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지 아니한가>에 등장하는 가족을 흔히 '콩가루 집안'이라 표현하는 것은, 가족은 화목 단란해야 하고 다른 그 무엇보다 절대적이고 특별한 가치를 갖고 있다는 것이 여전히 사회적으로 공식화된 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임상수 감독의 <바람난 가족>에서부터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일명 '콩가루 집안 영화'들을 떠올리다 보면 한 가지 고민에 휩싸이게 된다. 저 얘기가 과연 일반적인 것일까, 아니면 특수한 예일까? 내 가족이나 내가 알고 있는 가족들은 사회적으로 평균에 속하는 것일까, 드문 예에 속하는 것일까? 혹은 그 수많은 영화들에서 등장하는 콩가루 집안들이 다 같은 콩가루 집안인 것일까. 평균적인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가족이 실제로는 매우 사회적인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매우 개인적인 조직이자 사적인 영역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한국에서는 자신의 사적인 영역을 노출하는 것이 되고, 가족의 치부라도 드러내는 것은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일이 된다. 가족이 서로 개인을 배려해주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너무 당연하기 때문에, 예를 들어 제리 스프링어 쇼 같은 곳에서 소위 가족끼리 물고 뜯고 할퀴는 것은 한국인들에게 '가장 이해 못할' 미국인들의 습성으로 비치곤 한다. 그러나 전통적인 가정 형태가 급속히 해체하고 있고, 어른부터 아이까지 각자의 스케줄에 너무 바빠 서로 얼굴을 맞댈 시간조차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가족의 해체와 재구성을 다룬 영화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아직 한국의 영화들은 '대안 가족'의 형태를 제시하는 데에는 더없이 조심스럽긴 하지만.
|
|
좋지 아니한가 ⓒ프레시안무비 |
<좋지 아니한가>의 가족은 기본적으로 혈연을 바탕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서로 무심, 무관심하고 별 연대감이 없는 것으로 그려진다. 특기할 것은, 이 가족들이 서로에게 연대감도 없는 만큼 별다른 기대감도 없으며, 소위 '가족'으로서 어떤 의무를 요구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작년에 개봉했던 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의 경우, 매우 급진적으로 가족을 해체하고 재구성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혈연 중심의 가족 구성원에게 전통적인 가치로서 어떤 기대와 당위를 요구하고 있고, 이것이 어그러지면서 더욱 상처를 받는 인물들을 등장시킨다. 그러므로 <가족의 탄생>이 재구성하여 탄생시키는 새로운 가족은, 이러한 기존의 가족에 대한 상처를 딛고 일어서며, 가치관을 재정립하는 과정이 포함된다. 그러나 <좋지 아니한가>의 가족들은 어머니 희경(문희경)을 제외하면 애초에 파편화되어 있고 서로에게 어떤 기대나 당위를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가족 구성원의 돌출된 행동이 '상처'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쪽팔림'으로 다가온다. 이들은 그렇기에 도대체 왜 한 집에서 살아야 하는지 모른 채, 그저 "그렇게 살고 있었으니 그렇게 살 뿐"이다. (물론 이 영화의 장르는 '코미디'이기 때문에, 이러한 특성의 표현은 매우 가벼우면서도 서로 충돌을 일으키며 웃음을 자아내는 쇼트들의 연속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되면서 밝혀지는 한 가지 사실은, 이들이 실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상처를 받는 것이 너무나 무섭기 때문에 결사적으로 거리를 유지하고 있고, 그러면서도 오직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연결되어 있는 그 느슨한 끈이 절대로 끊어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이다. 이 집의 아들 용태(유아인)이 심창수(천호진)의 친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혈연을 매우 중시하는 전통적인 한국 가정에서는 가정을 깰 통속적인 사유로 충분하다. (실제로 현재 방영중인 한 TV 드라마에서는 이와 똑같은 이유로 이혼을 한 커플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영화가 이 사실을 다루는 터치는 매우 가벼울 뿐만 아니라, 이러한 가족사에서 가장 상처를 받을 만한 인물인 용태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고, 영화 초반에서부터 이 사실을 강력하게 주장한 바 있다. 물론 영화 초반에는 이것이 그저 전형적인 '친부 부정 콤플렉스'(자신이 친아들이 아닐 것이라 상상하는 것은 자신의 출생을 특별하게 치장하고 싶은 욕구를 가진 이들의 아주 흔한 증상이다.)이자 엉뚱한 망상으로 포장되긴 하지만. 창수 – 희경 부부가 가족사를 공식적으로 입에 올리며 싸우는 사이, 용태는 별다른 동요 없이 읽던 책인 [발가락이 닮았다]에 집중하고 있다. 그리고 이 순간, 심창수와 희경 부부 사이가 냉랭하고 무뚝뚝했던 것은 단순히 심창수가 고개 숙인 남편이어서가 아니라, 혹은 오래 함께 살아오며 서로 무감각해져서 뿐만이 아니라, 서로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그 사실을 그저 묻어두고 있었기 때문임이 드러난다. 모든 소동이 끝난 후 용태는 심지어 아버지에게 "저, 계속 아버지 아들 해도 되죠?"라고 확인을 받는다. 한국의 가정을 너무나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혈연중심성이 어처구니 없이 쉽게 깨져나가는 순간이다.
