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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예배당의 원형, 정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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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개신교 예배당의 원형, 정동교회

<장규식의 서울역사산책> 정동 일대 역사공간⑤

***정동제일교회 일대의 미 북감리회 선교기지 **

이화여고 동문을 나와 덕수궁을 향해 걷다보면, 정동극장 맞은편 이화여고와 배재공원 사이로 고풍스런 예배당 건물 한 채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한국 감리교회의 모교회(母敎會)로 불리우는 정동제일교회의 '문화재 예배당'이다. 화단앞 교회 마당의 설립자 아펜젤러(H.G. Appenzeller) 흉상과 한국인 최초의 담임목사 최병헌(崔炳憲)의 흉상이 찾는 이들을 맞는다.

<사진 37> 정동교회 앞마당의 아펜젤러와 최병헌 목사 흉상

정동제일교회(貞洞第一敎會)는 미 북감리회 선교사 아펜젤러가 정동에 자그마한 한옥 한 채를 구입하여 1887년 10월 9월 오후 첫 주일예배를 드림으로써 시작한 교회로, 미 북장로회 선교사 언더우드가 세운 새문안교회와 더불어 우리나라 개신교회의 양대 기둥을 이루는 교회이다. 아펜젤러는 이 예배당을 '하나님의 집'이란 뜻으로 '벧엘'이라 명명하였다.

정동제일교회의 설립자 아펜젤러 부부는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오후 미 북장로회에서 파송한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제물포에 도착하여 한국에 첫 발을 내딛은 미 북감리회의 초대 선교사였다. 그러나 불안한 국내 정세와 부인의 건강 문제로 바로 서울로 향하지 못하고 잠시 일본으로 되돌아 갔다가, 6월 20일 같은 선교부 소속의 스크랜튼(W.B. Scranton, 施蘭敦) 의사 부인과 그의 모친 메리 스크랜튼 대부인을 대동하고 제물포에 상륙하였다. 그 사이 스크랜튼 의사가 단신으로 5월 3일 인천에 도착하여 먼저 서울 정동에 보금자리를 마련하였다. 아펜젤러 부부도 7월 19일 서울에 들어와 정동 스크랜튼 의사의 집 앞에 자리를 잡았다. 옛 배재학당 운동장 북서편, 현재의 러시아대사관 자리이다.

<사진 38> 스크랜튼 선교사가 정동에 개설한 시병원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아펜젤러는 정동 자신의 집에서 스크랜튼 의사가 소개한 두 명의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1885년 8월 3일의 일인데, 배재학당의 초석이 놓이는 순간이었다. 제중원에서 알렌을 도와 잠시 일하던 스크랜튼 의사가 자신의 집을 개조하여 외래 진료소를 개설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9월 10일 문을 연 스크랜튼의 외래 진료소는 1886년 6월 15일 입원실을 갖춘 민간병원으로 정식 개원하면서 '시병원(施病院)'이라는 간판을 붙인다.

스크랜튼 의사의 모친 메리 스크랜튼 대부인 역시 1886년 5월 31일부터 한 명의 여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하여, 그 해 11월 지금의 이화여고 본관 자리에 별도의 교사를 마련하고 본격적인 여성교육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1887년 10월에는 여의사 메타 하워드(Meta Howard)가 내한하여 이화학당 구내에 부인병원으로 보구여관(保救女館, 이화여대 부속병원의 전신)을 개설하였다. 그리하여 1887년 무렵 지금의 정동제일교회 일대는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시병원과 보구여관, 벧엘예배당 등 남․여학교와 병원, 교회가 어울어진 미 북감리회의 선교기지로 자리를 잡기에 이른다.

<사진 39> 우리나라 최초의 부인병원 보구여관

***정동제일교회 '문화재 예배당'- 우리나라 개신교 예배당의 원형**

1887년 10월 9일 '벧엘예배당'에서 공개적인 첫 주일예배를 드리며 시작한 정동교회(현 기독교대한감리회 정동제일교회)는 건물이 비좁고 불편한 데다 정부의 선교금지 조치 역시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는 속에서, 이후 이곳 저곳으로 옮겨다니며 예배를 드리게 된다. 남자반은 배재학당·시병원·벧엘예배당 등지에서, 여자반은 이화학당에서 각각 별도의 예배를 드렸는데, 때문에 초기 교인 대부분이 두 학교의 관계자와 학생들이었다. 1889년 12월에는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의 예배처, 그리고 종로집회소(중앙교회의 전신)를 아우르는 공식교회로서 한국 감리교회 최초의 정동구역회(계삭회)가 조직되었다. 두 곳의 남녀 예배처가 통상 '정동교회'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였다.

