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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보호조약'이 억지 체결된곳, 중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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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보호조약'이 억지 체결된곳, 중명전

<장규식의 서울역사산책> 정동 일대 역사공간⑦

***덕수궁 중명전- ‘을사조약’이 억지 체결된 장소**

배재학당에서 정동제일교회 쪽으로 다시 내려와 길 건너 정동극장 왼편 골목으로 접어들면, 그 안쪽으로 옛 러시아공사관 건물과 뭔지 모르게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오래된 양옥 건물 한 채를 발견하게 된다. 경운궁(덕수궁) 중명전(重明殿)인데, 1905년 11월 17일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이 억지 체결된 바로 그 장소이다.

<사진 51> 중명전 초입의 정동극장

러일전쟁후 태프트­카쓰라(桂) 각서(1905. 7.29), 제2차 영일동맹(8.12), 포츠머스강화조약(9. 5)을 통해 미국․영국․러시아로부터 한국에 대한 이른바 ‘지도 보호’의 권리를 승인받은 일본은, 1905년 11월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특사로 파견하여 한국을 보호국화하는 요식 절차에 착수한다.

이토오가 서울에 도착한 것은 1905년 11월 9일 저녁이었다. 정동 손탁호텔에 여장을 푼 그는 이튿날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勸助)와 함께 경우궁에 입궐하여 고종황제를 알현하고 일본천황의 친서를 전달하였다. 그리고 11월 15일 재차 황제를 알현한 자리에서 ‘보호조약’의 초안을 내놓고 인허할 것을 강요하였다. 황제가 이는 국가 중대사인만큼 대신들과 백성들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며 일단 거부 의사를 밝히자, 이토오는 다음날 자신의 숙소인 손탁호텔로 한국정부 대신들을 불러 회유와 협박을 가하였다.

<사진 52> 을사조약 날치기극의 총연출자 이토오 히로부미

드디어 11월 17일 오후 3시, 완전무장한 일본군이 궁궐 안팎을 겹겹이 둘러싸고 무력시위를 벌이는 가운데 중명전에서 어전회의(御前會議)가 개최되었다. 저들의 강요 아래 5시간이나 계속된 어전회의에서 조약에 반대하기로 결론이 나자, 이토오는 하야시 공사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한국주차군 사령관을 대동하고 회의장에 들어가 다시 회의를 소집토록 하고, 대신 한사람 한사람에게 가부 입장을 밝힐 것을 강요하였다. 이 때 참정대신 한규설이 완강히 반대를 하자 그를 회의장 밖으로 끌어내고, 8명의 대신 가운데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 5적’ 다섯 명의 찬성으로 조약이 통과되었음을 일방적으로 선포한 뒤 회의를 종결하였다. 그리고 18일 오전 2시, 일부 문구의 수정을 거쳐 조약 체결의 실무를 담당한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공사 하야시 사이에 한국정부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보호조약’이 조인되었다.

그런데 1905년 11월 17일 날치기 통과된 ‘을사보호조약’은 고종황제의 서명 날인은 물론 정식 명칭조차 없는 불법 조약이었다. 그러나 이미 열강의 국제적인 침략 승인을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것은 하등 문제가 되지 않았다. 주권국가 대한제국의 입장은 애시당초 고려의 대상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일본의 한국침략은 일본의 단독 작품이 아니라, 미국·영국·러시아와의 합작품이었던 것이다. 중명전 동쪽 담장 너머, 100년전 억지 불법 조약을 재빨리 승인하고 총영사관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던 미국공사관(현 미국대사관 관저)은 그러한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

<사진 53> 헤이그 특사에게 내려진 황제의 신임장, 고종의 서명 날인이 선명하다

‘을사보호조약’이 억지 체결된 치욕의 현장 중명전은 경운궁(덕수궁)의 서문인 평성문(平成門)밖, 현 정동극장에서 예원학교 일대에 걸친 이른바 수옥헌(漱玉軒) 구역에 조성된 10채의 전각 가운데 가장 중심이 되는 서양식 건물이었다. 1896년경 궁중 최초의 서양식 건물 가운데 하나로 지어질 당시에는 왕실 도서관(King's Library)으로 사용되다가, 1904년 4월 14일 경운궁에 불이 나 고종황제가 피신하면서부터 황제가 외국사절들을 접견하거나 연회를 베푸는 장소가 되었다. 1906년 12월 황태자(순종)와 윤비의 가례 때도 외국사절들을 초청해 이 곳에서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사진 54> 치욕의 역사현장 경운궁 중명전

지상 2층, 지하 1층의 회색 벽돌건물 중명전은 러시아 건축기사 사바틴의 설계로 지어졌는데, 그래서인지 영국인이 설계한 석조전과는 또 다른 맛을 풍긴다. 1층의 아치형 창이 옛 러시아공사관 건물과 비슷한 것도 그 때문인 모양이다. 1925년 3월 12일 일어난 화재로 외벽만 남기고 내부시설 대부분이 불에 타 버렸으나, 그 뒤 복구하여 외국인구락부에 임대되었다.

해방후에도 줄곧 주한 외교관과 선교사들의 사교장으로 이용되던 중명전은 1977년 4월 사기업인 정한개발에 팔려 지금은 개인 소유로 되어 있다. 그런데 1983년 11월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53호로 지정되면서, 개인의 사유재산권 보장과 문화재 보호라는 두 마리 토끼를 놓고 분쟁이 일어났다. 최근 서울시에서 매입하여 기념관으로 꾸밀 계획이라고 하는데, 비운의 장소여서 그런지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은 모양이다.

<사진 55> 저녁 나절의 정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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