| |
|
좋지 아니한가 ⓒ프레시안무비 |
|
이들이 '가족'으로서 연대감을 서로 확인하는 것은 엉뚱하게도 이 집의 집 나갔던 개가 계기가 되어 다른 집과 대판 싸움을 벌이면서부터다. 잡종 개에 대한 비하는 용태에게 그 자신에 대한 비하이자 부정으로 받아들여지기 마련이며, 그가 적극적으로 싸움을 벌이는 것에 대해 가족들은 서로를 편들며 적극적으로 싸움에 가담한다. 싸움에 별로 합류하고 싶어하지 않았던 미경마저도, '가족'이라는 이유로 어쩔 수 없이 싸움에 '동원'되면서 이들의 '가족으로서의 정체감'이 완성된다. (원래 내부의 분열은 외부를 향한 적대를 통해 봉합되는 법이다.) 기실 한국의 가족이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누가 잘못을 했건, 일단은 자기 가족 편을 들 수밖에 없는 것. 그러나 이런 식의 정체성의 확인은, 실은 파국으로 인한 적극적인 해체 이후 재편이 아니라 파편화되어 있던 조각을 얼기설기 봉합한 것에 불과하다. 원조교제 혐의를 받던 아버지나 젊은 청년에게 가슴 설레어 하던 어머니 모두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건 환경에 의해서건 결과적으로 결백하기 때문이며, 이 영화에서 실제로 심각할 정도의 일탈을 하는 인물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이 영화가, 지극히 소시민적인 어떤 가정을 그리고 있다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좋지 아니한가>의 가족들은 <바람난 가족>이나 <가족의 탄생>의 인물들처럼 자신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추구하지는 못하는 인물들이다. 상처받는 게 더없이 무섭기에 오히려 덤덤한 척하는 이 소심한 인물들은 오히려 욕구가 극단적으로 억압된 인물들이기에 여관방에서 옆에 누워있는 여고생을 두고 발기를 경험하면서도 그저 조용히 집으로 돌아올 뿐이고, 멋진 젊은 청년의 손에 이끌려 간 다단계 판매 교육장에서 자리를 박차고 나오기는커녕 물건만 잔뜩 싸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기세좋게 전 남친에게 전화를 걸어놓고도 정작 그의 앞에 나타나지 못하는 것도, 원조교제를 하고 있는 여자친구에게 상처받은 마음을, "널 용서해."라는 어처구니 없는 가부장적 표현으로 드러내는 것(그는 가부장적인 사고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상상의 아버지의 표현을 흉내내고 있을 뿐이다.)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파국과 해체, 그리고 재구성의 과정을 거치지 못한 채 그저 '봉합'에 불과하더라도, 이 영화에서 '모두들 집으로 돌아오는' 인물들은 운명 / 생활 공동체로서의 가족으로 성공적으로 재편된다. 오히려 이런 식의 방식이, 영화 전체적으로 코미디의 과장 어법이 지배하고 있다 하더라도 한국 관객들에게는 더없이 한국적이고 더없이 리얼리스틱한 묘사가 되며, 방식상으로는 보수적이면서도 이념상으로는 그 어느 영화들보다 더욱 급진성을 얻게 된다.
| |
|
좋지 아니한가 ⓒ프레시안무비 |
|
가족의 해체를 다루는 영화가 이런 식의 가벼우면서도 잘 만든 코미디로 그려지고, 그런 영화가 와이드 릴리즈 되어 박스 오피스 순위권 내에 머무를 수 있다는 사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이제 우리 사회가 외면적으로는 여전히 전통적인 가족의 중요성과 가치를 외치고 있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파편화되고 해체된 상황을 전적으로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일 것이다. 이제 한국에서도 대안 가족의 롤 모델을 제시하는 영화가 나올 때가 됐다는 얘기는 그래서 나온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