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길의 독주' '심상정의 바람', 그리고 '노회찬의 위기'
노 후보의 충격은 단지 꼴찌로 밀려난 수모 때문만이 아니다. 울산 선거는 일찌감치 3위를 예상하고 있었다. 문제는 경선 초장부터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노 후보의 '침체'가 반환점을 돈 지금에 이르러선 회복불능의 '위기'로까지 악화된 데에 있다. 그걸 울산 선거가 확인해 준 것이다.
민주노동당 경선의 두드러진 현상인 '권영길의 독주'와 '심상정의 바람'에는 바로 '노회찬의 위기'라는 동전의 뒷면이 있다. 촌철살인의 언어구사력과 순발력, 대중성, 정치적 기민함, 이슈 선점능력 등의 강점을 두루 갖춘 노 후보가 왜 이 지경까지 내몰렸을까?
"정파선거로 가면 우린 3등"
노회찬 캠프는 '정파선거의 피해'라고 분개했다. 정파선거가 최고조에 이르렀던 지난 2006년 당 대표 선거와 현재의 경선 추이를 비교해 보면 노회찬 캠프의 항변에 일리는 있다. 당시 자주파의 지원을 등에 업은 문성현 후보의 지역별 득표율과 권 후보의 득표율이 엇비슷한 경향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민주노총 좌파의 한 부류를 일컫는 중앙파마저 심상정 후보 쪽으로 쏠렸다는 게 노회찬 캠프의 주장. 캠프 관계자는 "가정이지만 오른쪽을 자주파가, 왼쪽을 중앙파가 다 가져가면 조직이 없는 노회찬으로서는 3등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요컨대 자주파의 권영길과 중앙파의 심상정 틈새에서 속수무책의 상황이 악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파선거, 조직선거는 거의 모든 민노당의 선거에서 상수다. 경선 전부터 예상됐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후보의 자질, 선거 전략, 당권자들에 대한 메시지 관리 등 기본적인 선거 요인이 작용할 틈이 없는 건 아니다. 대선후보를 뽑는 선거인만큼 당권자들에게 당 밖의 시각에서 객관적인 판단을 하도록 유인할 수단은 당직 선거보다 훨씬 넓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하기에 노 후보의 위기는 이런 측면에서 자초됐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캠프 관계자는 "평당원 혁명이나 본선경쟁력에 대한 판단 등이 선거의 기준이 되는 게 우리의 희망사항이었는데 정파와 연고를 넘어선 잣대를 각인시키는 데 실패했다"고 인정했다.
"노회찬 하면 떠오르는 게 없다"
다른 후보 진영에서도 비슷한 지적이 나왔다. 권영길 캠프의 관계자는 "대중성에서 강점이 있는 노 후보가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 당원들을 압박했으면 상당히 위협적일 수 있었을 텐데 그 점이 너무 미약하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심상정 캠프 관계자는 "개인 지지율과 당심의 간극을 메울 방안을 제시하지 못했고 메시지 전략에 실패한 것 같다. 노회찬 하면 떠오르는 게 없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게 '영세업자 카드가맹점 수수료 인하 운동'이다. 경선 출마선언 전부터 노 후보가 주도한 야심작이었던 이 활동에 힘입어 민노당에 대한 자영업자의 지지율이 상당히 올랐다. 그러나 정작 경선에 접어들자 자신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던 이 업적을 제대로 써먹지 못했다.
노 후보의 경쟁력으로 '카드 운동'에 주목했던 당의 한 관계자는 "한동안 접어뒀다가 요즘 다시 들고 나오니 생뚱맞기도 하고 별 반응이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한미 FTA를 브랜드화 시켜내며 당 밖으로부터 경제정책통 이미지를 구축한 데 성공한 심상정 후보와 대조되는 대목이다.
개인기의 역풍
지난 7월 7일 광주 연설. 노 후보는 "지금 (대선에) 세 번 출마하는 분은 권영길 후보와 이인제 씨밖에 없다"고 말했다.
