'로 올라가지 못하고 도로변을 휠체어로 가는 그 분의 모습을 보면서, 장애인이 다니기 불편한 인도가 과연 사람을 위한 길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누군가는 아무렇지 않게 이동하지만 누군가는 한발자국 떼기도 힘들다. 이처럼 장애인들 중에는 아직까지 세상에 발조차 떼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장애인 시설은 창살 없는 감옥"

하지만 여기 스스로 자신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중증장애인 두 명이 있다. 바로 안명훈 씨와 길희진 씨. 인천 민들레 장애인야학에서 그들을 만났다.

희진 씨와 명훈 씨는 현재 살고 있는 집으로 나오기 전에 장애인 시설에서 생활했다. 현재 희진 씨는 장애인 시설에서 나온 지 6개월, 명훈 씨는 1년이 지났다.

"시설은 창살 없는 감옥과 같았어요. 시내와도 멀리 떨어져 있어 사람들도 잘 오가지 않는데다, 밖으로 나가면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 준다고 몇 미터 내보내주지도 않았습니다. 세상에 대한, 사람에 대한 목마름이 항상 있었습니다."

시설에 있을 때 명훈 씨와 희진 씨는 보치아 장애인 국가대표 선수였다. 하지만 시설에 있을 때는 그러한 사실이 오히려 그들을 괴롭게 했다.

국가대표 선수였다는 사실이 족쇄가 됐다

"저희가 메달 따고 주목을 받게 되니까 저희들을 사업화시켰어요. 후원받으려는 목적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스트레스 너무 많이 받았어요.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반강제적으로 시키는 일들이 너무 많아서 저희들이 마치 동물원 원숭이가 된 기분이었어요."

그들에게 시설이란 곳은 자기 의지대로 할 수 없는 곳이었다. 장애인 시설은 '사회복귀를 준비하거나 장기간 요양한다'는 명분으로 지어졌지만 오히려 장애인들을 사회에서 배제된 사람들로 규정하고 억압했다.

그래서 이들에겐 주체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환경이 더욱 절실했다. 그런 회의 속에서 명훈 씨와 희진 씨는 좀 더 자유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고자 마음먹었다.

"아직 두렵지만 자립에 대한 후회는 없어요"

보치아 종목에서 올림픽 메달을 따게 된 명훈 씨는 한달에 80만원이라는 연금을 받게 되었다. 그 앞으로 꼬박꼬박 돈이 들어오자, 그는 기회다 싶어 자립을 결심하게 했다.
▲ 뇌병변 1급 장애인인 안명훈 씨는 메달을 딴 연금을 모아 지금의 집을 마련했다. 하지만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혼자 집안일을 하기 힘들다. ⓒ인권오름

시설에서 나오고 처음엔 가족과 함께 지내면서 가끔 외출을 했고 지금의 민들레 야학 대표님을 만나 투쟁에도 나갔다. 그러면서 세상이 장애인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를 깨달아갔다. 하지만 집에 있는 시간은 편하지 못했다. 가족들은 여전히 집에 박혀 있기를 강요하고 그가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혼자 독립했다.

"혼자 힘으로 자립한 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아직 여전히 두렵긴 합니다."

희진 씨는 명훈 씨 소개로 자립을 하게 됐다.

"처음에 명훈이한테 혼자 독립했다는 얘기를 듣고 어리둥절했습니다. 대체 혼자 나와서 어떻게 살아가는 건지. 하지만 지금은 내가 왜 이렇게 늦게야 자립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자립하게 돼서 뭐가 가장 좋으냐는 질문에 그녀는 "넓은 세상 돌아다니고, 사람도 많이 만나고, 내가 세상을 바꾸고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것"을 꼽았다.
▲ 포즈를 취해달라는 말에 부끄러워 하던 희진 씨. ⓒ인권오름

"장애인 시설에 있으면 모든 걸 알아서 해주니까 불편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혹여 자립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들도 이러한 이유로 포기하죠. 또 용기가 부족해서이기도 하죠.

하지만 더 큰 건 정보 부족입니다. 그 곳에서 나올 수가 없는 게 아니라 아는 게 없어서 못나오는 거죠."

휘청거린 자립과정

사회에 혼자 부딪쳐본 경험이 없던 장애인들에게 세상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맨 처음에는 대체 뭐부터 해야 할지를 몰랐어요. 그래서 쓸데없는 데에 가지고 있는 얼마 안되는 돈을 많이 낭비하기도 했습니다."

현재 명훈 씨는 차상위 계층에다 매달 연금 80만원을 받고 있어 정부로부터 장애인 수당은 받고 있지 않다.

연금 외에는 특별한 지원도 없던 그에게 지금 얻게 된 집은 행운이었다. 그의 집은 민들레 장애인야간학교가 있는 곳의 한켠에 위치한 한 칸짜리 방이다.

