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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준'의 산실, 현대사옥 주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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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준'의 산실, 현대사옥 주변

<장규식의 서울역사산책> 北村일대 역사공간④

북촌 초입의 원서공원을 포함해 현재 현대사옥이 들어서 있는 원서동 206번지에서 계동 140, 147번지에 이르는 6천여평의 부지는 예전 휘문학교가 있던 자리이다. 그런데 이 곳 또한 북촌의 다른 장소들처럼 개항기에서 해방직후에 이르기까지 굵직굵직한 사건들과 함께 했던 역사의 현장이었다.

개항 후만 해도 먼저 갑신정변 당시 역사의 현장이었던 경우궁과 계동궁이 이곳에 있었고, 대한제국 말기에는 휘문학교가 들어섰다. 그리고 해방직후에는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가 주도한 첫 정치집회가 이곳 휘문학교 교정에서 개최되었으며, 건준 창립본부와 여운형의 집 역시 그 주변에 위치하고 있었다.

<사진32> 휘문학교 자리에 들어선 현대사옥

***경우궁과 계동궁 터 - 갑신정변의 자취**

지하철 3호선 안국역에서 현대사옥ㆍ창덕궁 방면 출구로 나오면 중앙고등학교 진입로 입구, 현대사옥 구내 서남쪽 끄트머리에 '제생원 터'라는 표지석이 나온다. 조선초기 서민들의 질병치료를 관장하는 의료기관으로 설립되어, 세조 때 혜민국(惠民局)에 합병된 제생원(濟生院)이 있던 자리이다.

그리고 그 동쪽 맞은편으로는 마치 경주 첨성대를 연상시키는 관상감 관천대(觀天臺)가 고풍스런 자태를 드러낸다. 세종 때 설립된 두 종류의 천문관측대 중 하나인 소간의대(小簡儀臺)로 추정되는 시설물인데, 소간의 또는 해시계를 올려놓고 별을 관측하거나 시간을 측정하던 곳이다. 그 앞고개의 이름 '운현'(雲峴)이 세조 12년(1466) 관상감(觀象監)으로 그 이름을 바꾸기 이전 명칭이었던 서운관(書雲觀)에서 비롯된 지명이라고 하니, 그 연륜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사진33> 현대사옥 한켠의 관상감 관천대

이렇게 운치있고 고즈넉한 동네가 격동의 역사 현장으로 탈바꿈한 것은 갑신정변에 이르러서였다. 1884년 12월 4일 밤 우정국 낙성식 연회석상에서 거사의 깃발을 올린 김옥균 등 개화당 인사들은 곧바로 교동 일본공사관을 거쳐 창덕궁으로 들어가 이 곳 경우궁(景祐宮)으로 고종을 모셔왔다.

그런데 경우궁은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신주를 모신 사당으로 사람이 살지 않았기 때문에, 겨울철 방한시설은 물론 음식 반입 등에 불편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이튿날 오전 10시경 그 남쪽에 고종의 사촌형 이재원이 살던 계동궁(桂洞宮)으로 처소를 옮긴다. 그리고 그날 오후 5시경 명성왕후와 대왕대비의 완강한 요청으로 다시 창덕궁으로 돌아갔다. 결국 갑신정변은 그 다음날 오후 3시경 청국군 1,500명이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면서 '3일천하'로 막을 내렸다.

이 '3일천하'의 과정에서 정변의 현장으로 세인의 관심을 끌었던 경우궁과 계동궁 터는 모두 지금 현대사옥 구내에 편입되어 있다. 경우궁은 1908년 지금의 청와대 서편 궁정동 1번지 육상궁 자리로 옮겨갔는데, 얼마전 일반에게 공개한다고 해서 신문에 오르내린 칠궁(七宮)이 바로 그 곳이다. 칠궁은 실제 즉위하거나 추존된 임금들의 생모가 되는 후궁 일곱 분의 신주를 모신 사당으로, 그 가운데 하나가 수빈 박씨의 경우궁이다. 그 뒤 경우궁과 계동궁 터는 민영휘(閔泳徽, 초명은 泳駿)가 세운 휘문학교의 교정이 되었다.

<사진34> 궁정동 육상궁 자리로 옮겨간 경우궁, 저경궁․대빈궁․선희궁에 이어 맨 오른쪽 사당이 경우궁이다. / 청와대

***현대사옥으로 변한 옛 휘문학교 교정**

휘문학교는 1906년 5월 민영휘가 설립한 사립학교이다. 설립 당시 고종황제가 '휘문의숙'(徽文義塾)이란 교명을 하사했다고 하는데, 민영휘의 이름 끝자와 휘문의 '휘'자가 같다. 민영휘는 명성왕후의 친조카인 민영익을 따라 다니다가 명성왕후의 눈에 들어 출세가도를 달리며 민씨 척족의 거두로서 세도를 부린 인물이다. 그리고 그 때 모은 재산으로 조선 최고의 갑부 가운데 하나로 행세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 재산의 상당 부분이 1880년대 후반 평안감사로 가서 그 지방의 부호들로부터 긁어모은 것들이었다.

