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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니카의 이중생활 SE

[DVD월드] 개봉 15년만에 선보이는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걸작

감독 크쥐시도프 키에슬로프스키 출연 이렌느 야곱 | 시간 98분 (스페셜 피처-164분) 화면비율 1.66:1 아나모픽 와이드스크린 오디오 돌비디지털 2.0 | 출시 ㈜태원엔터테인먼트 오랫동안 팬들을 기다리게 했던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DVD가 지난 달 SE 버전으로 출시됐다. 영화팬들에게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될 만한 것은, 이 영화가 15년간 운 좋은 극소수의 사람들만 볼 수 있었던 희귀영화였기 때문이다.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1991년작인 이 영화는 국내에서 1992년말경 극장에서 개봉해 흥행에 참패한 뒤 비디오로도 만나기가 쉽지 않았던 작품. 그간 시네마데크에서 특별상영 몇 번 외에는 영화를 볼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었고, 어쩐 이유인지 해외에서도 DVD가 출시되지 않아 전세계 팬들을 끝없는 기다림으로 지치게 했다. 그러다가 키에슬로프스키 서거 10주년이었던 작년, 2월에 프랑스의 MK2에서, 그리고 11월에 Criterion에서 DVD가 출시됐었는데, 이를 보며 국내팬들이 꼭 희망을 가질 수만은 없었던 것이 국내 DVD 시장의 상황이 워낙 안 좋은데다 시장성 있는 타이틀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국내에서 올해 2월, MK2 버전을 라이센스화하고 한글 자막이 찍힌 DVD가 출시되었을 때, 혹자들은 거의 '비명을 지르며' 환호할 수밖에 없었던 것. 오랜 기다림을 보상이라도 하듯 국내 버전은 MK2의 버전처럼 본편이 HD의 고화질로 복원된 데다 키에슬로프스키 감독과의 인터뷰, 주연을 맡은 이렌느 야곱과의 인터뷰,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영화세계에 대한 다큐멘터리, 감독의 초기 다큐멘터리 단편 네 작품 등 풍성한 서플먼트를 자랑하고 있고, 영화전문기자의 글이 실린 고급 화보와 즈비그뉴 프라이즈너가 영화음악을 담당한 OST가 포함되어 있다. 팬들에겐 이 OST 역시 오랫동안 '여러 음반가게를 헤매고 뒤져야만' 찾을 수 있는 희귀 품목이었기 때문에 더욱 반가운 선물이 되었다.

또 다른 나에 대한 이야기 세상에 나와 똑같은 사람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대체로 반가움보다는 공포와 불쾌감을 선사한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자신이 유일무이한 특별한 존재라고 상정함으로써 스스로의 가치와 존재감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에서 자신이 수많은 복제 로봇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데이빗 (헤일리 조엘 오스몬트)이 보인 반응은 다른 복제품 데이빗들을 파괴하며 '난 단 하나뿐인 존재'라고 울부짖는 것이었다. 같은 시공간에서 또 하나의 자기자신을 보면 죽는다는 이른바 도플갱어 민담은 (정신의학에서 어떻게 설명하고 있든지간에) '죽음'과 연관된 이야기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만약 이 세상 어딘가에 나와 똑 같은 존재가 살고 있고, 그 존재로 인해 내가 삶에서의 실수를 줄이고 나의 실수가 그에게 교훈이 된다면 어떨까? 즉, 서로 상대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내가 저지른 실수를 경험삼아 그가 비슷한 실수를 피해갈 수 있다면, 그가 겪은 실패로 말미암아 내가 같은 실패를 피해간다면, 혹은 어느 날 이유없이 느껴지는 어떤 기쁨이 만약 그에게 행복한 일이 생겨서고, 반대로 나에게 생긴 즐거움과 기쁨이 이름도 사는 곳도 모를 그에게 어떤 식으로든 흐뭇함과 즐거움으로 전달된다면, 우리의 삶은 과연 어떨까. 아마도 우리는 이 세상을 조금은 덜 외롭고, 조금은 더 희망을 갖고 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내 삶을 좀더 충실하고 신중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폴란드 출신의 크쥐시도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은 전통적으로 호러영화의 소재로 사용되던 도플갱어 민담을 이렇게 인간의 근본적 고독과 존재의 의미에 관한 철학적인 주제를 담은 아름다운 영화로 만들어냈다. 또 한편으로는 동유럽과 서유럽의 운명을 대비시킴으로써 정치적 비유를 담았다. 그 영화가 바로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이다. 외모뿐 아니라 재능도 습관도 심지어 심장이 약한 것도 같고 살아온 이력도 비슷한 두 소녀, 폴란드의 베로니카와 프랑스의 베로니크를 이렌느 야곱이 1인 2역을 맡아 연기한 이 영화는, 그간 막연하게 서로의 존재감을 느끼며 세상에 혼자가 아니라는 충만함을 느꼈으나 폴란드의 베로니카가 죽은 후 프랑스의 베로니크가 느끼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독감과 슬픔을 중심으로 영화를 풀어나간다. 그리고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했던 자신의 또다른 존재에 대해 알게 되면서, 그녀의 삶은 또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이제 그녀는 일찍 죽어버린 폴란드의 베로니카의 몫까지, 두 배는 더 열심히, 두 배는 더 행복하게 살아야 할 또렷한 목적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에게 폴란드의 베로니카의 존재를 깨닫게 해준 알렉산더와 사랑에 빠진다.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은 베로니크의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듯하다.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세상에 당신 혼자가 아니라고. 당신이 슬퍼하면 슬퍼할수록,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또다른 당신 역시 그만큼 아프고 슬플 것이라고. 그리고 당신의 기쁨과 행복은, 그 또다른 존재에게도 전달돼 두 배, 세 배의 기쁨이 될 것이라고. 인간은 외로운 존재이지만, 꼭 그렇게 외로운 것만은 아니라고.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 열심히, 즐겁고 행복하게, 그리고 더욱 신중하게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프레시안무비

