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인도 뭄바이에서 열린 제4차 세계사회포럼의 주인공이 불가촉천민(Dalit)들이었다면 이번 제7차 나이로비 세계사회포럼의 주인공은 단연 도시슬럼에서 온 빈민들이다.
가장 많이 외쳐진 구호가 "전쟁과 빈곤을 끝장내자"라는 점에서도, 이번 사회포럼의 개막행진이 빈민가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도 이런 사실은 단적으로 드러난다.
아프리카 최대 빈민가 키베라의 풍경
케냐의 나이로비에는 가장 빈곤한 대륙 아프리카의 최대 빈민가인 키베라(Kibera)가 있다. 이곳에는 80만 명의 빈민들이 살고 있다. 이미 빈민가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도시인 셈이다. 마을에 들어서면 악취가 코를 찌른다. 좁은 골목을 두고 비라도 오면 금방 진흙탕으로 변하는 흙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도 없이 뱀처럼 이어진다.
그 옆으로 코딱지만한 가게들이 줄지어 서서 보잘것없는 물건들을 팔고 있다. '놀랍게도' 호텔도 있고, 영화관도 있다. 10실링(150원 정도)을 받고 비디오로 DVD를 틀어주는 역시 코딱지만한 진흙집이다. 당연히 하수도 시설이 되어 있지 않아 흙길을 따라 시커먼 하수가 어지럽게 흘러간다. 아이들은 그 하수 위에서 뛰어놀고 있다.
세계사회포럼을 맞아 나이로비 대학의 '운동권' 학생들과 키베라에 살고 있는 청년들의 축구시합이 마을 가운데 있는 운동장에서 열렸다. 순식간에 마을주민들이 운동장으로 몰려와 구경을 한다. "이곳에서는 축구가 대단히 인기가 좋은 가봐요?" "그럼요. 다들 축구에는 미쳐 있죠." 그 옆에 있는 친구가 끼어든다. "그거 말고는 할 일도 없어요."
둘 다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직업을 구하지 못했다.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다. "여기서는 직업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예요. 우리가 교육을 많이 받은 것도 아니고…."
아침이면 사람들은 시내로 나간다. 요행히 청소부 자리라도 구한 사람들은 '출근'을 하는 것이고, 직업이 없는 사람들은 혹시라도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까 하는 희망으로 '일단' 시내로 나간다. 이들에게 세계사회포럼이 다루는 모든 문제는 전부 자신들이 하루하루 맞닥뜨리는 것들이다.
온 몸에 부스럼이 앉은 아이들…"깨끗한 물이 간절하다"
"물을 길으러 멀리까지 가야 합니다. 전기는 당연히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몰래 전선에서 선을 따서 씁니다. 물론 많이 위험하죠.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죠."
대회 이틀째를 맞아 나이로비 빈민가 네트워크(Nairobi settlement network)가 주최한 행사에서 만난 남아프리카공화국, 인도, 브라질 등 전세계 곳곳에서 온 빈민들의 한결같은 말이다.
"기본공공재(basic services) 없이는 존엄성(dignity)도 없다"는 주제의 컨퍼런스가 열렸다. 월든 벨로와 반다다 시바같은 유명한 인사들이 연사로 참가했던 컨퍼런스보다도 참가자들 수가 더 많았다.
몇몇 빈민가는 사회운동과 국제사회의 압력 때문에 정부에서 전기나 물과 같은 기본적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그렇지 못한 빈민가가 대다수다. 이 중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단연 물과 화장실이다.
빈민가 아이들의 몸은 온갖 부스럼딱지들이다. 피부병은 빈민촌의 상징이다. 오염된 물에서 수영하고 깨끗하지 못한 물을 마시는 당연한 결과다. 이처럼 공간 자체가 오염되어 있으니 자체적으로 물을 뽑아서 사용할 수 없다. 우물에서 퍼 올린 물은 심하게 악취가 나고 똥색이다. 여전히 설사는 전 세계적으로 유아사망의 첫 번째 원인으로 꼽힌다.