곧바로 역풍이 일었다. 지난 97년, 2002년의 대선 당시 등 떠밀리다시피 출마한 권 후보를 경선에 불복하면서까지 출마해 권력욕의 화신처럼 표상화된 이인제 의원과 비교하는 게 적절하냐는 비난이 쏟아졌다. 개인기가 지나쳐 빚은 노 후보의 '말실수'는 이후에도 권 후보에게 "집에 가서 쉬시라"는 발언 등으로 이어졌다.
2004년 총선 당시 "50년 불판 갈아엎자"는 말 한마디로 민노당과 자신을 스타덤에 올렸던 노 후보의 입담에서 카타르시스는 빠지고 개그만 남았다는 비아냥도 들렸다. 이는 개인기에 의존하다 보니 진중한 맛이 떨어지고 위험해 보인다는 평가로 이어졌다.
더구나 권 후보와 선두다툼을 벌일 것이라는 자신감과 달리 지역별 개표결과가 속속 나오고 위기의 징후들이 발견되자 노 후보의 말에선 가시가 돋기 시작했다. 정파선거에 대한 피해의식이 집요한 네거티브성 발언으로 표출됐다. 노 후보가 6일 "권영길 후보가 과거에는 당을 대표하는 대표선수였다면 지금은 한 정파를 대변하는 후보로 전락했다"고 거세게 비난한 건 이런 맥락이다.
최근 노회찬 캠프가 시작한 권영길 후보에 대한 '정체성 검증'에 대해서도 조급함의 표출로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황우석 교수 파동 당시 권 후보의 발언을 끄집어내 비판하는 식의 맥락 없는 정체성 검증은 그다지 반향을 얻지 못했다.
이같은 선거전술의 변화는 노회찬 캠프가 자주파 진영의 소행으로 의심하는 '네거티브 동영상(지난 94년 박홍 전 서강대 총장의 발언과 노 후보의 발언을 교묘하게 이어붙여 마치 노 후보가 공안정국을 지지하는 것처럼 편집한 동영상)' 사건과 맞물려 네거티브 선거전에 대한 우려를 증폭시키기도 했다.
남은 경선의 관건은 노회찬
이처럼 울산 선거를 거치며 당 안팎에 형성된 '노회찬 위기론'은 남은 선거 판세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당장 권영길 후보가 반사이익을 얻는 게 아니냐는 얘기들이 나돈다. 권영길 캠프 관계자는 "노 후보가 지금처럼 힘을 못 쓰면 수도권 선거에서 생각보다 쉽게 갈 수 있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심상정 후보 측도 "노 후보가 이렇게 무너질 줄 몰랐다. 그 결과가 권영길 대세론으로 쏠리면 1차 투표에서 끝날지도 모른다"고 위기감을 토로했다.
그러나 노회찬 캠프 관계자는 "전반전에서는 조금 부족했던 걸 인정하지만 정파의 입김이 덜한 수도권으로 오면 본선경쟁력으로 투표 기준을 바꾸어 낼 수 있을 것"이라며 "그런 흐름만 잡히면 1차 투표에서 끝나는 상황을 막을 수 있고, 결선에서 역전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말했다.
그는 "결선투표는 권 후보를 또 다시 민노당의 후보로 내 보낼 것이냐 아니냐에 대한 판단을 하는 선거가 된다"며 "최근 당원들이 서서히 권 후보가 대표주자가 되는 게 정말 민노당에 좋은 것인지를 생각하기 시작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민노당 홈페이지의 당원게시판에는 '권영길 대세론'과 '심상정 대안론'을 주장하는 지지자들의 글들 속에 노 후보의 선전을 당부하는 글들도 적지 않게 눈에 띄었다.
그 가운데 한 대목. "더 이상 꿀릴 것도 없다. 잃을 것도 없다.(…)우리들의 진정성이 당원들과 통한다면 드라마틱한 막판 대역전의 드라마가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나흘. 종착역까지 절반을 남겨둔 민노당 경선의 향배는 노회찬 후보에게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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