황색톤이 강하고 깨끗한 화면은 디지털 특유의 쨍한 느낌을 한결 부드럽고 따뜻하게 만들어내고 있는데, 과거 비디오 화질과는 역시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다. 영화가 원래 톤이 이렇게까지 밝았나 살짝 의심이 생길 정도. 1.66:1의 화면 사이즈(일명 스탠더드 화면)는 원래 영화의 비율로, 1.75:1(비스타비전)이나 2.35:1(시네마스코프)을 주로 쓰는 미국과 달리 유럽에서는 여전히 많이 쓰는 화면비이다. 오디오는 2.0만을 지원하고 있는데, 취향에 따라 갈리는 문제이긴 하지만 원래의 영화가 2.0 채널로 제작되었고 박진감 넘치는 사운드 효과를 자랑하는 영화가 아닌 이상 굳이 5.1 채널로 분리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2번 DVD에 들어있는 서플먼트들은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를 처음 접한 관객들에게 그의 영화세계를 충분히 이해시키고도 남을 다큐멘터리들로 꽉 채워져 있다. <키에슬로프스키 – 다이얼로그>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에 대한 감독과의 인터뷰와 메이킹 다큐멘터리를 겸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1966-1988 키에슬로프스키, 폴란드 영화>는 폴란드의 정치적 상황에서부터 키에슬로프스키의 작품세계를 단편과 다큐멘터리를 찍던 때, 그리고 장편영화로 넘어가던 때 등으로 소챕터로 나누어 그의 영화세계를 꼼꼼히 들여다본다.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에서 유난히 더욱 아름다웠던 이렌느 야곱은 오디션을 보던 당시에서부터 영화를 찍던 때를 회고하며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을 추억한다. 세월의 흔적을 그녀라고 비껴갈 수는 없었지만,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에 대해 설명하는 그녀는 여전히 아름답고 배우답다. 크쥐시도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이름은 한국인들에겐 발음하기가 영 쉽지 않지만, 크쥐시도프라는 퍼스트 네임은 동유럽 권에선 그리 드문 이름은 아니다. 일례로 이 영화의 각본에는 키에슬로프스키와 함께 또 다른 크쥐시도프 (피에셰비치)가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영화광들의 술자리에서는 감독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는 것을 술에 취했는지 아닌지를 알아보는 척도로 사용하기도 했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은 1992년 국내에서 극장 개봉될 당시 작은 소동에 휘말렸는데, '이중생활'이라는 한글 제목이 주는 뉘앙스 탓에 에로 영화를 기대하고 극장에 갔던 관객들이 대거 난색을 표하며 항의하는 사태가 벌어졌던 것. 원제를 제대로 번역하자면 '두 개의 삶' 정도가 정확할 것이다.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한 이렌느 야곱은 미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지금도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하고 있고, 최근에는 인기 작가 폴 오스터가 연출을 한 <마틴 프로스트의 내면의 삶>에도 출연했다. 하지만 알렉산더 파브리 역으로 출연했던 필립 볼테르는 안타깝게도 2005년 4월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가면 속의 아리아>로 스타가 된 이래 벨기에와 프랑스의 영화 및 TV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배우였고, 키에슬로프스키 감독과는 <세 가지 색 –블루>에서 다시 함께 작업을 하기도 했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프레시안무비

10편으로 이루어진 TV 시리즈였던 <데칼로그(십계)>, 그리고 이 중 두 개를 장편 극영화한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과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프랑스 국기의 색을 모티프로 자유, 평등, 박애의 주제를 그린 <세 가지 색> 시리즈 등, 폴란드어로 만들었던 초기 영화들을 제외하면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들은 꽤 많은 작품들이 한국에도 소개되어 있다. 1994년에 <세 가지 색 – 레드>를 발표하고 은퇴를 선언한 뒤 2년만에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키에슬로프스키는 최근 한국의 영화팬들에겐 겨우 사망 10년만에 생소한 이름이 되어버린 듯하다. 그러나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을 직시하고 세상에 대해 비관주의 속에서도 소통과 교감에 대한 희망, 따뜻한 위로와 은은한 기쁨의 눈물을 힘겹게 끌어올려 관객들에게 전해주었던 그의 영화는 영화사에 오래도록 남아 고독에 지친 영혼들에게 따뜻한 안식을 제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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