조폭이 장악한 '물 장사'…빈민 지역에는 수도가 없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정부는 늘 빈민들에게 깨끗한 물을 제공하겠다고 공약한다. 유엔 정상회담에서도, 유엔 인권위원회에서도, WTO 각료회담에서도, 세계사회포럼에서도, 길거리에서도 물은 첨예한 이슈였다. 물에 관한 한 국가도 시민사회도 심지어는 사기업들도 "우리는 물이 정말 문제라고 여기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다짐하곤 했다.
2000년 전 세계 정상들이 참여해 선언한 장밋빛 청사진, 유엔 새천년개발목표(MDG)에서도 "2015년까지 안전한 물을 지속적으로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수를 반으로 줄이겠다"고 공약했다. 그리고 이런 내용은 2003년 열린 '지속가능한 개발을 위한 세계정상회담'에서 다시 한 번 결의됐다.
"물을 제공하겠다는 정부의 약속은 기만입니다. 오히려 정부가 우리에게 하는 것은 강제철거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불법 거주자거든요." 대다수 정부는 빈민지역처럼 불법으로 건축되고 점유된 곳에 파이프라인을 통해 물을 공급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그런 덕분에 빈민가의 사람들은 새벽부터 몇 시간이고 긴 줄을 서서 물장수들로부터 물을 사서 마셔야 한다.
그런데 이런 물장사는 빈민가의 조직폭력배들이 장악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폭리를 취해도 저항할 수가 없다. 물값은 수도가 달려 있는 주택에 사는 중산층들이 내는 수도세에 비해 최고 10배 가량 비싸다. 아프리카의 경우 주민들의 80%가 물장사에게서 물을 사 먹는다. 유엔기구인 도시정상회의(Habitat)의 보고서에 따르면 나미비아에서 빈민들이 지급하는 물값은 자기 수입의 10~20%에 달한다.
'깨끗한 물'은 초국적 자본에게 구하라
이런 상황에서 빈민가에 수도를 놓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며 IMF와 세계은행이 강요한 것이 대부분의 모든 나라에서 빈민들의 결사투쟁을 불러일으킨 물의 사영화(Privatization)였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볼리비아의 물 투쟁이 가장 널리 알려졌다면, 아프리카에서는 탄자니아의 사례가 가장 먼저 손에 꼽힌다. 탄자니아 정부는 세계은행의 도움을 받는 조건으로 2003년 자국의 물을 영국의 바이워터(Biwater)가 주도하는 콘소시엄에 넘기기로 결정했다. 바이워터는 마거릿 대처가 수상이던 시절 정치권의 비호를 받고 승승장구하며 성장한 영국의 대표적인 초국적 '물'자본이다.
그러나 다른 여러 나라의 사례들과 마찬가지로 보다 많은 사람에게, 보다 양질의 물을 제공하겠다는 약속은 거짓이 되었다. 결국 민중들의 격렬한 저항을 받은 탄자니아 정부는 2005년 바이워터와의 계약을 폐기했다. 계약을 폐기한 탄자니아 정부와 민중들 앞에 놓인 것은 바이워터가 영국고등법원(British High Court)와 세계은행의 분쟁조절기구에 보낸 고소장이었다. 이 고소장에서 바이워터는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에게 2500만 달러를 보상금으로 지불할 것을 요구했다.
"누가 정부에게, 그리고 IMF와 세계은행과 같은 국제기구에게 우리 삶을 마음대로 팔아먹으라고 허용했습니까? 우리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이런 결정을 내리는 그들의 합법성과 정당성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빈민들은 국가와 국제금융기구들의 정당성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물의 사영화'와 관련해 독일의 로자 룩셈부르크 재단이 개최한 포럼에서 ATTAC(국제금융관세연대)와 같은 단체는 이런 빈민들의 문제제기에 전적으로 동감을 표시했다.
사기업이 수립한 공공정책, 정당성 있나?
아프리카 주민들의 가장 절실한 요구인 '깨끗한 물'에 대한 대책을 사기업에 맡긴 것은 이 지역 정부가 공공정책에 대해 취하는 태도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대처와 레이건 식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현재 심각한 정당성의 문제에 봉착해 있습니다. 그 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하는 과정은 민주주의와 합법적 절차를 무시한 채 완전히 몇몇 사람의 비밀스런 손에 좌우됩니다." 나이로비에서 만난 한 활동가의 말이다.