평안도 일대는 조선후기 이래 상공업이 발달하여 재원이 풍부한데다, 지역의 양반사족들 또한 미미하여 돈과 권력에 탐닉하는 벼슬아치라면 누구나 눈독을 들이는 곳이었다. 여기에 풍류의 대명사인 평양기생들까지 있고 보면 '평안감사도 제 하기 싫으면 그만'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만 했다.

그런 곳에 감사로 부임하자 민영휘(당시 이름은 영준)는 먼저 도내 부호들의 명단을 확보하고 그들의 재산 정도를 낱낱히 조사시켰다. 그리고 그들을 하나씩 불러 그대를 어느 군의 수령으로 발탁되도록 손을 써 놓았으니 돈을 준비하라고 하면서, 그 부호의 거의 전 재산에 해당하는 금액을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십중팔구 그 금액에 놀란 부호가 알거지 신세를 면하려고 정중히 그 감투를 사양하면, 이미 청탁을 넣었는데 무마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 해서 처음 가격의 반액 또는 1/3을 일종의 위약금 조로 물려 고스란히 착복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관직을 마다하는 댓가로 돈을 긁어들인다 해서 항간에 '마다리' 수법으로 알려진, 민영휘 본인이 신안특허를 낸 부정축재 방식이었다.

<사진35> 휘문학교의 설립자 민영휘

이렇게 종래의 매관매직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마다리' 수법 말고도, 민영휘는 부호들의 약점을 캐내거나 그밖에 가능한 모든 방법들을 동원하여 부민들의 재산을 갈취하였다. 고종에게 금송아지까지 만들어 상납했다고 할 정도이니, 그 규모를 짐작할만하다. 그의 이같은 부정축재 행각은 평안도에서만 끝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1890년대 전반에 이미 한 해 추수한 곡식이 13만석에 이를 정도로 조선에서 손꼽히는 갑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런 그가 교육구국운동의 열기가 한참 달아오르던 대한제국 말기 휘문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외척의 권세를 이용한 권력형 부정축재의 대명사이자 수전노로 유명한 민영휘가 학교를 세우다니, 참으로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속내를 살펴보면 그렇지만도 않았다. 하늘높은 줄 몰랐던 권세가 한풀 꺾이면서 이제 민영휘는 예전의 민영휘가 아니었다. 예전에 억울하게 재산을 빼앗긴 사람들이 재판소에 고소를 하거나 그의 집에 뛰어들어 칼을 꽂아놓고 담판을 벌이는 사태가 잇따랐고, 각 신문에는 그의 과거 비행과 죄상들이 심심찮게 오르내렸다. 우리는 최근에도 정권이 바뀔 때마다 부정축재자의 도마 위에 오른 기업가들이 재산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고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는 사례를 자주 보아왔다. 민영휘의 휘문학교 설립에도 혹시 그런 사연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인지 예전 휘문학교에서는 평안도 출신 학생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사진36> 휘문중학교 교정의 여운형 / 몽양여운형선생추모사업회

아무튼 휘문학교는 1918년 휘문고등보통학교로 승격한 데 이어, 1938년 휘문중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바로 이 휘문중학교 교정에서 해방직후 첫 정치집회가 열리게 되는데,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한 다음날인 1945년 8월 16일 오후 1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에서 주최한 집회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 자리에서 건준 위원장 여운형은 전날 아침 조선총독부 엔도오 정무총감과의 협상 내용을 알리고, 민족의 힘을 하나로 모아 치안유지와 건국준비에 나설 것을 주창하였다. 당시 모시 적삼 차림에 손을 위아래로 휘두르며 열변을 토하던 여운형의 모습이 한 편의 <영상실록>에 담겨, 지금까지 그날의 감동을 전한다.

***해방직후 건국운동의 현장**

현대사옥에서 중앙고 진입로로 방향을 틀다 보면 눈앞에 '산내리 한정식'이란 간판을 단 음식점이 나타난다. 언뜻 보아도 한 시절의 영화를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고풍스런 양반 대가집인데, 한규설 대감의 손자 한학수가 살던 집이라고 한다.

바로 이 집 사랑방에서 1945년 8월 18일 원세훈을 위원장으로 하는, 해방직후 우익진영 최초의 정당인 고려민주당이 결성되었다고 송남헌 선생은 회고하고 있다. 이후로도 이 곳은 원세훈 김병로 조병옥 송남헌 등 우익 인사들이 모여 우익진영의 정치적 진로와 세력규합 방안을 논의했던 장소로 널리 이용되어, 8월 28일에는 고려민주당계를 포함한 김병로계ㆍ홍명희계ㆍ이인계의 우익인사 2백여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한 가운데 조선민족당 발기인 총회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사진37> 한정식 집으로 변한 해방 당시 한학수의 집

여기서 한 100m쯤 올라가면 현대사옥 주차장 입구 맞은편으로 지난 4월까지 고풍스런 2층 양옥 한 채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 곳이 바로 건준이 창립 당시 본부를 두었던 임용상의 집(계동 84-2)이다. 건준은 해방후 조직된 최초의 정치단체이자, 온건좌파 여운형(위원장)과 온건우파 안재홍(부위원장)을 중심으로 좌우익 세력이 결집한 일종의 통일전선 조직이었다.