"사회에 나오고 운 좋게 만난 야학 대표님 덕에 지금 이 집을 얻게 됐습니다. 하지만 보증금은 없다 해도 월세가 40만원 이예요. 제 돈의 반이 집세로 들어가요. 돈을 아껴 쓰지 않으면 안 돼요."

하지만 최근에 그는 이 집에서도 쫓겨나게 되었다. 처음에 장애인이라고 집세도 깎아주고 이것저것 배려도 해주던 주인이 갑자기 이달 말까지 집에서 나가주기를 요청한 것이다.

처음엔 혼자 살던 명훈 씨가 희진 씨와 함께 살게 되고, 점점 장애인 친구들이 하나씩 몰려들자 건물 이미지에 손상이 간다는 이유였다. 주위 시민들이 싫어하고 장사도 잘 안될 거라는 건물 주인의 염려(?) 때문이다.

"집만 있다고 끝은 아니다"

자립 6개월차인 희진 씨는 수급권자라 이제 곧 영구임대아파트에 신청할 수 있는 자격이 된다. 하지만 신청했다고 해서 바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평균 10년을 대기하는 기약 없는 기다림인 것이다.

또 대기하고 있다 영구임대아파트에 들어가게 됐다 해도 문제다. 13평형에 머물려면 보증금 약200만원에 월세 4만원 정도를 내야하는데, 수급비를 쪼갠다 해도 월세를 꼬박꼬박 낼 수 있을 지가 걱정이란다. 중증장애인이라 몸을 가누기조차 힘든 그가 매달 정기적인 소득을 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문득 그들이 살고 있는 공간을 둘러보았다. 활동보조인 없이는 전혀 생활이 불가능한데다 방 안에 화장실도 갖춰져 있지 않아 불편하진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저희들에게 집은 분명 소중한 공간이에요. 제 꿈을 펼치기 시작하는 곳이죠. 하지만 집만 있다고 끝은 아닙니다. 지금 활동보조인이 저희들과 생활하는 시간은 한달에 180시간입니다. 그러면 하루에 6시간이인데, 턱없이 부족하죠. 그 외의 시간에 저희는 내팽개쳐 있는 거나 다름없어요. 청소도 밥도 전혀 할 수 없습니다."

"보시다시피 화장실이 외부에 있고 싱크대도 너무 높아서 저희들은 집 내부 시설을 이용할 수 없어요. 집을 개조하고 싶지만 집세보다 몇 배로 드는 개조공사에 돈을 쓸 형편도 못되고요."

곳곳의 어떤 시설을 이용할 때, 문을 통과하는 턱 하나조차 장애인들에겐 산이나 마찬가지다. 장애인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만들어지는 집은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 되지 못한다. 이럴 때 그들에겐 집이란 것이 '집'이 아닌 것이나 마찬가지다.

영구임대주택을 조금 늘린다고 장애인 주거권이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가진 장애로도 불편함이 없는 주거편의시설을 갖춘 주택을 쿼터제 등을 통해 사회가 확보해야 한다.

"공무원들이 탁상공론할 것이 아니라 직접 저희 같은 장애인 만나서 물어보고 당사자에 맞는 집을 마련했으면 좋겠습니다. 장애인 주거문제도 그냥 일정한 혜택을 준다고 끝나는 게 아니잖아요. 그 과정에서 장애인의 주거권이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부분은 없는지까지 섬세하게 고려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저희는 예산이 없으면, 그냥 이렇게 살아야 하는 존재인가요?"

"뉴스를 보면 정부는 항상 예산이 없다고 해요. 하지만 저희들이 예산이 없으면 그냥 이렇게 살아야 하는 존재인가요? 우리가 나가서 외치기 전에 세상이 우리를 위해서 먼저 바뀌어 주어야 하는 건 아닌가요?"

장애인들이 현재 외치는 불만의 목소리는 너무 절실한 생존의 문제이다.

꿈이 뭐냐는 질문에 수줍게 웃으며 대답하던 명훈 씨.

"시를 쓰고 싶어요. 그래서 여행하며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듣고 체험하고 싶습니다."

인터뷰를 끝내고 돌아가는 길 명훈 씨에게서 한 통의 문자가 왔다. 직접 쓴 시라며,

"사진 속에 미소 짓는 철부지 어린아이를 본다 지금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그때 꿈꾸었던 꿈들은 나를 버리고...난 지금 술을 마시며..한숨.."

절망이 담긴 듯한 시, 이제 그들의 꿈이 꿈으로만 멈춰있지 않길, 적어도 사회는 그들이 세상에 발 디딜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이글은 인권운동사랑방이 발행하는 인권오름 최근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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