세계은행은 심지어 지원 및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작성할 때 정책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해당 정부나 당사자와 협의하기는커녕 맥킨지와 같은 컨설팅 회사에 맡기는 경우도 종종 있다.
공공정책의 수립에 사기업이 아무런 법적 정당성 없이 끼어드는 것이고 이것은 신자유주의 경제정책 수립과정의 가진 가장 치명적인 정당성의 문제다.
'기도' 없이는 '교육'도 없다는 교회, 프로젝트 수주만 관심쏟는 NGO
빈민들이 정당성에 대해 던지는 문제제기에서 NGO도 자유로울 수 없다. 2000년 UN 세계정상회담에서 '새천년개발계획New Millenium Development Goal'을 발표된 후 키베라에는 우후죽순처럼 크고 작은 NGO들이 들어왔다. 현재 2000개의 NGO와 300개의 교회가 있다. UN의 Habitat도 들어와 마을 입구에 사무실을 차리고 깃발을 높이 꽂았다.
"그들은 우리를 돕는다고 하죠. 그러나 사실 그들은 그들의 장사를 할 뿐입니다." 마을 입구에 있는 UN Habitat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고 묻자 키베라의 빈민들은 "당신 같은 사람들이 오면 응접실로 불러 커피를 대접하는 것이 그들의 직업이지요"라고 냉소했다. NGO 역시 마찬가지다. "NGO들은 지원을 받기 위해 서로 경쟁을 합니다. 자기네들이 한 커뮤니티에서 어떤 프로젝트를 수행하다가 다른 NGO가 같은 프로젝트를 수행하면 하다가도 철수해 버립니다."
"특히 문제는 교회예요. 이들이 빈민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막대합니다. 인권교육을 시작할 때도 '기도'를 하지 않으면 성직자들이 나타나서 훼방을 놓습니다."
나이로비 세계사회포럼에서 열리는 나이로비 빈민가 네트워크의 워크숍도 항상 '기도'와 함께 시작한다. 국제기구인 Dignity International에서 빈민 인권운동가로 일하는 제랄드(Jerald) 씨는 교육과 의료봉사를 통한 빈민가에서의 교회의 막강한 지배가 빈민들의 자립을 방해한다고 비판했다. "수많은 NGO들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7년간 우리들의 삶은 하나도 바뀐 것이 없어요. NGO들은 그들의 장사를 하는 것뿐입니다."
세계사회포럼도 '장사'에 목 매나…밖에서 150실링인 식사가 안에선 350실링
이같은 정당성에 대한 빈민들의 문제제기로부터는 이번 나이로비 세계사회포럼도 자유롭지 못 했다. 빈민들에게도 요구된 500실링(약 8000원 정도)의 세계사회포럼 참가비는 대회 첫날부터 여러 활동가들에 의해 지적된 터였다.
행사에 참석한 급진적인 젊은 빈민들의 분노에 불을 붙인 것은 대회장 안에서의 감당하기 힘든 물과 음식 값이었다. 한 끼에 500실링이 넘는 가격이었다. 대회장 '밖'에 위치한 식당에서는 150실링이면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었고 뷔페도 350실링 정도였다.
비밀은 간단했다. 공식 행사장 '안'에 위치한 '유일무이한' 식당이 조직위원회로부터 '윈저'라는 골프 호텔(Golf Hotel) 부속 레스토랑 운영권을 '구입'했기 때문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대회를 후원한 통신회사인 Celtel은 그 대가로 대회장 안에서의 통신에 대한 독점권을 따냈다. 공중전화는 폐쇄되고 전화를 걸기 위해서는 Celtel이 만들어 놓은 부스로 가야 했다.