건준의 결성작업은 8월 15일 아침 조선총독부 측의 통지를 받은 여운형이 필동의 정무총감 관저를 방문하여 엔도오 정무총감, 니시히로 경무국장과 회담을 마치고 돌아온 다음 본격화되었다. 이 자리에서 엔도오는 여운형에게 당일 정오에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이 있을 예정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연합국이 들어올 때까지 치안유지에 협력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여운형은 엔도오의 제의를 즉각 수락하고, 니시히로 경무국장에게 정치범과 경제범의 석방, 3개월간 서울의 식량 확보, 조선인의 정치활동 불간섭 등 다섯가지 요구조건을 제시하여 승락을 얻어냈다.

이후 여운형은 엔도오와의 당초 약속인 치안유지 협력에서 한 걸음 나아가 민족역량을 일원화하여 새나라 건설의 준비에 착수할 것을 밝히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하였다. 그는 우익 진영의 유력한 지도자였던 송진우에게 협력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안재홍 등과 함께 일제말 자신이 조직한 비밀결사 건국동맹을 중심으로 건준을 발족하고 8월 15일 밤 임용상의 집에 본부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이튿날인 8월 16일 아침 건준이 활동을 개시한다는 전단을 시내 곳곳에 뿌리는 한편, 오후 1시 휘문중학교 교정에서 첫 대중집회를 개최한 데 이어, 오후 3시에는 역시 휘문중학교 강당에서 여운형 직계의 장권을 대장으로 하는 건국치안대를 결성하고 안국동 풍문학교에 본부를 두었다. 8월 17일에는 제1차 중앙부서의 조직을 완료하였는데, 이처럼 중앙에 건준이 결성되자 전국 각지에서도 자치위원회를 비롯한 다양한 명칭의 지방지부들이 자발적으로 조직되어 8월말에는 그 수가 145개소에 이르게 되었다.

<사진38> 건준 창립 당시 본부를 두었던 계동 임용상의 집 / 역사문제연구소
<사진39> 지난 4월 느닷없이 철거된 건준 창립본부 자리

이 과정에서 계동 임용상의 집은 건준의 창립본부로서 해방직후 건준을 중심으로 하는 건국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그같은 역사적 명소가 지난 4월 느닷없이 철거되어 버렸다. 아마도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가는 데 대해 집주인이 적쟎은 부담을 느낀 때문이 아닌가 여겨지는데, 이로써 우리는 한국현대사의 아주 소중한 역사공간 하나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내 재산 내 마음대로 한다는 데 달리 할 말은 없으나, 꼭 그렇게 해야만 했을까? 개인의 사유재산권 행사와 문화재 보호 사이의 해묵은 갈등은 언제쯤이나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언론의 주목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건준 본부의 초라한 마지막이 우리네 문화의식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은 아닌지, 착잡한 마음을 뒤로한 채 여운형 집으로 발길을 옮긴다.

해방직후 건준의 활동이 임용상의 집과 휘문학교 등 계동 일대를 주요 무대로 하여 전개된 것은 이 곳에 그 지도자 여운형의 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여운형의 집은 건준 창립본부 자리에서 중앙고 방향으로 올라가다 네거리에서 오른편으로 돌아 100m 남짓한 언덕길 바로 밑에 있었다. 지금의 현대사옥 뒤편 '안동손칼국수'라는 음식점 간판이 붙은 집이다.

해방직후 건준 위원장, 인민당 당수 등을 역임하며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민족국가의 건설에 매진하였던 몽양 여운형이 살던 곳인데, 지금은 어디서도 그 당시의 분위기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다만 도로확장공사로 반 토막이 잘려나간 그의 집 건물만이 두동강이 난 우리 국토처럼 분단의 아픈 상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사진40> 도로확장으로 반토막이 난 여운형의 집, 칼국수 집 간판이 붙은 곳이다.

한편 여운형의 집 바로 아래편으로는 좌익계의 거물 홍증식의 집이 있었는데, 이 곳 또한 8월 15일 밤 이관술 하필원 정백 등이 모여 조선공산당 재건에 대한 대책을 토의했던 역사적인 장소이다. 그 날 모임과 바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튿날 이영 최익한 강진 등 좌익 지도자들은 종로 YMCA회관 옆 장안빌딩에 '조선공산당 경성지구위원회'라는 간판을 내걸었는데, 이것이 세간에 해방직후 조직된 최초의 정당으로 알려져 있는 이른바 '장안파' 공산당이다. 그리고 홍증식의 집 아래로는 소설 <상록수>의 저자로 유명한 심훈의 형 천풍 심우섭의 집이 있었다. 심우섭은 일제 때 경성방송국의 제2방송과장으로 있으면서 조선어방송을 담당하였던 문화계의 명사였다.

<사진41> 여운형의 집 아래 부동산 간판이 보이는 건물이 홍증식의 집터이고, 그 아래 부대고기집이 심우섭의 집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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