1894년 갑오개혁을 거치며 정부의 선교금지 조치가 사실상 풀리면서 두 곳에서 모이는 남녀 교인 수가 200명을 넘어서자, 1895년 1월에 열린 미감리회 선교연회는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서울제일감리교회의 회당을 정동에 건축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1895년 9월 9일 예배당 건축 기공식을 거행하고 1897년 12월 26일 성탄주일에 헌당식을 가졌는데, 그것이 현재 사적 제256호로 지정되어 있는 '문화재 예배당'이다.

<사진 40> 정동교회의 옛 모습

이후 정동교회 예배당에서는 종교집회 외에도 각종 강연회와 음악회 등이 열려 민중 계몽과 신문화 수용의 길라잡이 역할을 하였다. 그 결과 1898년 대중단체로 변모한 독립협회가 정치개혁운동을 본격화할 때 정동교회는 그 주요한 배후 근거지의 하나로 주목을 받았다. 특히 1897년 10월 조직된 정동교회 엡웟청년회(워렌분회, 회장 노병선)는 배재학당 협성회와 함께 독립협회 정치개혁운동의 선봉대 역할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1902년 6월 아펜젤러 목사가 선박 충돌 사고로 순직한 이후 목회자로서 교회를 이끌어간 노병선(1902~03)·최병헌(1903~13)·현순(1914~15)·손정도(1915~18)·이필주(1918~19) 목사는 하나같이 개화 개혁운동과 민족운동의 지도자들이기도 하였다.

<사진 41> 정동교회 제6대 목사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장을 역임한 손정도 목사

3·1운동 당시 담임목사 이필주와 장로 박동완이 민족대표로 참가하고, 신간회 창립 때 김영섭 목사(1927~34, 1938~43), 박동완 전도사, 김활란 등이 간사로 활약하는 등 정동교회는 이후로도 줄곧 민족운동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또한 1930년 남·북감리회가 합동하여 단일교단 '기독교조선감리회'로 출범할 때에는 감리교회의 모교회로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개신교 예배당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정동제일교회 '문화재 예배당'은 19세기에 지어진, 지금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서구식 개신교 예배당으로, 1898년 완공된 명동성당과 함께 당시 서울 장안의 명소로 이름을 날렸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단층 고딕양식의 이 건물은 당초 건평 115평의 십자형 건물이었으나, 1926년 증개축하여 현재는 삼랑식(三廊式) 구조를 하고 있다. 이 때 원건물을 그대로 두고 날개 부분만을 메꾸어 증축했기 때문에 건물 원형은 그대로 남아 있다. 최근 전면적인 보수공사를 거쳐 현재도 부속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사진 42> 정동교회 문화재 예배당

북미계통의 단순화된 교회건물의 맛을 느낄 수 있는 담백한 건물인데, 근검절약과 실용성을 강조하는 청교도적 프로테스탄티즘의 문화를 잘 표현하고 있다. 건축물은 당대의 문화적 마인드와 건축 주체의 의식세계를 잘 보여주는 시금석이라고 한다. 예컨대 콘크리트 건물에 페인트를 칠한 채 목조건물인양 서 있는 경복궁의 광화문은 철근과 콘크리트를 숭배하던 박정희 정권시절 산업화 마인드의 산물이었다. 콘크리트여 영원하라고 외치며, 석유를 '검은 진주'라 노래하던 당시의 문화 마인드가 거기에 담겨 있다. 마찬가지로 실용성이 돋보이는 담백한 '문화재 예배당' 건물을 통해, 우리는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개신교 문화의 일면을 읽는다. 개발독재 시기를 거치며 재벌문화의 잔영이라 할 수 있는 대형화와 성장지상주의, 부자세습의 미련을 아직도 떨치지 못하고 있는 오늘날 개신교회의 모습과는 별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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