"세계사회포럼이 아니라 세계자본주의포럼이다"
분노한 빈민 청년들은 레스토랑과 Celtel 앞에서 시위를 조직했다. "당장 물과 음식 값을 내려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삽시간에 100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대는 급기야 조직위원회 사무실로 진격했다. 세계사회포럼 조직위원회 사무실이 참가자들에 의해 점거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청년들은 조직위원회 사무실에서 "이윤보다 사람이 먼저다", "세계사회포럼이 아니라 세계자본주의포럼이다", "우리 이름으로 대회를 조직하고는 우리들에게 강도질을 하고 있다"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격렬히 항의했다.
시위대 속의 한 청년은 조직위원회 사무실로 가며 "내 평생 처음으로 레드 카펫을 밟아본다. 고맙다, 조직위원회!"라고 외치며 비아냥거렸다. 이 시위에 동참한 외국인 참가자들도 '우리는 여기 활동가로 온 것이지 관광객으로 온 것이 아니다'며 호응했다.
세계사회포럼 조직위원회의 정당성은 빈민들의 직접 행동 앞에 무너져 내렸다. 내용적으로도 이번 세계사회포럼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라틴아메리카 좌파 승리 낳은 세계사회포럼, 아프리카에선 비즈니스 공간?
지금까지 세계사회포럼은 지구촌 곳곳에서 반세계화 운동에 대해 시간적, 공간적인 맥락을 부여하는(contextualization) 자리였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좌파의 승리와 신자유주의의 패퇴는 그동안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개최된 사회포럼의 열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활동가들은 라틴아메리카 곳곳에서 몇 박 며칠이 걸리더라도 버스를 타고 오며 토론하고 다시 돌아가며 평가했다. 사회포럼을 통해 라틴 아메리카는 희망을 생산하고 실천하고 결실을 맺었다. 인도 뭄바이 사회포럼 역시 인도에만 국한될 수 있었던 불가촉 천민들의 투쟁을 지구화하였으며, 불가촉천민들 역시 반세계화운동을 적극적으로 인도로 끌어당겼다.
불행하게도 이번 나이로비 세계사회포럼은 세계화와 군사주의에 맞선 아프리카의 투쟁을 지구화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거꾸로 이런 지구적 투쟁을 아프리카의 투쟁으로 맥락화하는 데에도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개막 연설에서는 당연히 소말리아에 대한 미국의 폭격, 수단 다푸르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쟁과 심각한 인도주의 위기 등을 거론하며 '군사주의에 대한 반대'라는 메시지를 명확한 언어로 전달해야 했다.
그리고 오랜 준비와 협의를 통해 아프리카 다른 국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중운동들을 초대하여(mobilize) '아프리카화'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러나 그 어느 방향으로도 이번 나이로비포럼 조직위원회는 움직이지 못했다.
결국 이번 포럼은 유럽의 단체들이 데리고 온 회원들을 위한 '교육 공간'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대신 아프리카와 케냐 조직위원회는 자신들이 늘 하던대로 포럼을 '비즈니스화'하는 데에만 성공했고, 빈민들로부터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빈민들의 직접행동'에서 희망을 찾다
빈민들의 항의 시위를 비롯한 이번 세계사회 포럼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어찌보면 〈조선일보>와 같은 극우언론들이나 좋아할 만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꼭 그렇게만 볼 일은 아니다. 오히려 아래로부터 일어난 운동이 정당성을 잃고 질주하는 신자유주의에 포섭될 때 그에 어떻게 대항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보여준 희망의 사례였다.
조직위원회가 포럼을 망쳐놓는 동안 빈민들의 조직위원회에 대한 직접행동이 역설적으로 포럼을 살려놓은 셈이다. 조직위라는 '기구'가 일방적으로 독점하고 관리하는 포럼을 아래로부터 주도할 수 있도록 제자리로 돌려놓은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대중운동은 자신들에게 '정부'노릇을 하는 일체의 것들에게 더 이상 침묵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를 '관리'하는 혹은 '관리'하겠다는 너희의 정당성에 대해 가차 없이 질문을 던지고 행동하겠다고 선언했다. 그것이 국가이건, 국제기구이건, NGO이건 혹은 심지어 반세계화운동이건.
조직위의 정당성은 무너졌지만, 포럼의 정신은 도로 살아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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